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이나 유럽 애들과 만나게 되서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무식한 미국 애들은 대부분 한국이 어디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사이로 설명을 하면서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대학 교육 이상을 받고, 나름 국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양층을 만날 때에는 저 질문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에는 국정 교과서로 공부하고, 반공 교육을 충실히 받았던 사람으로서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당혹감과 약간의 분노조차 느껴지곤 했다.
그런 질문을 여러 차례 받다보니 나름 정연하게 대답하는 방법을 만들어 냈는데, 그 때 사용한 것이 자유국가를 상상할 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몇 가지를 놓고 남북한을 비교해 주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북한을 규정해 주는 것이었다. 첫째로는 거주, 이전, 여행의 자유다. 당신이 나를 제외하고 한국인을 몇 명 봤는지 모르겠지만, 북한 사람은 본적이 없을 것이고,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도 볼 일이 거의 없을 게 확실하다. 왜냐면 북한은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고, 해외 여행의 자유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왕정이나 다름 없는 세습 정권이 독재하고 있는 국가라는 점이다. 마지막은 체제가 모든 걸 단일하게 규정하는, 과거 소련으로 상징되는 억압된 사회 문화이다. 언론이며 교육이며 경제활동을 체제가 모두 직접 관리하는 숨막히는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마무리로 적당하다. 뉴스의 코믹함이며, 죽도록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며, 세뇌에 가까운 왜곡된 역사 교육 등. 보통 첫 번째에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진짜냐고 묻고, 두 번째에서 아하! 순간을 경험하며, 세 번째 내용에서 답답함과 동정과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대화를 마무리하게 된다.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정말 괜찮은 외국인과 첫 대화용 주제가 아닌가 싶다.
역사 교과서, KBS 사장 선임, 대통령이 직접 시위 시민을 테러범에 빗대는 촌극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국정교과서 반대 서명 운동을 진행하는 한 한인 미국 유학생의 인터뷰가 눈에 들어와 박힌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이야기를 미국 학생과 나누다가 들은 질문이 그게 남한 얘기냐 북한 얘기냐는거다. 충격을 받은 한인 유학생이 인터넷에 반대 서명 사이트를 개설했고, 하루만에 몇백명이 참여하고 현재 몇천명이 넘어가고 있다는 뉴스다.
거의 십오년 이상이 흐른 2015년 지금, 다시 남한과 북한의 차이점을 내가 설득력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 정말 거주, 이전, 여행의 자유가 있는가? 협소한 범위의 초록이 동색인 사람들만 부대끼면서 살다가, 최근에는 좀 더 넓은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특히 부모세대의 지역적 기반이 다르거나, 경제적 여유로움이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을 보면서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젊은 신혼 부부들은 서울 안에 있는 거주지를 구할 수 없다. 성남, 분당 같은 근교도 어렵다. 인천, 부천, 안양 등에서 하루에 두시간 이상을 길바닥에서 허비해야 일하러 올 수 있는 곳에 둥지를 튼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세가가 폭등해서 이주를 해야 하는 경우에도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 상황을 피할 수 없기에, 결국 대출을 늘리는 결정을 내리는 친구들은 우리 주변의 흔남 흔녀들이다. 30대 중반이 되도록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일했지만, 제주도도 놀러가 본 적 없다는 친구도 있다. 회사에서 워크샾으로 제주도로 갔을 때, 비행기를 처음 타 봤다는 친구가 여러 명 있는 걸 보면서 가슴 한 편이 이해할 수 없이 무겁고 쓰라리고, 이유없이 얼굴이 붉어지는 경험을 했다.
두 번째 질문에도 나는 솔직히 큰 차이점을 주장하기 어렵다. 과거 20년간 군화발로 한국을 짓밟고 통치한 독재자의 딸이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건은 그저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아시아 국가들에서 최신 유행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오히려 이것은 상징으로 보인다. 한국의 자본가들은 이미 세습이 익숙한 개념이고, 주식회사 집단으로 구성된 재벌들도 이미 3세 세습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학벌로 시작하여 영어, 취업 등으로 확대되는 권력 세습도 일상적인 현실이 되고 있다. 오히려 촘촘하고 미시적인 세습들에 젖어 있는 곳이 남쪽일지 북쪽일지 단언하기 어렵다.
마지막 질문은 더욱 심각하다. 다양성의 후퇴, 견제 기능의 상실, 파시즘적인 관리체계가 점점 세밀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MB 정권부터 본격화된 언론에 대한 직접 통제, 종편과 케이블 방송 사업자들의 시장 확대로부터 나타나는 전두환 시절 3S 정책의 확장 효과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인 저널리즘을 폐색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문제가 가장 크게 보이지만, 이미 지난 정권부터 전방위적인 작업은 다양한 쐐기 효과를 내면서 수구화를 진행하고 있다. 그나마 분권화가 가장 진행된 교육 행정의 중앙 간섭 강화 시도에서부터, 좀 더 대담하게는 교육감 직선제 폐지로 이어지는 정교한 어젠더 셋팅. 급식 논란으로 또 한 걸음 수구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홍준표의 경남. 수구적 지배계층에 맹목적인 헌신이 반드시 보답받으면서 점점 더 권력에 종속되는 사법, 행정 관료들. 혹은 웬만한 법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정보기관과 경찰, 검찰의 칼날. 민주 공화국 체제에서 정당의 해산까지 선례를 남긴 과감한 협업 플레이까지. 전방위적으로 정교한 기획과 실행을 위한 협업 체계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것을 조각조각 목격하고 있다. (정치인의 망언 –> 언론의 바람잡이 –> 관변단체의 행동 –> 언론의 여론 조작 –> 정치인의 기습-졸속 입법 혹은 정부의 시행령 –> 간접 분야로 확대 여론 –> 관변 혹은 준 국가기구들의 행동 등… 거의 모든 주제에서 위와 같은 협업 플레이가 자리잡았다.)
욕하면서 닮는다던지, 적대적 공생 관계라던지 이미 남북한의 동조화 양상에 대해서는 많은 지적이 있어 왔다. 이러한 관점에 대한 비판으로는 양비론적 사고에서 유래하는 비현실적인 결론을 주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의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민주주의 실현에서 더 진일보한 국가들에게 남한과 북한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이 15년전보다 어려워 졌다고 느끼는 것은 정말 양비론이기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