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리미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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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예약한 작가들이라는 알라딘 메일을 보고 호기심에 구입한 책.

이상하게 영미권에 대한 쓸데없는 반감이 많아서 고전 외에는 문학이고 철학이고 사회학이고 이 쪽 동네 것들은 들여다 본 적이 많이 없다. 제목 그럴싸하게 뽑은 미국 책들 좀 봤지만, 그네들 책 쓰는 방식도 쏙 마음에 들지 않았었고…

짧은 중편 정도 되는 소품이라서 부담없이 뽑아 들었는데, 몰입감 있게 뚝딱 읽었다. 지문도 거의 없는 희곡처럼 흑인 남자와 백인 남자의 대화로만 된 책인데, 역시 상상력을 따라 갈 수 있는 묘사란 건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흥미진진했다.

흑인과 백인의 미국적 클리쉐들을 그대로 가지고, 미국식 기독교와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식상함을 절묘하게 피해가는 솜씨가 놀라웠다. 그러다가 쾅! 결말에서는 고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로드”라는 책을 다음 번 구매 때 꼭 사기로 했다. 몇 권 둘러볼 만한 작가를 만났다.

남한과 북한

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이나 유럽 애들과 만나게 되서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면,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무식한 미국 애들은 대부분 한국이 어디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사이로 설명을 하면서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대학 교육 이상을 받고, 나름 국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양층을 만날 때에는 저 질문이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에는 국정 교과서로 공부하고, 반공 교육을 충실히 받았던 사람으로서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당혹감과 약간의 분노조차 느껴지곤 했다.

North and South Korean flags

그런 질문을 여러 차례 받다보니 나름 정연하게 대답하는 방법을 만들어 냈는데, 그 때 사용한 것이 자유국가를 상상할 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몇 가지를 놓고 남북한을 비교해 주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북한을 규정해 주는 것이었다. 첫째로는 거주, 이전, 여행의 자유다. 당신이 나를 제외하고 한국인을 몇 명 봤는지 모르겠지만, 북한 사람은 본적이 없을 것이고,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도 볼 일이 거의 없을 게 확실하다. 왜냐면 북한은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고, 해외 여행의 자유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왕정이나 다름 없는 세습 정권이 독재하고 있는 국가라는 점이다. 마지막은 체제가 모든 걸 단일하게 규정하는, 과거 소련으로 상징되는 억압된 사회 문화이다. 언론이며 교육이며 경제활동을 체제가 모두 직접 관리하는 숨막히는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마무리로 적당하다. 뉴스의 코믹함이며, 죽도록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며, 세뇌에 가까운 왜곡된 역사 교육 등. 보통 첫 번째에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진짜냐고 묻고, 두 번째에서 아하! 순간을 경험하며, 세 번째 내용에서 답답함과 동정과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대화를 마무리하게 된다.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정말 괜찮은 외국인과 첫 대화용 주제가 아닌가 싶다.

역사 교과서, KBS 사장 선임, 대통령이 직접 시위 시민을 테러범에 빗대는 촌극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국정교과서 반대 서명 운동을 진행하는 한 한인 미국 유학생의 인터뷰가 눈에 들어와 박힌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이야기를 미국 학생과 나누다가 들은 질문이 그게 남한 얘기냐 북한 얘기냐는거다. 충격을 받은 한인 유학생이 인터넷에 반대 서명 사이트를 개설했고, 하루만에 몇백명이 참여하고 현재 몇천명이 넘어가고 있다는 뉴스다.

거의 십오년 이상이 흐른 2015년 지금, 다시 남한과 북한의 차이점을 내가 설득력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 정말 거주, 이전, 여행의 자유가 있는가? 협소한 범위의 초록이 동색인 사람들만 부대끼면서 살다가, 최근에는 좀 더 넓은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특히 부모세대의 지역적 기반이 다르거나, 경제적 여유로움이 나보다 부족한 사람들을 보면서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젊은 신혼 부부들은 서울 안에 있는 거주지를 구할 수 없다. 성남, 분당 같은 근교도 어렵다. 인천, 부천, 안양 등에서 하루에 두시간 이상을 길바닥에서 허비해야 일하러 올 수 있는 곳에 둥지를 튼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세가가 폭등해서 이주를 해야 하는 경우에도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 상황을 피할 수 없기에, 결국 대출을 늘리는 결정을 내리는 친구들은 우리 주변의 흔남 흔녀들이다. 30대 중반이 되도록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일했지만, 제주도도 놀러가 본 적 없다는 친구도 있다. 회사에서 워크샾으로 제주도로 갔을 때, 비행기를 처음 타 봤다는 친구가 여러 명 있는 걸 보면서 가슴 한 편이 이해할 수 없이 무겁고 쓰라리고, 이유없이 얼굴이 붉어지는 경험을 했다.

두 번째 질문에도 나는 솔직히 큰 차이점을 주장하기 어렵다. 과거 20년간 군화발로 한국을 짓밟고 통치한 독재자의 딸이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건은 그저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아시아 국가들에서 최신 유행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오히려 이것은 상징으로 보인다. 한국의 자본가들은 이미 세습이 익숙한 개념이고, 주식회사 집단으로 구성된 재벌들도 이미 3세 세습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학벌로 시작하여 영어, 취업 등으로 확대되는 권력 세습도 일상적인 현실이 되고 있다. 오히려 촘촘하고 미시적인 세습들에 젖어 있는 곳이 남쪽일지 북쪽일지 단언하기 어렵다.

마지막 질문은 더욱 심각하다. 다양성의 후퇴, 견제 기능의 상실, 파시즘적인 관리체계가 점점 세밀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MB 정권부터 본격화된 언론에 대한 직접 통제, 종편과 케이블 방송 사업자들의 시장 확대로부터 나타나는 전두환 시절 3S 정책의 확장 효과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인 저널리즘을 폐색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역사교과서 문제가 가장 크게 보이지만, 이미 지난 정권부터 전방위적인 작업은 다양한 쐐기 효과를 내면서 수구화를 진행하고 있다. 그나마 분권화가 가장 진행된 교육 행정의 중앙 간섭 강화 시도에서부터, 좀 더 대담하게는 교육감 직선제 폐지로 이어지는 정교한 어젠더 셋팅. 급식 논란으로 또 한 걸음 수구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홍준표의 경남. 수구적 지배계층에 맹목적인 헌신이 반드시 보답받으면서 점점 더  권력에 종속되는 사법, 행정 관료들. 혹은 웬만한 법을 가뿐하게 뛰어넘는 정보기관과 경찰, 검찰의 칼날. 민주 공화국 체제에서 정당의 해산까지 선례를 남긴 과감한 협업 플레이까지. 전방위적으로 정교한 기획과 실행을 위한 협업 체계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것을 조각조각 목격하고 있다. (정치인의 망언 –> 언론의 바람잡이 –> 관변단체의 행동 –> 언론의 여론 조작 –> 정치인의 기습-졸속 입법 혹은 정부의 시행령 –> 간접 분야로 확대 여론 –> 관변 혹은 준 국가기구들의 행동 등… 거의 모든 주제에서 위와 같은 협업 플레이가 자리잡았다.)

욕하면서 닮는다던지, 적대적 공생 관계라던지 이미 남북한의 동조화 양상에 대해서는 많은 지적이 있어 왔다. 이러한 관점에 대한 비판으로는 양비론적 사고에서 유래하는 비현실적인 결론을 주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의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민주주의 실현에서 더 진일보한 국가들에게 남한과 북한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이 15년전보다 어려워 졌다고 느끼는 것은 정말 양비론이기만 할까?

 

위로공단, 김동춘 교수, 임흥순 감독

11월 18일. 복합문화공간 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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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공단 포스터 / 출처: 다음 영화

원래 이런 종류의 영화를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생소함이나 위화감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마이클 무어의 몇몇 다큐멘터리가 유일한 비교 기준이었으니까. 스틸 컷에 가까운 퍼포먼스 화면, 벌레, 새들, 숲속과 같은 이미지를 단락 사이에 배치하거나, 씬 안에 삽입하는 형태를 통해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작법과 차별화하려고 한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 하나의 장점은 공간과 시간을 배치하는 대담한 시도였다. 감독이 직접 언급했듯이 ‘어머니’를 모티브로 우리나라의 과거 풍경을 여성 노동자 증언으로 구성하면서, 시간을 여성노동자 공간으로 이동시키고, 이걸 다시 캄보디아나 국내의 외국인 노동자로 공간적으로 확장하면서 물리적인 시간 대신에 진보의 시간이 멈춰있음을 주장한다. 캄보디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한국 정부와 교감한 현지 정부에 사주하여 극렬한 폭력 진압에 나서는 영상에서는 단순히 진보가 멈춘 시간을 넘어 반복되면서 더 짙어지는 비극의 모습을 그려낸다. 영화 전체를 살려 낸 공간 배치에 의한 시간의 재정의로 생각한다.

반면, 여러가지 아쉬운 점들도 많다. 김동춘 교수가 대담의 시작부터 지적했듯이,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정한 이유가 뭔지 불명확하다. 결국 영화를 통해 명확하게 주제나 통찰을 드러내는 데는 실패한 쪽에 가깝지 않나 싶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내적으로 돌파하거나 새로운 통찰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인터뷰를 나열하면서 시간을 흘려보낸다. 여성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던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아주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메시지만 도출되는 상황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그런 인터뷰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다산 콜센터 노동자였다. 자신의 생활에서 묻어나오는 안타까움을 담담하게 혹은 당당하게 고백하던 하나의 인터뷰이가, 다음 화면에서 손을 벌벌벌 떨면서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항상 듣게되는 구호, 어쩌면 그 상황에 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만들 수도 있는 그런 리듬이 없다. 그녀는 바로 전 인터뷰에서 바로 우리들과 현실을 공유하던 한 사람이었고. 시위대를 이끄는 마이크를 겨우 들고 서서, 우리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겨우겨우 토해낸다. 이야기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있고, 이야기가 점점 그녀에게 힘을 주지만, 결코 쉽지 않은 정말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처했다는 걸 누구나 한 눈에 알 수 있다. 이런 부분이 감독이 더 천착했어야 하는 여성 노동 운동의 특이점 아닐까?  남성 노동자의 저항은 전투적이다. 공격적이고, 구호와 리듬에 가득 차 있고, 어쩌면 마음 속 깊은 증오를 연료로 태우며 시위 자체의 위력을 최대화한다. 그러나 다산콜센터의 그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금방이라도 마이크를 떨어뜨릴 듯이 바들바들 떠는 손, 주저앉아 울기 직전인 듯한 눈망울, 덜덜 떨리는 와중에 점점 크게 터져나오는 외침. 그 안의 이야기도 누구에 대한 증오와 공격이 아닌 절절한 내 이웃, 내 아내, 나 자신의 이야기로 이어져 갈 뿐이다. 한국의 여성 노동 운동을 이끌어 온 사람들의 인터뷰에서도, 좀 더 이런 폭넓은 공감대를 만드는 특징, 혹은 그들이 여성으로서 버텨 온 강점들에 집중했으면 훨씬 강력한 메시지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다른 다큐멘터리와 차별화하는데 큰 도움을 준 기법들도 조금 더 정교한 기획이 아쉽다. 자연의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숲, 작은 벌레들, 공장에 포획된 잠자리, 개미, 포식자인 거미나 새, 새들이 새까맣게 모인 군집들이 등장하지만, 정교한 배치보다는 순간순간의 호흡 조절에 더 기여하는 느낌이다. 소녀들이 등장하는 스틸 것과 같은 씬들은 사실 조금 더 실망스럽다. 사실 상 부작용이 더 큰 클리쉐인 ‘흰 옷을 입은 소녀’가 등장하다니! 더욱이 가혹한 노동 조건이나 폭력에 시달리는 소녀를 퍼포먼스처럼 찍는 화면을 보면 다큐멘터리가 가진 강렬함을 오히려 반감시키며, 부드러운 것이 여성적이라는 인식을 내리 꼽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인터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유쾌한 과거 회상이 주는 묘한 느낌도 날려버리기 일쑤였다. 이는 여성 노동 운동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엷은 상태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남성 중심의 전투적 노동운동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체제에 균열을 찾아내고, 틈새를 벌리고, 그 안에서 살아남으며 운동을 확대해 나가는지를 훨씬 치열하게 파고 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가 끝난 뒤 사람들의 질문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 등장하는 것은, 실제 답을 달라고 요구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영화가 여성 노동자들의 저항을 관찰하면서 끄집어 내는 주제가 미약하기 때문에 곱씹을 거리가 적어서 나오는 질문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상영 뒤에 이어진 김동춘 교수와 임흥순 감독과의 대담도 이러한 주제로 더 나아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김동춘 교수가 제기한 80년대 전태일 이후 노동 운동의 아이콘이 무엇인지라는 질문.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여성 운동가들, 노동자들. 그리고 말미에 김교수가 언급한 김부선씨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운동가. 교양 시민을 길러내는 스웨덴의 수많은 시민 조직들. 주변국으로 옮겨간 혹은 내부에 주변을 만들어 내며 과거를 반복하는 외국인 노동자 착취 문제. 상찬을 꾸밀만한 맛나는 반찬과 일품요리들이 백화점 시식 코너처럼 즐비했으나, 한 끼 식사도 구성해 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역사를 보는 법은 1개일 수 없다는 말을 상식처럼 내세우고 있는 요즘이지만. 단순히 교과서의 종류라는 물리적인 상황 외에, 얼마나 다른 시각을 고민하면서 사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김동춘 교수가 짧은 대담에서 내놓은 말들이 딛고 서 있는 ‘시각’이 준 생경함은 얼마나 우리가 역사적 교훈과 민중 중심의 역사를 확실하게 말살해 왔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나도 결국은 국정 교과서로 공부한 세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