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 업데이트:
점점 우리나라도 소위 세계문학을 접할 수 있게 되고 있다. 영미권에 매몰된 우리 관점에 ‘이국적’인 작가들이 슬슬 들어온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마르케스의 소설들에서 느낀 남미만의 풍경과 세계관 같은 것들을 기대하고 봤다가 한 방 먹었다. 스트라이크존 꽉 찬 곳을 때리는 묵직한 속구였다.
칠레라는 변방에서, 아옌데, 피노체트를 거치는 격변과 이데올로기 횡포 한가운데가 무대다. 지식인이란 무엇이고, 시, 소설, 평론을 포함한 문학은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깊숙히 숨어 있는 비밀을 순간 작살로 찔러 올린다. 그리고 죽음 너머로 던진다. 카톨릭 신부이면서 시인, 그리고 필명으로 활동하는 유명한 평론가. 젊은 사제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평론계 거물. 그 은밀한 정원에 나타나는 문학계 유명인들, 그리고 네루다. 엄혹한 시절에 파고들 동굴은 고전문학이고, 세계를 상상하는 힘을 가진 지식은 세계를 망치는 자들의 손에 더 무겁게 파고든다. 야만이 일상이 된 삶은 고문과 살인을 깔고 앉아 소설과 시를 잉태한다. 그렇게 문학은 씌어지고 소비되고 살아남는다. 진짜로 봐야 하는 것들을 외면하는 허위가 문학이고 지식이다. 지독하고 무서운 관찰이다. 격동의 역사 또한 작가의 돌직구를 피해가지 못한다. 카톨릭은 비둘기를 죽이는 매를 불러와 성당을 지킨다. 비둘기 또한 신의 뜻임을 깨달은 사제는 힘겹게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 문학은 종종 길을 잃고 현실에 머무르기도 하지만 그들을 뿌리치고 화려한 무대로 언제나 되돌아온다. 화려한 무대 깊숙한 곳에서 희극은 진짜 비극과 마주치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해 희극은 가벼움으로 날아오를 수 밖에 없다. 부조리한 현실은 이렇게 말한다.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한다.” 작가는 곧 이를 세계로 확장한다. “어디 칠레에서만 그런가. 아르헨티나, 멕시코, 과테말라, 우루과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 푸르른 영국과 즐거운 이탈리아에서도 그런걸.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주인공의 독백은 소설을 거기까지 읽어 온 독자들에게 동어반복이고 사족이고 불필요한 강조다. 이미 칠레는 칠레가 아니다. 그리고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최남선, 이광수에서 출발하여 이문열, 김지하가 걸어간 길을 따라오다가 모든 것을 외면한 채 문단 놀이에 빠진 한국 현대 문학의 풍경이 아프게 떠오른다. 역사는 시간 속에서 반복될 뿐만 아니라, 공간을 건너며 다시 반복하나보다.
알라딘에 쓴 100자 평으로 대신한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글을 쓰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좋다. 그런 글이 아닌 것들도 포함되어 별 하나를 깐다. 판결은 도구, 카피는 100% 상품이고. 번역가, 철학자, 시인은 기능인의 직업 소개같다. 소설, 기사, 칼럼, 설교, 동화, 평론과 시나리오는 따뜻하게 잘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