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혁명??

“광화문 촛불시위의 목적은 박근혜 몰아내기입니다. 그래서 좌파단체와 극렬노조를 중심으로 한 그들은 일차적으로 국회의 정치적 탄핵을 이끌어내는데는 성공을 했습니다”라면서 “이제 남은 것은 헌재 압박이지요..민중혁명을 하겠다는 것”

“합법을 가장해 헌재를 협박해서 민중혁명으로 박근혜를 몰아내고 정권교체가 아니라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것이다. 무서운 정치적 음모”

홍준표가 한 말이다. 출처는 여기: 홍준표 “광화문 촛불시위 목적은 민중혁명”

아니. 민중혁명이 그렇게 나쁜 말이었나? 공안 검사 출신 반미치광이가 남 욕할 때 쓰는 거 보니 얼마나 나쁜 일인지 상상도 못하겠다. ㅎㅎ

새로운 계급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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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슬라보예 지젝, 2015(원작), 2016(한국어본)

지젝의 책들 속에서 몽롱하게 헤엄치고는 했다. 푸코에 시달리다가 독서가 뜸했던 시기를 거치고 난 후였을 것이다. 언뜻 곁눈질에 비치는 섬뜩한 메시지. 항상 모호한 안개 속에 있는 라캉의 세계 그 위에 지은 궁전의 윤곽. 대부분의 비영어권 철학책 번역이 그렇듯이, 개념어 번역의 한계와 전문 번역가 부재로 읽기는 정말 어렵다. 지젝이 본격적으로 쓴 철학서 계보에 도전하다가 어느 순간 소설로 튀어나갔더랬다.

미셸 푸코의 경우 대학교에서 한 강의나 당대 철학자들과의 대담집을 보면 그의 난해한 글쓰기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입말을 만나게 된다. 유투브에 찾아보면 촘스키와 푸코가 영어와 프랑스어를 넘나들며 담론을 나누는 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 푸코의 철학서에 허덕이다가 입말을 옮긴 책들을 보게되면 많은 유레카의 순간을 마주치곤 했다. 지젝의 <새로운 계급투쟁>이 딱 그런 경우다. 난민 문제(혹은 난민에 대처하는 유럽 좌파의 문제)라는 상대적으로 친숙하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책이다. 챕터별로 일반 교양 대중을 위한 분량를 담아 쪼갰다. 거기다가 지젝이 구축한 철학적 관점에 기반한 가볍지만은 않은 메시지를 담았고. 거기에 쉽게 썼다.(혹은 훌륭한 번역도 일조했을지 모르고.)

지젝의 관점이 항상 그렇듯이 시야를 확장하고 사건을 달리 보게 만들어 준다. 원제가 독일어로 되어 있어서 제목을 어떤식으로 옮긴 건지 모르겠다. ‘새로운 계급투쟁’이라니… 좌파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을 말하는 책에서 계급투쟁이라는 전투적인 단어를 제목으로 쓰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쉬운 지젝 책이 많이 팔릴까봐 두려워한 걸까. 핑크에 주먹에 계급투쟁이 표지에 있으면 아무래도 가지고 다니면서 읽기는 어렵겠다. 그래서 전자책으로 구매 후 일독. ㅎㅎ

 

 

 

a.k.a. 태극기 집회

어르신들도 슬슬 즐기시는 것 같아서 마음 한 편이 한결 편안하다. 저 해맑은 흰 눈썹과 베레모를 보라. 솔직히 태극기가 저렇게 친근하게 보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이제 저 분들이 ‘보수’다. 이게 얼마나 끝내주는 일인지 심장이 두근두근한다. 이제 보수는 시대가 저문 사람들의 마지막 저항일 뿐이다. 그것도 아주 우아하게 말해서. ‘보수’ 말고 이제 뭐가 될 것인지. ‘단어’가 나와야 하는데. 이런 상황이 세계적으로 드문지라… 어찌될지 궁금하다.

 

인상적인 뉴스 클립

트럼프가 단순히 미국 선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퇴행의 징조라는 증거:

Trump energizes the anti-vaccine movement in Tex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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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이랄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트럼프는 퇴행적, 반동적 경향을 묶어내며 Doomsday machine에 불을 때는 매드맥스 배불뚝이 불한당 같다. 인상적이다.

우뱅우 vs 기자

이 사람 키가 큰걸까? 아주 내려다보고 아래위로 훑는데 근엄하고 자연스럽다. 인상적이다.

오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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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오젠.

긴축 재정으로 거의 못갈거라 예상했지만, 이제 아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더더욱 요원해진 오젠. 입덧을 극복한다는 핑계를 부여잡고 과감히 금요일 저녁에 진격. 불쌍한 부부의 사연을 들은 사장님이 술 한병을 할인해서 주시고, 그 덕분에 이제 술먹지 못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혼자 꽐라가 되었다. 늘 그렇듯이 만족스럽고 기분 좋다. 슬슬 사장님이 말도 많아지고 하는데 자주 못갈것 같아서 더욱 아쉽다.

최근에는 궁핍과 아내의 임신으로 맛집 갈 일이 거의 없다. 방법은 맛집의 정의를 바꾸는 것. 싸고 맛있는 집은 없으므로…. 주관적인 혹은 순간의 경험이 어우러진 나만의 맛집을 찾을 수 밖에. 물론 제일 좋은 맛집은 우리 집이 되었기 때문에 큰 갈증은 없다. 고 믿는다. 만 쉽지 않다.

4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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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대상 <풍경소리>, 구효서

절묘한 시점 변화로 화자를 바꿔치기하는 방법이 정말 인상적이다. 소설 말미에 이르러 시점 변화에 따라 인물의 변화를 뒤늦게 알아채고는 황급히 앞장을 훑어보며 허둥댔다. 같은 기법을 가지고 공포나 미스테리 장르를 살짝 가져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다른 규칙이 지배하는 분리된 공간이며, 초자연적인 존재를 암시하는 시선이며, 주인공 입장에서 이해 불가능한 것이 단단히 자리잡은 사건들이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소설이 가져가는 따뜻한 시선과 결말도 나쁘지 않다.

만장일치를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다른 출품작들이 모두 아쉬운 점을 하나씩 품고 있다는 것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수상자가 중견 작가라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매년 당선되는 소설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지만, 2016년같이 현실이 소설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당선작들은 어중간하다. 현실을 뚥고 나가는 힘이나 젊은 단편의 패기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실에 뿌리 내린 문학의 대응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문학이 문학으로만 존재하려고 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노골적으로 까발리고 조롱한다. 칠레의 격동기 현실을 말하면서 동시대를 아우르고 다시 이를 넘어서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상’이라는 시인을 기리는 단편 문학상이 우리의 볼라뇨를 발굴하는데 더 일조했으면 한다.

우좌지간 다시 예전의 표지 디자인으로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 이것저것 하다가 잘 안돼면 원래 하던 방식에 내려 앉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ㅎㅎ

칠레의 밤, 나는 어떻게 쓰는가

읽은 책 업데이트:

<칠레의 밤>로베르토 볼라뇨 (지은이) |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원작 2000년

점점 우리나라도 소위 세계문학을 접할 수 있게 되고 있다. 영미권에 매몰된 우리 관점에 ‘이국적’인 작가들이 슬슬 들어온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마르케스의 소설들에서 느낀 남미만의 풍경과 세계관 같은 것들을 기대하고 봤다가 한 방 먹었다. 스트라이크존 꽉 찬 곳을 때리는 묵직한 속구였다.

칠레라는 변방에서, 아옌데, 피노체트를 거치는 격변과 이데올로기 횡포 한가운데가 무대다. 지식인이란 무엇이고, 시, 소설, 평론을 포함한 문학은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깊숙히 숨어 있는 비밀을 순간 작살로 찔러 올린다. 그리고 죽음 너머로 던진다. 카톨릭 신부이면서 시인, 그리고 필명으로 활동하는 유명한 평론가. 젊은 사제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평론계 거물. 그 은밀한 정원에 나타나는 문학계 유명인들, 그리고 네루다. 엄혹한 시절에 파고들 동굴은 고전문학이고, 세계를 상상하는 힘을 가진 지식은 세계를 망치는 자들의 손에 더 무겁게 파고든다. 야만이 일상이 된 삶은 고문과 살인을 깔고 앉아 소설과 시를 잉태한다. 그렇게 문학은 씌어지고 소비되고 살아남는다. 진짜로 봐야 하는 것들을 외면하는 허위가 문학이고 지식이다. 지독하고 무서운 관찰이다. 격동의 역사 또한 작가의 돌직구를 피해가지 못한다. 카톨릭은 비둘기를 죽이는 매를 불러와 성당을 지킨다. 비둘기 또한 신의 뜻임을 깨달은 사제는 힘겹게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 문학은 종종 길을 잃고 현실에 머무르기도 하지만 그들을 뿌리치고 화려한 무대로 언제나 되돌아온다. 화려한 무대 깊숙한 곳에서 희극은 진짜 비극과 마주치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해 희극은 가벼움으로 날아오를 수 밖에 없다. 부조리한 현실은 이렇게 말한다.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한다.” 작가는 곧 이를 세계로 확장한다. “어디 칠레에서만 그런가. 아르헨티나, 멕시코, 과테말라, 우루과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 푸르른 영국과 즐거운 이탈리아에서도 그런걸.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주인공의 독백은 소설을 거기까지 읽어 온 독자들에게 동어반복이고 사족이고 불필요한 강조다. 이미 칠레는 칠레가 아니다. 그리고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최남선, 이광수에서 출발하여 이문열, 김지하가 걸어간 길을 따라오다가 모든 것을 외면한 채 문단 놀이에 빠진 한국 현대 문학의 풍경이 아프게 떠오른다. 역사는 시간 속에서 반복될 뿐만 아니라, 공간을 건너며 다시 반복하나보다.

 

<나는 어떻게 쓰는가>성귀수 | 이영수(듀나) | 김중미 | 최훈 | 반이정 | 유희경 | 손수진 | 임범 | 김선정 | 김영진 | 안수찬 | 김진호 | 정인진

알라딘에 쓴 100자 평으로 대신한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글을 쓰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좋다. 그런 글이 아닌 것들도 포함되어 별 하나를 깐다. 판결은 도구, 카피는 100% 상품이고. 번역가, 철학자, 시인은 기능인의 직업 소개같다. 소설, 기사, 칼럼, 설교, 동화, 평론과 시나리오는 따뜻하게 잘 읽었다.

중앙, 홍석현

jtbc가 마구 뜨기 시작할무렵, 중앙을 소유한 홍씨일가가 얼마나 겁나는 무기를 가지게 되었는지 생각한 적이 있다. 이후에 당연히 대선판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아예 홍석현씨의 출마설이 돈다!!?? 

하놔… 겁난다 겁나. 친일, 친군부, 친미, 친재벌에 근대 역사 속에서 시민학살, 정치조작, 탄압에 광범위하게 개입한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엮인 집단 중 박씨 일가를 제외한 최고봉이 직접 나서시려는건가. 시쳇말로 모골이 송연하다. 무섭다.

홀연히 아래 사진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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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장 힘내라는 기자 홍위병을 거느리고 난관을 헤쳐나가는 홍석현씨 모습. 심지어 웃고 계신다… 덜덜덜

도쿄갓파더즈,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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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뒤져보고 있는 콘 사토시 명작 시리즈. 그의 작품 중에 가장 대중적이고 발랄하다고 하는 <도쿄 갓파더즈>다. 한국에서 개봉할 때 제목은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대부분의 한국어판 외화 제목이 큰 웃음을 주는 것과 달리 이건 원작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어서 좋다. <동경대부>라는 한자 표현이나, <도쿄갓파더즈>보다는 우리에게 훨씬 직관적이다.

콘 사토시의 세계관이 낙관을 도려내고도 쿨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발랄한 이야기에서도 그 특징은 여전하다. 오히려 대책없는 낙관이 없는 편이 강한 긍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 그런 긍정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세상에 드러난다. 구조는 변하지 않되 개인이 성장하는 이야기 틀에서 개인의 성장에 집중해서 큰 감동을 만들어 낸다. 구조에 대한 비판은 그 구조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통해 오히려 묵직하게 복부를 후려친다.

콘 사토시가 남기고 간 명작들이 몇 개 안남아서 슬프다. 다음에는 <천년여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