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Blue

1997년작. 이렇게 시대를 앞서나가는 천재들이 있다. 부럽다. 가끔은 이런 천재를 가지기 위해서 영혼과 행복은 조금 팔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콘 감독은 영혼을 많이 팔아서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갔을지도 모른다.

만델라 효과

난리법석 시국에서 다시금 까스통 할배니 골수 TK니 박사모니 하는 사람들의 괴이한 행동들이 눈에 띈다. 국제시장이 깔끔하게 정리하는 역사를 부여잡고 빨치산 – 친일 – 군벌의 삶을 살았던 막장 인생을 신격화한다. 원래 그 계통에서 잘나가던 사람들이야 그런 논리를 만들어내고 동참할 동기부여가 확실하다. 그런데 도대체 625때 기억도 잘 못하고, 민주화 운동으로 세상이 바뀌는 걸 목도한 돈도 없는 서민들이 허풍이나 다름 없는 이야기들에 목을 매는지는 동기부여나 이성적인 판단의 영역에서 찾아볼 일은 아니다.

이런저런 글들을 보다가 만델라 효과라는 재미있는 현상을 다룬 토막글을 봤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처럼 기억하고 있지만 과거 실체적 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걸 가지고 재미있는 Meme으로 정리한 것들이 꽤 된다. 재밋거리처럼 들리지만 시사하는 바는 꽤 소름이 돋는다. 개인 차원에서 수정된 기억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홍상수가 지금보다 좀 더 흥미로울 때 찍었던 <오! 수정>이라던지, 이러한 이기적인 거짓말로(아니면 무의식적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는 아이러니의 대표작인 <라쇼몽>이 그런 예이다. 이런 과거의 주관적 재구성이 개인 차원을 벗어나 집단으로 확장되고, 집단 기억으로 탄생한 가짜 과거가 진짜 과거를 밀어내고 역사의 자리를 차지하게 만드는 것이 만델라 효과인 것이다. 이것이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오면 역사 왜곡이 된다.

만델라 효과로 언급된 사례들은 우연한 기회에 발생한 사건들을 소재로 한다. 그러나 누군가, 대중의 운동성에 대해 전문가인 누군가가, 절묘하고 필요한 타이밍에, 적절한 소재와 이야기로 만델라 효과를 일으켰다면? 의도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특정 집단의 자기 합리화 필요와 특정 집단의 과거 재구성 필요가 만나서 강력한 만델라 효과를 일으켰다면? 그리고 그것이 의도적인 재생산 과정을 거치며 계속 커가고 있었다면? 그래서 그것이 결국 현실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지경에 이르러, 아무리 노력해도 바로잡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면? 그것이 지금 ‘군사정변으로 국가를 침탈한 사람과 그 여식에 대한 신화’라는 만델라 효과가 아닐까 싶다.

박정희 시대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했다는 이야기는 그저 정치적 주장이나 다름없다. 북한과 체제 경쟁을 할 때 사실 상 초반에는 훨씬 뒤지다가 나중에 이기게 된 것은 대부분 시스템 자체가 성장 지향적이라던지, 미국의 전략적 투자라던지, 아니면 북한의 실정에 힘입은 바도 고려해야 한다. 오히려 박정희가 경제 성장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부분은 오늘날 종북 빨갱이라 매도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정책들과 결을 같이 한다. 골수 빨갱이 나라 쿠바 말고 이 정도 수준의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공산주의 대부 중국보다 더 강력한 방법으로 국가 주도(라고 쓰고 정경유착으로 읽지만)로 산업을 직접 키운 사례가 어디 또 있는지. 케인즈가 말한대로 전국 국가 인프라에 자원투자를 집중한 사례는 또 어떤지. 막말로 경제성장률은 전두환 때 엄청났는데, 그럼 전장군은 박정희 환생으로 국가 경제를 일으킨 분이냐는거다. 생각만 해도 짜증이 돋는다.

굳이 팩트니 뭐니 하면서 대거리 할 필요도 없다. 모든 주장을 전부 다 사실로 받아준다고 해도 여전히 군사쿠데타 세력은 비판을 넘어 역사 속에 적절한 위치에 다시 매장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소위 뉴라이트라는 역사 똘아이들이 ‘논리적’이랍시고 주장하는 바가 있다. 일제가 한국의 근대 국가 인프라를 세우고 시스템의 초석을 닦았기 때문에 과 뿐만 아니라 공도 봐야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공과를 다 봐야한다는 익숙한 가락이다.  친일파 족속이 한국 엘리트 계층으로 굳어져 버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약점을 공격으로 전환하는 모습이 정말 고통스럽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을 옹호하는 것조차도 윤리적 쟁점이 많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목적이 절대적으로 비윤리적이라도 그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부수적 효과’로서 뭔가에 기여한 바 있다면, 그리고 그 뭔가가 딱히 윤리적인 가치가 없는 단순 물질적 가치라 하더라도 그 가치를 소중히 여겨 종합적인 판단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언어도단말고 무엇이겠는가. 중학교 때 도덕 교과서만 뒤져봐도 기가 막힌 수준의 언설이 아닐 수 없다. 일제시대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식민화하여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수단으로 활용한 역사다. 더 효과적인 수탈을 위해서 철도를 깔고, 다 총칼로 겁주기 어렵기 때문에 법률을 만들고 부역자를 동원한 것이다. 그런 인프라와 공권력으로 위안부를 실어 나르고 전쟁물자를 댔다. 절대 반복되면 안되고, 우리에게 일어 났던 일이 인류 역사 속에서 다시 누군가에게 반복되는 것도 용납하면 안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박정희 일당의 군사 쿠데타 이후 군벌 통치 기간도 마찬가지다. 시민적 자유를 누림이 마땅해진 시대에 시대에 역행하는 인권 탄압을 수십년간 자행한 집단의 치욕적인 역사다.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되고, 역시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탄압을 하면 안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일제가(군벌들이) 그 과정에서 근대 국가 기반을 쌓고(북한과 경제 성장 대결에서 승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 성장(혹은 그 시절의 정경유착이 현재의 삼성제국을 만들어 대한민국을 먹여살리는 데)에 많은 실체적 기여를 했다고 해도, 일제가 자행한 식민통치(군벌이 자행한 독재철권통치)의 부당함은 한 톨도 희석될 수 없다. 어디서 딜을 치려고 약을 파시는지 정말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박정희가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구국의 영웅이라는 조작된 망상은 불행한 한국 정치사에서 태어난 비극적인 만델라 효과다. 만델라 효과를 희화화한 Meme이 오히려 이것을 바로잡는데 쓰이고 있다는 것은 정말 흥미롭다. <웃으면서 독재에 저항하는 법>에서 발견한 것이 촛불을 통해서 우리나라에서 현실로 일어나고 있다. 박정희 만델라 효과와 빨갱이 만델라 효과, 구국의 재벌 만델라 효과들은 유쾌한 촛불들이 쏟아내는 Meme으로 박살내는 것이 답이다 싶다.

위안부…

일본과 소위 불가역적 합의라고 부르는 위안부 합의가 이루어진지 1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7분의 피해자들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지금 보고 있는 책이 김숨 작가의 <한 명>이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가 1 사람 남은 상황을 소설로 상상하여 그린 책이다. 소설인지 다큐멘터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인 문장과 사건들마다 할머니들의 증언이 각주로 그것이 실재한 과거임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해 노벨상을 받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 대해 짧게 적은 글에서, 이 책을 지하철같이 사람들 많은데서 읽지 말라고 썼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명>은 그 책보다 더하다. 오늘 전철에서 읽으면서 한 페이지도 채 읽지 못했다. 얼굴이 그렇게 구겨져 있는지, 눈물이 차올라 있는지도 몰랐다. 주루룩 흐른 눈물 때문에 깜짝 놀라 코를 들이마시고 전자책을 가방에 던지듯 집어넣었다.

‘위안부 문제’라는 이름 자체도 여러 층위의 역겨움이 중첩된 거부감을 불러 일으킨다. 생존한 할머니들의 존엄성 때문에 겨우 받아들인다. 정확히는 ‘일본군 전쟁 성노예 만행’이어야 한다. 20만명이란다. 생존자는 2만명으로 추산.

엊그제인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진주만을 찾아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한바탕 쇼를 벌였다고 한다. 중국은 그래도 할 말은 한다. 진주만에 가지 말고 난징과 서울로 가라고 한다. 한국의 공식 반응은 뭐였는지 잘 모르겠다. 미국의 개나 다름없는 외교부 인사들이 감히 오바마 상왕전하가 행하는 일에 누가 될 한마디나 뱉을 수 없을 터이다. 어서 사드나 깔고 볼 일일 테다.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 거대한 악을 대면하면 온통 비관으로만 가로막힌 세계를 내 안으로 가져온다. 나와 내 주변의 작은 것들로 허리를 굽혀 만지작 거리며 우는 아기 달래듯이 딴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또 다시 다른 아침이 나를 속이며 세계를 돌려줄 것이다.

채식주의자

8936433598_2읽은책 업데이트:

<채식주의자>, 한강, 2007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의 수상으로 국내 문학계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든 작품이다. 물론 갖은 성추행, 성폭력으로 금방 민낯을 드러내긴 했지만서도. Publicity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한 번 세계 무대에 알려진 이후, 각종 영어권 매체로부터 올해의 책이라는 찬사를 수집하고 있다. 영미권에서 올해의 책으로 11 곳에서 선정되어 세계에서 5번째로 많이 선정된 책이라니 굉장한 성과가 분명하다. 워낙 유명해져서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하기 딱 좋았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세 편의 단편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단편은 자체로도 하나의 훌륭한 소품이지만 연속으로 한 권의 중편을 구성할 수 있는 연계를 지닌다. 이러한 구성의 최대 장점은 중-장편 소설이 가지는 문턱을 날려버린다는 것이다. 단편 소설은 첫 문장부터 독자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소설이 가지는 세계관 내에서 발생하는 서사보다는 상황에 대한 캐리커져 안에서 인물과 사건이 만들어내는 한 장면을 중심으로 문학적 효과를 내는데 집중한다. 그러다보니 중-장편 소설에서 세계관에 입문하기 위해 요구되는 노력이 상대적으로 적다. 유명한데다가 쉽게 빠져들 수 있으니 더더욱 대중성을 가지게 된다.

처음 접한 것은 아마 <몽고반점>이 2005년 이상 문학상을 받았을 때였던 것 같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몽고반점>을 먼저 보고, 그 이후에 <채식주의자>를 어디선가 봤던 것 같다.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는 연작이라는 것은 최근에 맨부커상을 수상하면서 알게되었다.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번역자의 기여도 있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자체가 영어 번역물에 주어지는 상이고, 작가와 번역자에게 같이 상을 수여한다. 번역자는 29살의 데보라 스미스라고 한다. 언뜻 미국 작가 중에 동명이인을 봤던 기억이 있는데 같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시에서 출발한 한강의 단편들은 그 문장이나 표현하는 심상에 시의 흔적이 많다. 그만큼 한국어 사용자가 아닌 계층에 미묘한 감상을 번역으로 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에 살아본 적도 없고 대학원 이전에는 한국에 대해 접할 기회도 거의 없었던 젊은 영국인이 이런 성과를 냈다니 정말 놀랍다. 흔히 있는 국뽕 중에 하나가 한국어의 번역 어려움을 들면서, 고은 시인이 노벨상 받기가 어렵다는 핑계가 있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지는 언어의 통역 불가능성은 한국어에만 유별나게 작동하지 않는다. 한국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는 일본어로 얼마나 많은 책들이 훌륭하게 번역되었고,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일본 작가들이 얼마나 훌륭한 번역을 통해 해외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를 보면 그런 국뽕은 집어치워야 한다. 데보라 스미스같은 훌륭한 한국문학 팬이자 번역자도 없고, 더 근본적으로는 훌륭한 문학 자체가 희박하거나, 그런 것이 탄생할 토양이 척박하다는 사실을 숨기는 자위나 다름없다. 이 책을 통해 한국어 사용자가 보기에도 현란한 한강의 문장들을 어떻게 옮겼는지 호기심이 든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던데, 스틸컷들은 꽤나 소설의 장면을 온전하게 옮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편에 대한 영화 해석은 흥미로운 경우가 많아서 어떤 영화일지 궁금하기는 한다.

우좌지간 멋진 소설이다.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서사를 이끌어 가고, 등장인물들의 매력이나 명백한 상징성도 읽기에 재미를 더한다. 다만 다른 두 편에 비해 <나무 불꽃>은 연작의 서사를 지나치게 의식한 결론내기가 뾰족하게 느껴져서 마지막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정도가 아쉽다. 해외에서 큰 상을 받았지만 의례 짐작할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 때문에 가려진 단점들도 꽤 있을 것이다. <올드보이>, 김기덕의 영화들이 해외에서 강한 이유와 같이 다층적인 폭력에 대한 묘사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여성을 식물로 연결시키면서 (전형성에서 조금은 벗어나지만) 또 다른 미적 기준으로 일관한다는 점도 어떤 시각에는 한계로 비칠 것이다. 한 평론 대담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창으로서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소설임에 분명하고, 이의 한계를 극복하는 도전들이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추가) 파스칼 키냐르의 <신비한 결속>과 전개 방식, 인물 특히 주인공의 설정과 변화, 이야기의 귀결에서 아주 비슷하다. 여성 주인공이 말라가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 젠더 고정관념을 매번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파스칼 키냐르의 그녀도 마찬가지 아닌가. ㅎㅎ 한강의 작가론에서 판단할 일이다

한국의 실험

엘리트들은 대중이 기본적으로 우매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올바른 의견조차 내기 힘든 수준으로 가정한다. 그렇게 가정할 수 밖에 없는 사례들이 수두룩하기도 하고, 엘리트들이 몸으로 겪는 현실 속에서 그 가정을 강화하는 일들은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다. 포퓰리즘은 좌로 가건 우로 가건 모두에게 고통을 준다. 트럼프의 미국, 필리핀의 두테르테, 그리고 이제 곧 유럽을 지배할 극우 포퓰리즘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편에는 브라질의 룰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있다.

그런데 새로운 실험을 한국이 시도하고 있다. 우리 대중이 보여주는 힘은 포퓰리즘으로 유발된 것이 아니다. 수준이 비교할 수 없이 높고, 방향성이 드물게도 원칙과 정의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솔직히 이렇게 재기발랄한 컨텐츠가 쏟아져 나올 줄 상상도 못했다. 포퓰리즘이라고 명명할 수 없는, 21세기에 새로운 어떤 것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 되면 국뽕 허락해줘야 할지도…

아래는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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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기 “한국의 실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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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2005. 원작은 1992년. 덴마크 작가의 추리소설로 추정되는 장르불명의 장편 소설

책 한권으로 담기 약간은 버거운 장편소설이다. 요즘 책처럼 넉넉히 종이를 낭비하는 법 없이 여백도 좁혀서 빽빽하게 페이지를 채웠음에도 600쪽이 넘는다. 비스듬히 앉거나 누워서 읽기으려면 팔꿈치를 어딘가 지탱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읽을 때도 양 손을 다 써야한다. 그럼에도 쉽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중고등학교 때 정말 밤을 새는 줄 모르고 읽어댔던 무협지가 생각날 정도로 몰입하며 읽었다. 600여쪽을 훨씬 넘쳐나는 것들이 책 속에 있다. 잘 짜여진 추리소설의 얼개 속에 박진감 넘치는 사건들. 움베르토 에코를 연상할 정도의 박학다식은 생물학, 의학, 특히 얼음과 눈과 항해에 대한 도통 들어보지도 못한 지식. 경계에 끌려온 주인공을 통해 만들어내는 사회, 관계, 사랑에 대한 긴장감. 가이아 이론의 관점에서 인류와 지구 사이가 불화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통찰. 무엇보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한없이 매력적이며 복합적인 스밀라까지.

김연수의 장황한 추천사 때문에 산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이 책까지 읽고 나면, 더 이상 당신이 죽기 전에 읽어야만 하는 추리소설이란 없다.

영미, 남미, 서유럽 고전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도 있고, 폴란드, 러시아를 거쳐 스칸디나비아까지. 세상에 읽을 책은 많은데 인생은 너무 짧고 분주하게만 느껴진다. 동남 아시아나 인도 같은 번역의 특혜를 입지 못한 지역의 걸작들까지 생각하면, 한국어 사용자로 태어난 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 안타깝기도 하다. 우좌지간 읽으면 후회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해서 좀 찾아봤는데. 영 꽝이다. 소설을 재현해내는 영화는 없다. 모든 이의 개인적인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수천만 개의 상상력을 어떻게 단일한 상업 영화로 이길 수 있겠는가. 원작을 보지 않은 영화, 혹은 원작을 비틀어버린 새로운 영화만이 시청의 대상이다. 박찬욱의 <아가씨>처럼. 우좌지간 영화는 캐스팅부터 반쯤 말아먹고 들어간다. 줄리아 오몬드라니. 게다가 거대한 수선공은 뭐가 잘못되어서 저리 쪼그라들었는지. ㅎㅎ

갑자기 든 생각

청문회 토막영상들을 보다가 갑자기 울컥한다.

진짜 이 일에 관련된 문제아들은 단 한 년놈의 예외도 없이 질문에 무조건 아니라고 거짓말한다. 아주 그냥 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 단 한 년놈도 일말의 양심의 가책으로 이 일들을 올바로 바로잡는데 기여하겠다는 경우가 전혀 없다.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로 옭아매기 직전까지 일관되고 강력하게 부인한다. 증거가 나오면 그것만 착각했다, 기억이 이제 났다 하면서 나머지 부분은 여전히 아니라고 거짓말한다.

보통 사람이 저렇게 거짓말을 많이 했으면 벌써 속병이 났을거다. 국가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하시는 년놈들은 다 저렇게 거짓말에 능통한 소시오패스들인걸까.

아오… ㅅㅂ 열불이 난다.

박근혜, 수구, 사회, 우리의 실패

Confirmation bias

트위터가 의견의 분열을 오히려 강화하는 매체라는 분석을 본 적이 있다.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는 인식에 보탬이 되는 재료만 취하는 경향을 confirmation bias라고 하고,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가 이런 현상을 심화시킨다는 이야기다. 소셜 미디어들이 그런 편견을 전례없이 강하고 빠르게 심화시킬지 모르겠지만, 사실 조중동 vs. 한경대로 요약할 수 있는 매체 당파성도 근본적으로 편견 강화의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나 수백개의 채널 중에 자기가 원하는 채널으로만 원하는 정보를 수신할 수 있는 티비 매체까지 더하면 이제 웹이나 전통 미디어나 별로 차이가 없다. 결국 트위터하는 미국의 리버럴이나 주구장창 종편만 돌려보는 한국의 노친네나 매한가지다.

 

내용 없는 행정 수반의 처참한 실패

여기 박근혜라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 온 나라를 뒤집어 삶고 있다.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듯이 애초에 정신병원에서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비전을 제시하고 도뎍률의 표본이 되며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내용이 없다. 대부분의 재벌2세들이 그렇듯 보고 배운 것은 아랫것들을 휘두르는 몇 가지 잔인한 수법들 뿐이다. 그러나 내용의 부실이 현실에서 문제를 만들어 낸 것은 대통령이라는 지위 때문이다. 각 정권별로 정치적 어젠다는 생각보다 명료함을 자랑해 왔다. 이승만, 박정희가 그랬고, 심지어 전두환의 정의사회구현이나 노태우의 보통사람도 명쾌한 메시지가 있다. 이런 어젠다의 결을 타고 실제 내용들이 만들어진다. 김영삼의 문민화 과도기를 거쳐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도 경제적으로는 세계화를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대전환을 이루었다. 위기극복과 대통합, 절차적 민주화 진전 등의 긍정적인 가치들도 제법 큰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명박도 그렇다. 개새끼여도 돈 많이 버는 놈이면 뭔가 경제를 살리지 않을까 하는 어이없는 어젠다가 먹혀들었고, 이런 결을 타고 사대강, 자원외교같이 굵직한 사업들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해쳐먹는 디테일들이 완성되었다.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책임이 주어지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인기영합으로 혹은 출신성분으로만 획득하기도 하는 정치인의 지위와 다르다. 결국 무언가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 들이닥치자 내용의 부재가 낳은 부작용들로 인해 그 실체를 낯낯히 드러내고야 만다.

 

최고의 정치인, 박근혜의 승리

그렇다면 정치인으로서는 어땠는가. 박근혜는 거의 완벽하게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인이다. 자기 관점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시대에 내용의 비어있음이야말로 각종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로 꽉 채우기 위한 절대적 필요조건이다. 기호학에서 기표의 존재 조건은 그 자체의 비어 있음이다. 비어 있음으로 인해서 기의를 담는 기능이 가능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목표하고자 하는 의미만을 부정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기의만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가질 때 가장 효과적인 기표가 된다. 인류학에서 흔히 말하는 선물은 어떤가. 가장 순수한 선물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선의를 담기 위해서 기능으로 본질을 흐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를 방어하는 많은 언변들에 ‘순수함’이 계속 등장하는 것은 결코 비겁한 변명이 아니다.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단어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내용과 자격과 의미가 비어있는 박근혜는 신출귀몰한 맥락으로 예수와 같이 작용한다. 사회에서 밀려난 취약한 노인들은 박정희 시절의 향수와 보상을 본다. 재벌들은 십년간 소원했던 전방위적 정경유착의 근원을 본다. 영남패권세력은 통제 가능한, 그러나 매우 강력한 정치 소재를 본다. 십년간 어느 정도 억눌려 있던 온갖 후진적 수구적 당파적 폐해들이 각자의 기회를 본다. 그리고 진심 반 의도 반 섞어서 열광하고 열광케 한다. 그렇게 그를 정치인에서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각자의 비전을 실천하고자 도모한다. 완벽한 정치인의 완벽한 승리다.

 

승리의 이유, 패착의 이유

노무현이 만들었다고 자신했던 시스템은 이미 이명박을 통해 붕괴되었다. 그렇게 쉽게 붕괴될 것이었으니, 애초에 가졌던 자신감이 과한 것이었을테다. 최소한의 시스템도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내용도 없는 정신병자가 대통령을 꿰찼으니 어마어마한 공백이 자체적으로 흡입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 이제 구태들, 그를 옹립했던 패권세력이 일을 도모할 순서다. 그런데 거기서 계획이 살짝 틀어지기 시작한다. 온통 비어있고 순수하기만할 것 같았던 박근혜에게 인간으로서 과거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순수한 국익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그 아비도 제대로 실천한 적이 없을 것인데, 갑자기 정신적으로 망가진 삼남매의 장녀가 실행할 수 있을리 없다. 패권자들의 자신감, 의지와 달리 한 번 올라탄 지위에서 그는 장막을 치고 혼자 밥을 먹고 티비에 몰입하며 하면 안되는 것들을 하기 시작한다. 내용이 없는 그였는데, 그 내용이 필요한 일들에 손을 대려 하니 당연히 문제들이 생긴다. 비어 있는 상징은 내용에 대한 비판이 제대로 적중하는 순간 효용을 다한다. 한 기표에 여러가지 기의가 충돌하는 순간 기표는 언어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답답하지만 공격을 막고 공격이 나올 진원을 차단하고 김기춘의 메모처럼 전력으로 발본색원할 수 밖에 없다. 이명박이 파괴해버린 시스템의 잔해를 넘어 도저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들이 이제 그 빈틈을 매꾸기 시작한다. 최순실과 그 복잡한 가계, 전직 호빠 선수, 전직 체육인, 영혼을 팔아버린 교수와 공무원, 삐급 밴드 리더들이다. 애로비디오를 찍던 배우가 정치인을 하면 안된다는 법은 없다. 밴드 리더가 문화 융성을 위한 조직장을 하는 것도 좋다. 그래도 되는 이유는 시스템이 그 능력을 검증하고 권한을 위임하고 견제하고 감시하기 때문이다. 여기는 그렇지 못하다. 정신병자 주변의 망가진 사람들이 깨진 유리창을 넘어 마구잡이로 독가스처럼 새어들어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 민주화와 함께 가장 눈부신 성장을 기록한 아시아의 용, 동북아 외교에 가장 중요한 고임돌같은 나라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 패권세력이 아차 싶지만 수구들이 거기까지 이길 수 있었던 조건들로 인해 막을 방법이 없다. 그렇게 사태는 모두의 통제를 넘어선다.

 

실패의 크기

박근혜는 아주 상징적인 실패다. 친일부터 이어져온 소위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기실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 사회의 1%가 구체적으로 어떤 얼굴인지, 높으신 분들이 가진 컨텐츠가 무엇인지를 포르노처럼 까발린 실패다. 영남패권들이 대선에 손발묶인채 당하는 것을 벗어나고자 서둘러 고름을 짜서 터뜨렸지만, 이미 외과적 수술 없이 적폐를 낫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온갖 정치공학적 시도들이 실패한다. 단순히 부조리를 갑작스레 깨달은 시민들이 눈을 떠 쳐다보는 것만으로 과거의 승리 방정식이 새로운 힘의 장으로 던져져 작동하지 않는다. 아무리 손학규가 노동자 코스프레를 해도, 아무리 안철수가 공자왈 하며 영남 사투리를 구사해도, 아무리 항상 통하던 모른다, 기억이 안난다로 일관해도, 아무리 네거티브로 어젠다를 바꿔보려고 해도 도대체가 먹히지를 않는다. 먹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주서기 어려운 시민의 힘에 직면한다. 심지어 진보 연 하던 야권조차 살얼음 판을 걷는 장님이나 다를 바 없다. NYT는 이런 상황을 간명하게 정의한다. 구조적 부패의 파국. 시민사회,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들이 뿌리내리지 못한 사회가 21세기에 어떤 형벌을 받는지로 간단하게 결론이 난다. 명쾌한 진단만큼, 그 실패의 크기는 phenominal하다.

 

그래서?

교과서를 바꾸려는 패권자들의 의도를 역이용할 필요가 있다. 교과서에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까. 왜 트럼프에 반대하는 멕시코 이민자 가장은 미국 헌법 요약서를 들고 힐러리 유세에 나섰을까. 도대체 민주주의라는게 뭘까. 우리는 어떻게 한국이라는 사회를 만들어 왔나. 다른 나라는 어떤가. 무엇이 사회를 사회답게 하는가. 선진국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합의를 기반으로 어떤 체제를 운영하고 있는가. 영어, 중국어, 수학, 경영학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이미 교과서에 있다. (혹은 없고, 없어지고 있다.) 객관식 답안지를 채우기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같은 상황에 다시 돌아가볼 지점으로서 알게모르게 거기 있어왔다. 인류의 사회 전환을 이끄는 혁명을 한 적도 없다. 독립을 쟁취하며 새로운 사회의 기반을 합의해 보지도 못했다. 급속히 수입된 서구 체제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며 근대를 개척한 적도 없다. 기회주의자와 원칙없는 엘리트들이 근대 백년간 진 적이 없는 나라다. 게다가 매카시즘이 법률적 지위를 공고하게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이번 크나큰 실패는 21세기 극우 포퓰리즘이 확대되는 시점에 우리가 가진 수십년 이내 유일무이한 기회다. 상식적인 질문을 하고 상식이 무엇인지 다시금 합의하고 살고 싶은 사회를 실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386이 만든 87년 이후 일보후퇴한 사회를 이보 진전시킬 절호의 기회.
이 관점을 가지고 각자 이야기해야 한다. 그냥 쳐다만 봐도 이 사회에 미치는 힘이 이렇게 크다. 이제 이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럼 얼마나 멋진 일들이 일어날지 두근두근하지 않는지.

한국은 서유럽의 오래된 미래고, 미국의 가까운 미래다. 이제 예정된 실패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진짜 서구의 미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도 진짜 미래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미래는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을 감옥에 보내고, 재산을 몰수하고, 온 국민의 조롱거리로 만든다고 해서 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전쟁에 승리한 이후 점령지 마을을 약탈하는 행태는 이미 수백년 전에 인류가 기대던 습관이다. 혹은 로마 이후 잃어버린 기억으로 반복하는 실수다. 박근혜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사회의 문제임을, 우리가 들지 못한 촛불이 근원적 문제임을 떠올리지 못하면 득점도 못한 채 서브게임은 다시 저들에게 갈 뿐이다.

신비한 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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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업데이트:

<신비한 결속>, 파스칼 키냐르, Les solidarites mystérieuses

예술적인 묘사, 섬세하고 아름다운 필치, 감정과 이야기를 엮어서 장면의 디테일로 풀어나가는 기교로 가득찬 문학을 보면 문학을 하는 사람이 타고나야하는 거대한 재능의 벽을 느낀다. 파스칼 키냐르의 글이 그렇다. 조금은 어긋나지만 동시대인으로서 내가 상상 가능한 어떤 페르소나도 이런 감수성과 세계관을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기 어렵다.

불어로 된 원본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치민다. 주인공의 이름, 가공의 소설 속 장소의 소리와 의미, 챠오, 아듀와 같은 인물들의 대사, 청명한 공명을 자아내는 고유명사들 등. 언어가 가진 문학적 힘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은 욕구를 불어를 공부해 본 두려움으로 겨우 억누른다.

너무 멋있다. 이 분의 책은 계속 사야겠다.

과잉정보

강력한 사건사고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바람에 묻혀버린 것들이 너무나 많다.

최대의 피해자는 뉴스타파 최승호 감독의 ‘자백’이다. 살살 좀 제대로 뜨나 했더니, 국정원 장난질 정도는 댈 것도 아닌 건들이 터져버렸다. 목줄 풀린 하이예나들한테 의제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뭐 어차피 물꼬 트는것만해도 대단한 것이지만, 아예 다른 곳에서 소방전이 터져버리니…

반면 삼성이 최대수혜자인가 싶더니만, 아직 어찌될지 잘 모르겠다. 어쨌건 잘 빠져나가리라 본다. 다들 난리법석 피우느라 수고가 많았다. 니들 덕분에 XX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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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연기를 들킬뻔한 위험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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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나오는 길의 이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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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수고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