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한가한 저녁, 하루종일 일하느라 진이 빠진 친구와 밥을 먹으러 나온다. 점심도 라면으로 때운지라, 밥다운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십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청국장집으로 향한다. 후덥지근한 저녁 기운을 헤치고 식당에 들어선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식당을 반쯤 채우고 있다. 등산 갔다가 내려온 부부, 사춘기 아이와 저녁을 먹으러 나온 가정, 혼자 한 끼 제대로 먹고 싶어서 온 중년 남자 등.
마치 집에서 밥을 먹을 때처럼 식당 한쪽 벽에 티비에서 오락 프로그램을 요란스럽게 내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숟가락을 뜨면서 눈은 티비 화면에서 떼지 않는다. 왁자지껄한 식사가 아니라, 조금은 따분한 가족들이 티비를 보면서 먹는 저녁 시간이다. 프로그램은 ‘런닝맨’이다. 괴상한 옷차림을 한 연예인들이 앞뒤에 이름표를 붙이고 사방을 뛰어다닌다. 마치 청각장애인에 대한 배려처럼 자막이 화면에 출몰하고, 혹시나 밥먹다가 놓친 장면이 있을까 한 장면을 되풀이해 보여준다. 어느 타이밍에 웃어야할지 옆구리를 찌르는 것처럼 미리 녹음된 웃음소리, 걱정소리, 놀라는 소리가 십여 초마다 들려온다. 국민예능이라는 ‘무한도전’에 강력한 대항마이자, 중화권에 고정 팬층을 보유했다는 그 프로그램이다.
.
.
.
.
.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류의 프로그램을 단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한 경험이 없다. 무한도전이 시작된 것이 2005년이라니까 벌써 만으로 십년이 훌쩍 넘어서 말 그대로 국민예능을 이끌고 있다고 한다. 무한도전에 대한 무한 도전처럼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때로는 모방을 하고, 때로는 선진 문물 (특히 일본)을 수입하면서 예능 왕좌를 놓고 시청률 사투를 벌이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가 되고,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온라인 상에서 2차, 3차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이런 소재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다는 건 사실 일종의 장애나 다름없다. 나 같은 40줄 접어든 남자 성인이야 큰 무리가 없겠지만, 유행에 민감한 10대나 20대라면 생활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왕따도 예상된다. 어쨌건 나는 리모콘 여행을 하는 와중에조차 한 번도 이런 프로그램의 재방송에 멈춘적이 없고, 반복적인 연예 기사나 대화 속 등장에도 호기심이 든 적도 없다. 왜 그럴까가 궁금하긴 했다.
몇년 전 즈음 갈대가 빼곡하게 들어찬 난지도 하늘공원에 놀러갔다. 피곤에 쩔어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라 오랜만에 탁 트인 풍경에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거기서 정말 내 눈에 이상하다 싶은 광경을 봤다. 그 당시 셀카봉이라 부르는 길게 뽑을 수 있는 봉에 스마트폰을 꼽고 셀카를 찍기 쉽게 만들어주는 아이템이 유행이었다. 팔길이의 길고 짧은과 상관없이 마치 누군가가 멋지게 찍어주는 것 처럼, 동시에 자신의 미적 관점에 들어맞는 각도를 유지하면서, 자기 사진을 얻을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였다. 셀카봉도 SNS를 하지 않는 꼰대인 나에게는 약간의 병적인 도구로 보였다. 그런데 거기서 목격한 장면은 단순히 셀카봉으로 뒤덮인 젊은 커플들만이 아니었다. 셀카봉으로 동영상을 찍으며 커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모습이 어떻게 잡히는지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최적의 각도를 찾고 유지하고 변화를 준다. 노골적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것은 잠시잠깐의 일이다. 멋진 풍광을 멋진 모습으로, 혹은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으면 둘러보는 모습을 카메라에 동영상으로 담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하는 나의 모습과 셀카봉 하나를 들고 안들고의 차이같지만, 그렇지 않다. 자신들의 모습을 리얼리티 쇼에 나오는 카메라가 잡고, 출연진으로 분한 자신들은 카메라가 마치 진짜 리얼인 상황을 찍고 있고, 거기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양 연기한다. 셀카의 각도는 셀카봉이 나오지 않아야 하고, 그들의 연기는 자연스러워야 하며, 최고의 미감을 표현하는 프레임을 유지해야 한다. 그 모습에서 진정한 주체는 스마트폰 자체일까? 아니면 그 장면이 전시되는 SNS라는 무대? 자신들의 모습을 SNS를 통해 바라보는 관음증적인 타인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바라보는 그들 자신일까? 어느 경우건 풍경을 바라보고 즐기는 전통적 개인이 없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떤 정신병적 상태가 표피를 뚫고 나오는 증상이 아닐까 하는 충격을 느꼈다. 증상으로서의 세계.
물론 이와 같은 주체의 분열적 층위가 셀카봉을 쥐지 않는 사람들에게 없는 건 아니다. 사회 생활 자체가 인간의 주체를 타인에 비춰볼 수 밖에 없게 하고, 자본주의 소비자로서 구성되는 개인은 빠져나올 수 없는 공통 기준 – 자신이 만든것이 아닌 -으로 자신을 규정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구조적으로 포획된 개인과 위 예시의 개인은 질적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아니, 자신은 없다. 어쩌면 내가 전 세대에 준 충격도 지금 내가 받는 충격과 다름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어쨌건 내게 리얼 예능을 표방하는 프로그램들은 그날의 충격을 되새기게 한다. 특히나 프로그램 포맷에서 ‘시청자’를 전제하는 무한도전과 달리, 그날 식당 손님들을 사로잡던 런닝맨은 갈대가 무성한 공원의 반복적 강화나 다름없다. 출연자들은 바로 거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연기한다. 자신의 캐릭터는 실제 자신 – 그런게 있다면 -과 상관없이 기획과 대본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걸 최대한 드러나고 팔릴만한 것이 되도록 연기한다. 카메라가 없는 동선, 따라오지 못하는 움직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이다. 실제 녹화하는 시간은 편집 후 방송되는 분량의 몇 배에 달한다고 한다. 출연진들은 결국 편집된 결과물까지 계산에 넣고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게 갈대공원보다 더 충격적인 부분은 ‘시청자’ 존재에 대한 외설적인 수준의 누설 때문이다. 셀카봉의 커플의 사례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SNS 이웃들과 달리, 방송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관음증적 대상들까지 극에 포함해서 완성에 다다른다. 풍경을 보지 않고 셀카 녹화에 집중하는 장면의 어색함과 같은 프로그램 촬영 시 부조화는 시청자라는 대상을 놓고 진행된 깔끔한 편집본에서 진정한 리얼리티를 완성한다. 시청자는 전지전능한 카메라의 눈에 이입하여 신적인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나 그 신적인 지위는 반복되는 강조 편집과, 나를 대신하는 군중의 효과음과, 유치원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큼지막한 자막으로 꼼꼼히 제한된다. 그렇게 억눌린 시청자의 에너지는 팬덤으로 빠져나가고, 구매력이 되고, 방송산업 자체의 원동력이 된다. 이게 과도한 해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 예능 시청자들은 출연자 개인과 예능 캐릭터를 구분하지 못한다. 예능에서 보여진 모습으로 찬사와 비난을 가로지르고, 각종 일화와 목격담, 소문을 돌려가면서 그 이미지를 다시 강화하거나 재구축한다. 유재석씨에게 아무런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그의 인간됨에 대한 간증과 예능 캐릭터의 관계 속에서 출몰하는 강력한 팬덤을 보면 가끔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 있는 건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티비 프로그램과 시청자들은 이와는 많이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일단 그 쪽 동네는 리얼리티면 그냥 리얼리티 쇼를 말한다. 연예인이 출연하여 겹겹으로 정체성을 생산해내는 구조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 바로 내 이웃일 수도 있는 군상들이 모여서 하나의 쇼를 만들어낸다. 물론 캐릭터 잡고, 어느 정도의 기획을 강요하고, 악마의 편집으로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래도 모두가 – 시청자건 출연자건 프로듀서건 – 이게 어떤 포맷이고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일관된 이해가 있다. 또한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이 가능한 인간 군상을 가지고 드라마를 뽑아낸다는 점에서 런닝맨 류의 예능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런 쇼들을 통해서 보통 사람이 소위 Celebrity로 다시 태어난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명인들은 개인과 캐릭터의 밀착 때문에 성공에 큰 제한을 가지거나, 역할 확대에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보통 사람들이 참여하는 리얼리티 쇼가 있기는 하다. 일부 퀴즈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인의 인생을 걸고 경쟁하는 오디션 프로그램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진정한 리얼이려면 인생 정도는 걸어줘야 하는 것이다. 서구권에서 리얼리티쇼가 아닌 경우, 일부 팬덤을 제외하고는, 더욱 개인과 캐릭터의 분리는 강력하게 현실을 나눈다. 그리고 시청자들도 그러한 상황을 몰입에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워킹데드라는 좀비물이나 반지의 제왕을 넘어서려고 하는 왕좌의 게임 같은 유명 티비 시리즈도 그렇다. 이 시리즈들은 에피소드 방영 이후에 일종의 쇼를 주제로 한 토크쇼나 메이킹 필름같은 부속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워킹데드는 에피소드에 대한 품평, 시청자 의견을 공유하고, 심지어 연기자가 직접 출연하여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본인의 감상을 털어놓는다. 왕좌의 게임도 마찬가지의 메이킹 필름을 방영한다. 아직 시즌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배우 – 캐릭터의 분리가 쇼의 감상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는 커녕, 시청자의 호기심을 더 채워주고 쇼의 내용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접근이 우리나라 티비 시리즈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내 기억에는 없다.
유럽은 근대인에 대한 발명의 기억이 있고, 미국은 미국식 개인의 역사가 곧 국가 공동체의 역사이다. 우리에게는 근대적 개인에 대한 어떤 합의도 롤 모델도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강한자에게 붙어서 자기 공동체 안의 약한자를 눌러먹는 것이 그나마 반복적으로 자리잡은 한국의 근대인 像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건 극복해야 될 구습이지 지향해야 할 롤모델은 아니지 않나. 어쩌면 그런 물리적 역사가 한 개인으로서 정체성이 이토록 손쉽게 문들어지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서구적 개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맥락이 중요한 동양의 개인 인식이 이런 결과를 낳는지도 모르겠다. 런닝맨 류의 쇼들은 모르긴 해도 우리가 일본에서 베껴다가 중국과 동남아에 퍼뜨리고 있는 것일 테고, 이는 동양이 상대적인 개인 개념을 공유한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어느 이유건 간에, 이런 개인이 어떻게 변해갈지 두려움이 든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은 더욱 개인의 정체성에 강한 의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일본의 오타쿠들이 일찍이 매혹되었던 세계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주제들, 그리고 그 오타쿠들이 미국의 기술자들과 연합해서 만드는 포케몬 고의 세상. 지금까지의 낙태 논쟁은 발끝에도 못미치는 생명 창조에 대한 논쟁. 인공지능으로 촉발되는 인간의 사회경제적 역할에 대한 도전. 혹은 문명에 대한 재정의. 어떤 것이 인간을 규정하고 인간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의 지연은 기술의 발전에 의해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실생활부터 폭격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게 될까. 이런 유치한 단상이 단순히 내 전 세대가 나의 세대에서 느낀 이질감과 두려움이었으면 좋겠다. 그래비티의 명 대사처럼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길 빈다. 언제나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