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적 현실

백민주화 “아버지가 천천히 죽는 모습 보고 있다”
미디어오늘 | 김유리 기자 | 입력 2016.07.2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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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장은 농민대회 과잉대응으로 농민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사퇴했다가 철도공사에 낙하해서 사장을 하고 국회의원 공천 받아서 내리 떨어지고 자유총연맹 대장하면서 종북 두더지 잡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또 다른 청장은 명박산성 창조주로 민주화 이후에 본격 정권 보위부대로 정체성을 재차 공고히한 공을 세우고 청와대 경호실장을 지냈다.

결론이 안타까운 한 청장은 쌍용차 강제진압을 경기도에서 성공시키시고, 청장이 된 이후에는 물대포를 도입하여 종북 세력을 나중에 죽음까지 몰아갈 수 있는 기반을 탄탄히 하신 분이다. 다만 이정도 빨았음에도 끝이 좋지 않은 것은 일베 본성을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다면 하는 화끈한 총장은 용산에서 여럿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끝까지 버티다가, 공항공사에 낙하산 거쳐서 기어이 경남에서 국회의원이 된 인간승리의 여정을 실천하셨다.

상황판단이 빠르고 단호하신 어떤 청장은 국정원 댓글부대 셀프감금 사건에서 선거 직전 중간 수사 발표로 그분의 응꼬를 빨아제끼고, 그 더러운 입김을 연료 삼아 친박으로 공천에 나섰다가 지저분하게 떨어졌다.

잘 구분은 되지 않지만 하여간 기수가 바뀌어 다시 청장이 된 누군가는 기어이 물대포 조준사격으로 농부 한 명을 식물인간을 만들고 명예로운 퇴임을 앞두고 있다. 끝까지 단 한번의 유감 표명도 없고, 제대로 된 조사도 없다. 상습 범법자 종북 빨갱이 전문 시위꾼 때려잡은 공로 정도로 생각하시는 듯 하다. 다만 퇴임 전까지 그 빨갱이가 죽지만 않고 식물인간 상태를 유지했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은 가지고 계실 것이다. 이런 공을 세웠으니 퇴임 이후 꿀보직 낙하산 + 공천 콤보를 은근 기대하고 계시는데, 거기에 재를 뿌리면 안되지 않겠는가.

국가에게 살해된 농민의 딸의 한마디가 가슴에 맺힌다. “이게 정상적인 국가라 할 수 있는가?”

기분 참 지랄맞다.

2016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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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오바마, 엘리자베스 워렌, 버니 샌더스가 차례로 등장한다. 각자의 넘쳐 흐르는 개인적인 매력과 주장하는 메시지의 날카로움이 어우러져 대형 엔터테인먼트 쇼가 부럽지 않은 들끓는 컨벤션 홀을 달군다. 미셸 오바마의 넘치는 여유, 순식간에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감정 이입, 엘리자베스 워렌의 날카로운 트럼프 까대기는 속이 다 시원하다. 그리고 버니 샌더스, 그는 등장부터 락스타나 다름없다. 따뜻한 위로 속에 존경심과 지지를 받는 모습은 임기를 마치게 될 버락 오바마나 누릴법한 환호성 같다. 3분이 넘게 그는 Thank you를 연발하고 서너 차례 연설을 시작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청중들은 카드를 흔들고,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른다. 괴성과 사랑한다는 외침, 버니를 외치는 연호가 컨벤션 홀을 문자 그대로 가득 채운다. 샌더스의 연설은 만만하지 않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테드 크루즈가 트럼프 지지발언을 안하고 내빼는 빅엿을 먹였다. 이번에 샌더스도 소극적인 지지 발언으로 컨벤션 홀 밖에서 “Bernie or Bust!”를 외치는 성난 지지자들에게 호응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Any objective observer will conclude that — based on her ideas and her leadership — Hillary Clinton must become the next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빡 하고 제대로 때려주셨다. 아마 열혈 샌더스 지지자들에게는 끝까지 마음에 아쉬움을 찍는 방점이었을 것이고, 힐러리 지지자, 더 넘어서 미국 민주당 지지자 전체에게 엄청난 힘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미셀 오바마의 잘 훈련된 연설, 엘리자베스 워런의 통쾌한 논박, 그리고 버니를 외치는 함성이 잦아들지 않던 노장 샌더스의 열혈 호소까지 너무나 잘 짜여진 한 편의 쇼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저건 쇼가 아닌가? 정치라는 것이, 21세기 온라인의 시대에, 저렇게 오래된 방식의 전당대회를 통해 쇼나 다름없는 이벤트를 벌인다는 것이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감동이 크면 클수록 위화감이 불쑥 고개를 든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 우리보다 미국인들이 훨씬 순진한 것 아닐까. 우리는 선거에서 집값을 올려서 버블을 지속시킬 줄 아는 사람이 더 가치 있다는 걸 안다. 현 사회의 불평등한 자산 구조를 유지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리해서 집을 사게 된 사람들에게 신분 상승의 꿈을 주는 사람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비전이나 도덕성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것도, 세상이 그런 것들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도 온몸으로 겪어서 이미 알고 있다. 저게 무슨 쇼하는 짓인가. 저기서 아메리카를 부르짖고, 우리의 아이들, 세계의 아이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외침이 무슨 소용인가. 현실을 이상과 혼돈하는 무리인데다가, 좌파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샌더스까지 섞여버린 저 무리는 빨갱이 때거지나 다를 바 없다. 뭐 그렇다고 공화당이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솔직히 이민자(종북)와 무슬림(북괴) 위협을 해댄다는 내용상 차이가 있을 뿐 쇼를 한다는 점에서 민주당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미국 시민들은 세상을 너무 모르고 감상적이다. 아마도 먹고 살기 편해서, 배가 불러서 저런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현대 민주주의는 이상적인 정치를 목표로 하여 많은 분야에서 오랫동안 고심과 노력으로 만들어낸 제도의 집합체이다. 여기에 자본주의라는 엔진이 대부분 개인의 삶을 채우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어저면 공동체라는 것은-현실에 눈 뜬 우리는 모두 알고 있듯이- 누가 되건 굴러가기 마련이다. 미국이라고 다를까. 우리나라보다 대통령의 권한이 크지 않은 제도적 차이와 연방제를 고려할 때, 트럼프가 된다고 해서 마음대로 무슬림을 금지하고, 이주민을 쫓아내고, FTA를 되물리면서 미국을 휘두를 수는 없다. 그러겠다고 저렇게 짖어대는 것도 아니다. 이런 현실을 전당대회에 모여서 환호하고 눈물짓고 발을 구르는 지지자들이 모를리도 없다. 한마디로 그들은 순진하지 않다. 오히려 세상이 진짜로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깊이 이해한다. 내가 남을 짓밟고 더 올라가는데 어떤 놈이 도움이 될지에만 몰두하면 결국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것을 안다. 순진함과는 거리가 멀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고, 그 전선 자체를 사회적 진보(어느 쪽에서 보건 더 앞으로 나아가는)로 밀어올리는 힘들에 있고, 대중의 정치참여가 그것의 유일한 동력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현실적이다. 참여가 실제로 세상을 어느 방향으로건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고, 그걸 겪었고, 그걸 믿는다. 쇼라는 것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 쇼들을 통해서 정치가들은 자신의 비전을 전달한다. 그들이 쇼에서 내뱉은 말들과 발자국들을 미디어와 교양 대중이 촘촘이 톺아본다. 그게 곧 정치인의 이력서가 된다. 그 명백한 쇼를 통해서,  비전과 사람됨을 증명하고 커리어로 보여줘야 하는 약속의 도장을 찍는다.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 공적인 이력서가 된다.

이런 생각이 들고 나니, 외려 순진한 것은 우리였음이 드러난다. 우리는 정치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대중이 아니라 수구적 엘리트가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 조작하는 현실을 진짜 현실이라 굳게 믿는다. 내 이웃의 아이가 죽고, 내가 직장을 잃고, 내 아이가 취업을 못하고, 내 아이의 친구가 자살할 때도 귀와 눈을 닫을 정도로 맹목적으로 순진하다. 유아적 찬양이나 혐오 말고는 공적인 목소리를 내본 경험도 없고, 그나마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순진한 사람들로 몰아세울 정도로 세상을 모른다. 비단 수구세력이나 수구에 홀린 계층만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진보에 의한 변화를 믿는 사람들은 바람이 갈대를 눕게 만들던 때에 저항했던 투쟁만 기억하고 있다. 세상이 외풍이 들이닥치는 벌판에서 함께 살 집을 지어야 될 때라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 결국 순진한 이상의 강요와 투쟁만 소리 높여 외친다. 강남 좌파라는 이상한 이름을 내심 자랑하는 집단은 또 어떤가. 미국의 고소득 리버럴에 자아동일시하는 이 괴이한 집단은 그 교양 수준, 경제 수준, 사회 참여 수준의 격차를 보지 못하고 소비 양식, 스노비즘만 흉내내고, 진보를 후식으로 즐긴다. 얼마나 순진하고 단순한 이해인가. 운동권과 강남좌파를 제외하면 남은 사람들은 또 어떤가. 정치와 행정의 커리어가 그 사람의 약속을 만들어가는지 따위는 아예 관심이 없다. 어차피 먹물에 들어간 선비는 꺼멀 뿐이라고 속단하고 아예 생각하기를 멈춘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나타난 정도령 같은 인물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거라고 기대한다. 그 인물을 수구보다 왼쪽에 있는, 더 합리적인 사람을 구해다가 앉히면 변화가 일어날거라 믿을 정도로 순진하다. 변화를 믿지 않더라도, 그러한 제스쳐가 자신들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순진하다. 차례로 구원의 손길이 온다. 느닷없이 미국에서 박사가 와서 정부를 꿰차고, 세상을 구원하러 군인이 나서는 시절에 피와 삶을 갈아넣어 겨우 민주주의를 가져왔지만 결국 순진한 우리는 많은 것을 되돌려 놓았다. 다시 경제를 살리겠다는 대기업 마름 사장 이명박을 부르고, 갑자기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독재자의 딸에게 나라를 바치고, 대항마로 중소기업인인 안철수까지 호출해댄다. 그런 유아기적 팬덤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이게 순진한 것 아니면 무엇인가.

뭐, 어쨌건 미셀 오바마의 연설과 샌더스의 연설은 정말 멋있었다. 흑인 가족이 오래전 노예가 지은 집에서 아침에 눈을 뜨게 된 것이 바로 아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보여주려는 모두의 노력이라고 말하며 감정에 북받치는 장면은 보기 드문 명연설이었다. 멈추지 않는 환호 속에서 숨이 차도록 99%를 외치는 샌더스. 그런 쇼라면 돈을 내고라도 보겠다.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에 이어서 필립 로스의 대표작이나 다름없는 <미국의 목가>를 읽었다. 이 소설로 그는 퓰리처 상을 탔다고 한다.

휴먼 스테인에서 등장하는 클린턴 스캔들이 나름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은 했지만, 미국의 목가를 읽고 나니 작가가 미국이라는 대상을 얼마나 정교하게 표현했는지를 다시 깨닫게 되었다. 스위드 시모어라는 등장 인물의 전 일생을 책에 담으며, 2차 세계대전부터 60~70년대 문화적 격변에 이르는 미국의 역사를 개인의 역사와 정교하게 뒤섞고 있는 것이다. 미국 역사에 대한 이해가 더 깊은 사람들은 아마 읽으면서 한눈에 알아보고 전율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인터뷰에서 필립 로스는 본인이 쓰는 것은 유대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미국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작건 크건 사람은 자기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일생을 쓴다. 자신이 그리는 비전을 이렇게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니 정말 멋있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필립 로스의 다음 책은 <에브리맨>으로 정했다.

리얼예능

일요일 한가한 저녁, 하루종일 일하느라 진이 빠진 친구와 밥을 먹으러 나온다. 점심도 라면으로 때운지라, 밥다운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십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청국장집으로 향한다. 후덥지근한 저녁 기운을 헤치고 식당에 들어선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식당을 반쯤 채우고 있다. 등산 갔다가 내려온 부부, 사춘기 아이와 저녁을 먹으러 나온 가정, 혼자 한 끼 제대로 먹고 싶어서 온 중년 남자 등.

마치 집에서 밥을 먹을 때처럼 식당 한쪽 벽에 티비에서 오락 프로그램을 요란스럽게 내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숟가락을 뜨면서 눈은 티비 화면에서 떼지 않는다. 왁자지껄한 식사가 아니라, 조금은 따분한 가족들이 티비를 보면서 먹는 저녁 시간이다. 프로그램은 ‘런닝맨’이다. 괴상한 옷차림을 한 연예인들이 앞뒤에 이름표를 붙이고 사방을 뛰어다닌다. 마치 청각장애인에 대한 배려처럼 자막이 화면에 출몰하고, 혹시나 밥먹다가 놓친 장면이 있을까 한 장면을 되풀이해 보여준다. 어느 타이밍에 웃어야할지 옆구리를 찌르는 것처럼 미리 녹음된 웃음소리, 걱정소리, 놀라는 소리가 십여 초마다 들려온다. 국민예능이라는 ‘무한도전’에 강력한 대항마이자, 중화권에 고정 팬층을 보유했다는 그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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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류의 프로그램을 단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한 경험이 없다. 무한도전이 시작된 것이 2005년이라니까 벌써 만으로 십년이 훌쩍 넘어서 말 그대로 국민예능을 이끌고 있다고 한다. 무한도전에 대한 무한 도전처럼 많은 예능 프로그램들이 때로는 모방을 하고, 때로는 선진 문물 (특히 일본)을 수입하면서 예능 왕좌를 놓고 시청률 사투를 벌이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가 되고,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온라인 상에서 2차, 3차 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이런 소재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다는 건 사실 일종의 장애나 다름없다. 나 같은 40줄 접어든 남자 성인이야 큰 무리가 없겠지만, 유행에 민감한 10대나 20대라면 생활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왕따도 예상된다. 어쨌건 나는 리모콘 여행을 하는 와중에조차 한 번도 이런 프로그램의 재방송에 멈춘적이 없고, 반복적인 연예 기사나 대화 속 등장에도 호기심이 든 적도 없다. 왜 그럴까가 궁금하긴 했다.

몇년 전 즈음 갈대가 빼곡하게 들어찬 난지도 하늘공원에 놀러갔다. 피곤에 쩔어서 직장생활을 하던 때라 오랜만에 탁 트인 풍경에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거기서 정말 내 눈에 이상하다 싶은 광경을 봤다. 그 당시 셀카봉이라 부르는 길게 뽑을 수 있는 봉에 스마트폰을 꼽고 셀카를 찍기 쉽게 만들어주는 아이템이 유행이었다. 팔길이의 길고 짧은과 상관없이 마치 누군가가 멋지게 찍어주는 것 처럼, 동시에 자신의 미적 관점에 들어맞는 각도를 유지하면서, 자기 사진을 얻을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였다. 셀카봉도 SNS를 하지 않는 꼰대인 나에게는 약간의 병적인 도구로 보였다. 그런데 거기서 목격한 장면은 단순히 셀카봉으로 뒤덮인 젊은 커플들만이 아니었다. 셀카봉으로 동영상을 찍으며 커플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모습이 어떻게 잡히는지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최적의 각도를 찾고 유지하고 변화를 준다. 노골적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것은 잠시잠깐의 일이다. 멋진 풍광을 멋진 모습으로, 혹은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으면 둘러보는 모습을 카메라에 동영상으로 담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하는 나의 모습과 셀카봉 하나를 들고 안들고의 차이같지만, 그렇지 않다. 자신들의 모습을 리얼리티 쇼에 나오는 카메라가 잡고, 출연진으로 분한 자신들은 카메라가 마치 진짜 리얼인 상황을 찍고 있고, 거기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양 연기한다. 셀카의 각도는 셀카봉이 나오지 않아야 하고, 그들의 연기는 자연스러워야 하며, 최고의 미감을 표현하는 프레임을 유지해야 한다. 그 모습에서 진정한 주체는 스마트폰 자체일까? 아니면 그 장면이 전시되는 SNS라는 무대? 자신들의 모습을 SNS를 통해 바라보는 관음증적인 타인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바라보는 그들 자신일까? 어느 경우건 풍경을 바라보고 즐기는 전통적 개인이 없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떤 정신병적 상태가 표피를 뚫고 나오는 증상이 아닐까 하는 충격을 느꼈다. 증상으로서의 세계.

물론 이와 같은 주체의 분열적 층위가 셀카봉을 쥐지 않는 사람들에게 없는 건 아니다. 사회 생활 자체가 인간의 주체를 타인에 비춰볼 수 밖에 없게 하고, 자본주의 소비자로서 구성되는 개인은 빠져나올 수 없는 공통 기준 – 자신이 만든것이 아닌 -으로 자신을 규정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구조적으로 포획된 개인과 위 예시의 개인은 질적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아니, 자신은 없다. 어쩌면 내가 전 세대에 준 충격도 지금 내가 받는 충격과 다름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어쨌건 내게 리얼 예능을 표방하는 프로그램들은 그날의 충격을 되새기게 한다. 특히나 프로그램 포맷에서 ‘시청자’를 전제하는 무한도전과 달리, 그날 식당 손님들을 사로잡던 런닝맨은 갈대가 무성한 공원의 반복적 강화나 다름없다. 출연자들은 바로 거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연기한다. 자신의 캐릭터는 실제 자신 – 그런게 있다면 -과 상관없이 기획과 대본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걸 최대한 드러나고 팔릴만한 것이 되도록 연기한다. 카메라가 없는 동선, 따라오지 못하는 움직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이다. 실제 녹화하는 시간은 편집 후 방송되는 분량의 몇 배에 달한다고 한다. 출연진들은 결국 편집된 결과물까지 계산에 넣고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게 갈대공원보다 더 충격적인 부분은 ‘시청자’ 존재에 대한 외설적인 수준의 누설 때문이다. 셀카봉의 커플의 사례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SNS 이웃들과 달리, 방송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관음증적 대상들까지 극에 포함해서 완성에 다다른다. 풍경을 보지 않고 셀카 녹화에 집중하는 장면의 어색함과 같은 프로그램 촬영 시 부조화는 시청자라는 대상을 놓고 진행된 깔끔한 편집본에서 진정한 리얼리티를 완성한다. 시청자는 전지전능한 카메라의 눈에 이입하여 신적인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나 그 신적인 지위는 반복되는 강조 편집과, 나를 대신하는 군중의 효과음과, 유치원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큼지막한 자막으로 꼼꼼히 제한된다. 그렇게 억눌린 시청자의 에너지는 팬덤으로 빠져나가고, 구매력이 되고, 방송산업 자체의 원동력이 된다. 이게 과도한 해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 예능 시청자들은 출연자 개인과 예능 캐릭터를 구분하지 못한다. 예능에서 보여진 모습으로 찬사와 비난을 가로지르고, 각종 일화와 목격담, 소문을 돌려가면서 그 이미지를 다시 강화하거나 재구축한다. 유재석씨에게 아무런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그의 인간됨에 대한 간증과 예능 캐릭터의 관계 속에서 출몰하는 강력한 팬덤을 보면 가끔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 있는 건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티비 프로그램과 시청자들은 이와는 많이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일단 그 쪽 동네는 리얼리티면 그냥 리얼리티 쇼를 말한다. 연예인이 출연하여 겹겹으로 정체성을 생산해내는 구조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 바로 내 이웃일 수도 있는 군상들이 모여서 하나의 쇼를 만들어낸다. 물론 캐릭터 잡고, 어느 정도의 기획을 강요하고, 악마의 편집으로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래도 모두가 – 시청자건 출연자건 프로듀서건 – 이게 어떤 포맷이고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일관된 이해가 있다. 또한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이 가능한 인간 군상을 가지고 드라마를 뽑아낸다는 점에서 런닝맨 류의 예능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런 쇼들을 통해서 보통 사람이 소위 Celebrity로 다시 태어난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명인들은 개인과 캐릭터의 밀착 때문에 성공에 큰 제한을 가지거나, 역할 확대에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보통 사람들이 참여하는 리얼리티 쇼가 있기는 하다. 일부 퀴즈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인의 인생을 걸고 경쟁하는 오디션 프로그램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진정한 리얼이려면 인생 정도는 걸어줘야 하는 것이다. 서구권에서 리얼리티쇼가 아닌 경우, 일부 팬덤을 제외하고는, 더욱 개인과 캐릭터의 분리는 강력하게 현실을 나눈다. 그리고 시청자들도 그러한 상황을 몰입에 장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는 워킹데드라는 좀비물이나 반지의 제왕을 넘어서려고 하는 왕좌의 게임 같은 유명 티비 시리즈도 그렇다. 이 시리즈들은 에피소드 방영 이후에 일종의 쇼를 주제로 한 토크쇼나 메이킹 필름같은 부속 프로그램을 방영한다. 워킹데드는 에피소드에 대한 품평, 시청자 의견을 공유하고, 심지어 연기자가 직접 출연하여 자신의 캐릭터에 대한 본인의 감상을 털어놓는다. 왕좌의 게임도 마찬가지의 메이킹 필름을 방영한다. 아직 시즌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배우 – 캐릭터의 분리가 쇼의 감상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기는 커녕, 시청자의 호기심을 더 채워주고 쇼의 내용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접근이 우리나라 티비 시리즈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내 기억에는 없다.

유럽은 근대인에 대한 발명의 기억이 있고, 미국은 미국식 개인의 역사가 곧 국가 공동체의 역사이다. 우리에게는 근대적 개인에 대한 어떤 합의도 롤 모델도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강한자에게 붙어서 자기 공동체 안의 약한자를 눌러먹는 것이 그나마 반복적으로 자리잡은 한국의 근대인 像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건 극복해야 될 구습이지 지향해야 할 롤모델은 아니지 않나. 어쩌면 그런 물리적 역사가 한 개인으로서 정체성이 이토록 손쉽게 문들어지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서구적 개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맥락이 중요한 동양의 개인 인식이 이런 결과를 낳는지도 모르겠다. 런닝맨 류의 쇼들은 모르긴 해도 우리가 일본에서 베껴다가 중국과 동남아에 퍼뜨리고 있는 것일 테고, 이는 동양이 상대적인 개인 개념을 공유한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어느 이유건 간에, 이런 개인이 어떻게 변해갈지 두려움이 든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은 더욱 개인의 정체성에 강한 의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일본의 오타쿠들이 일찍이 매혹되었던 세계와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주제들, 그리고 그 오타쿠들이 미국의 기술자들과 연합해서 만드는 포케몬 고의 세상. 지금까지의 낙태 논쟁은 발끝에도 못미치는 생명 창조에 대한 논쟁. 인공지능으로 촉발되는 인간의 사회경제적 역할에 대한 도전. 혹은 문명에 대한 재정의. 어떤 것이 인간을 규정하고 인간성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의 지연은 기술의 발전에 의해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실생활부터 폭격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게 될까. 이런 유치한 단상이 단순히 내 전 세대가 나의 세대에서 느낀 이질감과 두려움이었으면 좋겠다. 그래비티의 명 대사처럼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길 빈다. 언제나 그랬듯이.

수년만의 몰타참치

7월 15일에 방문한 몰타참치.

변함없는 그 모습과 약간의 업그레이드… 그리고 약간의 가격 인상 ㅎ

당연히 극강의 참치!

이제 용돈 생활자가 되면 못가게 될 그곳!

뉴스타파

뉴스타파가 이놈저놈 다 물다가 드디어 거기까지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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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자선단체 중심으로 최소 월 십만원 정도라도 기부하고자 했다. 실제로 십여년 간 그렇게 했다. 때로는 기부 단체를 바꿔가면서, 때로는 금액을 올렸다가 줄였다가 하면서. 연말정산에 기부금 항목이 세액 공제가 되었던 터라, 이리저리 계산해보면 연간 삼백만원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기부 패턴이 확 바뀐 것은 한 탐욕스러운 기업가가 정권을 탈환한 다음이었다. 기부에 기대는 복지는 사실 모든 책임을 나르시즘과 이윤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적 영역으로 넘긴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주의였으나, 기부 말고 복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는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마치 멍석 깔아놓으면 하던 짓도 안하는 것처럼 그런 곳에 돈 쓰기가 싫어졌다. 대신 철지난 복고나 다름없는 수구의 귀환에 따라 당연히 예상되는 언론의 위축에 관심이 갔다. 실제로 황우석 사건으로 피디수첩이 박살나기 시작하면서 흐름을 탄 언론 탄압은 엠비정권에 들어 사대강 운하 따위를 실행하기 시작하면서 본격화된다. KBS 정연주 사장을 비롯하여 언론, 예술, 문화를 위시한 각종 영역에서 대대적인 수구로 물갈이가 시작된 것이다. 옛날부터 오마이뉴스나 한겨레를 지원하던 차에, 언론에 대한 기부가 더욱 절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선단체에 보내던 연간 기부금은 덩치를 조금 더 키워서 전부 독립언론으로 보냈다. 뉴스타파, 프레시안의 조합원 참여와 월간 지원, 지금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국민TV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한때 잠시 개인정보를 마음대로 OB Call 마케팅에 써먹은 한겨레에 실망해서 회원 가입이고 뭐고 다 탈퇴했었는데, 그것도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이런저런 회원가입과 작은 지원들도 재개했다.

가장 눈부신 매체는 단연 뉴스타파다. 언론은 사회의 감시견(Watchdog)이라는 본분을 가장 치열하게 실행하고 있다. 안 물어뜯는 곳이 없다.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강한 자들에게 뉴스타파는 정말 단호한 태도와 냉철한 시선으로 뉴스를 발굴한다. 우리나라에 조세회피처 누출 데이터를 유일하게 받아오는 언론이고, 국정원, 기업가 대통령과 시대착오 여왕을 비롯하여 기업집단, 고위 공직자, 선거출마자, 국회의원 등 우리 사회의 권력들을 예외없이 후벼판다. 그 뿐만 아니라 한 번 물면 잘 놓지도 않는다. 감탄스럽다. 국정원 간첩 조작사건, 세월호, 사대강, 역외탈세 등 손쉽게 잊혀질 수 있는, 혹은 사건의 장본인들이 잊기를 바라마지 않는 어젠더를 대문에 걸어놓고, 계속 관련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실제로 뉴스타파가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런 의제들은 언론이 (의도적으로) 망각하는 시간 속에서 계속 훈훈한 마무리를 향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결국 약자는 지고 만다. 어쩌면 조선민족 특징인양 말하는 냄비근성도 언론이라는 물리적 동인이 만들어낸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어제 밤 12시 넘어 새벽 1시 가까이 간 시간, 자기 전에 습관처럼 켜 본 스마트폰 뉴스에서 뭔가 한참 인지 부조화를 유발하는 기사 제목을 봤다. 노무현이 인정했듯이, 사실 상 모든 권력은 기업에게 넘어간 현재,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삼성그룹의 총수를 빼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때로는 추앙의 대상이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이름’-볼드모트가 아니다-으로 행간에 등장하는 그 인물: 이건희다. 그 황제가 연예 찌라시도 아닌 뉴스타파발 기사에서 성매매 동영상이라는 핫한 제목으로 포털 뉴스에 등장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날도 있네. 한참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기사 제목 근처에서 망설이다가, 바로 뉴스타파 홈페이지로 가서 그 뉴스 꼭지를 봤다. 본의 아니게 새벽까지 잠을 못자고 Peeping Tom의 심정으로 이런저런 뉴스를 찾아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후원하는 미디어들만 겨우겨우 뉴스타파를 소스로 밝히고 Quote 형의 짤막한 기사를 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경향, 한겨레, 오마이뉴스 정도가 빠른 대응으로 Quote 기사를 냈고. 아침에 확인해보니, 프레시안을 포함해서 일부 매체들특히 메이저 아닌 클릭이 필요한 뉴스들이 관련 기사를 역시 단신 혹은 뉴스타파 Quote로 내고 있었다. 좀 전에 보니 KBS는 뉴스타파 인용 기사 올렸다가 급히 내리고, 역외탈세 때부터 유행한한 인터넷 매체인용 기사로 대체했다고 한다. 청와대 말고 또 KBS에 전화하는 곳이 많은 모양이다.

뉴스타파 보도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의 연속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때도 그랬지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감상이 먼저 드는 것은 왜일까? 청와대에서 언론에 보도지침 내리는 거나, 최근 국회의원 출마에 압력 넣는 것들, 어버이연합 사건까지 세상이 원래 그렇지하고 짐작만 하던 것들을 물리적인 증거와 함께 사회 문제로 불거져 나오는 것을 보면 항상 묘한 기분이 든다. 거의 대부분의 메이저 언론들이 길들여진지 오래지만, 아직도 피가 꿈틀거리는 언론인들이 다 죽지는 않았고, 또 반동처럼 독립매체들의 매서움도 커져가고 있는 것이 이런 현상에서 묘한 느낌을 더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싸한 개연성 수준이라고 느꼈던 픽션을 현실에서 두 눈으로 확인할 때 느끼는 당혹감같기도 하다.

어쨌건, 앞으로가 기대된다. 온라인에서 본인들이 진보인줄 알고 있던 사람들, 특히 자신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기본 양식은 가지고 있는, 그러나 점진적으로 옳은 방향을 추구한다는 나르시즘에 젖은 무리들의 반응이 기대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일베를 비롯한 그간의 좌/우 구분, 보수/진보 구분이 또 새로운 프론티어를 드러낼 것이 기대된다. 무엇보다 수년간 뉴스타파에 보탰던 작은 마음들이 점점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 뿌듯하고 또 기대된다. 온라인 해학이 만들어낼 짤방과 트윗 무더기들도 당장 보고 싶은 기대가 든다. 이 묘한 마음, 일면 통쾌하고, 일면 뿌듯하고, 일면 아연하며, 일면 공범의식이 들고, 일면 측은지심이 드는, 일면 모골이 송연하고, 일면 최근의 각계의 특권층이 보여주는 어그러진 민낯과 흉측한 나신에 대한 메스꺼움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모양을 만들어갈지도 내심 기대된다.

짤방은 지금까지 본 중에 최고를 꼽았다.

헬조선번역기전원책베플

휴먼 스테인

 

필립 로스는 마치 김용의 무협지같은 장편 소설을 써댄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가 어려울 정도로 흡인력 있는 글들. 번역가의 기술이나 이해가 훌륭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짧게 끊은 문장들이 속도감 있게 묘사나 이야기를 파고들 때면 숨을 죽이고 읽을 수 밖에 없다.

미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인물들의 인생이 그려내는 모습은 인물이 아니라 1998년까지 만들어진 미국의 단면이다. 비밀과 오점과 실수와 가식, 모함과 비열한 승리로 얼룩져 있지만 결국 그것이 미국이고 그것이 세상임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그 끝에는 아주 근원적인 미국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누군가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우리들은 분노하는가?

공직자 ‘막말 퍼레이드’ 국민은 분노한다.
한국일보|권경성 입력 16.07.11. 04:49 (수정 16.07.11. 09:46)

 

 

이번 정권 들어서, 아니 좀 더 길게 보면 수구가 다시 정권을 탈환한 이후 고위 공직자, 선출직 공무원, 각종 기관장들의 설화는 시사하는 면이 많다. 원래 말로 흥하고 말로 망하는 것이 비일비재한 곳이라 설화가 끊이지 않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최근 10년간의 설화는 반복되는 일관된 흐름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내용으로는 소위 극우, 한국 수구가 가지는 (부끄러운, 혹은 역겨운) 지향점들을 늘어 놓는다는 면에서 일관된다. 성추행이나 희롱은 여성혐오나 남성 중심의 시각을 대변하고, 일제에 대한 칭송 – 특히 학문적, 역사적 노력과 발맞추어-은 제법 그럴싸한 주장까지 이르렀고, 외국인에 대한 제국주의적 시각 혹은 그냥 처참한 수준의 외국인 혐오, 동성애 혐오, 장애에 대한 혐오가 판을 친다.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노오력 이데올로기는 헬조선에 와서 그야말로 그 전방위성과 강력함이 새로운 경지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특권층의 수구적 정당화를 위해서 천황폐하 반자이에서부터 99% 대중은 개돼지라는 인식까지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형식 면에서도 의미심장하다.  마치 질병에 대한 예방접종을 맞듯이, 한 번 찔러서 병균을 주입하고 기다리고, 다시 그걸 반복하는 행태를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성동격서에 감명을 받은 듯, 정치인, 경제인, 외교관, 행정부 관리, 공공기관, 기자나 언론사주, 학계, 예술계, 연예인들이 바톤을 던지듯이 각자의 독을 주입하느라 신문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이렇게 우리는 혐오와 극우의 독에 서서히 중독된다.

십년전 한 탐욕스러운 기업가가 대통령이 된 이후, 위와 결은 다르지만 역시 비슷한 현실을 재미있게 생각한 적이 있다. 리더가 사리사욕과 탐욕에 찌든 인간이다 보니, 군, 관 할 것 없이, 말단 행정직까지, 관변 단체나 공공 기관들까지 나서서 부패를 당연시하는 현실이 펼쳐졌던 것이다. 이와 함께 건설,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환경, 안전과 관련된 규제 빗장이 풀리고, 공공영역의 사영화가 더 침습적으로 진행되면서 수많은 이권 경쟁이 폭발했다.(사대강 비리는 우리 죽을 때까지 계속 파도 파도 또 나올 것이다. 예시 한개) 경제가 뭔지 보여주겠다는 행정부에서 터무니없는 한 기업의 사장이 벌인 뻘짓이 아닐 수 없다. 리더의 소양부터 정책의 방향성까지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룰을 부수고 탐욕을 채우는 무한 경쟁을 지시한 거나 다름 없지 않을까. 사기와 뇌물, 부패와 관련된 범죄가 전 정권부터 늘었는지 구체적인 숫자를 확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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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부패지수는 명백하게 MB효과를 증명한다.

반면에 이러한 현실을 똑같이 알려주는 다른 사례도 있다. 내 지인 중에 집안이 망해서 이십년 넘게 집안의 빚을 떠안고 고시원을 전전하고, 월급을 다른 사람 명의로 받으면서 버티는 분이 있다. 사실 워낙 잘 살던 집이라서 부동산 투기 붐에 따라 주택이나 아파트 뿐만 아니라, 멀리 보고 토지에 대한 투자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성남 쪽에 그런 땅이 현재 시가로 100억원 수준이라고 한다. 이게 개발 제한과 같은 비교적 간단한 허들만 넘으면 바로 현금화될 수 있는 자산이다. 큰 무리도 아니고, 이미 근처에 개발 사례가 많이 있기 때문에 담당 공무원에게 적당한 기름칠을 하면 될 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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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MB 효과

그런데 이게 2010년 이후 성남시장을 지키고 있는 이재명 때문에 절대로 안되는 상황이라 좌절하고 있다. 이권과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에 대해 강한 메시지를 보내고, 시장 본인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주변 관리를 철저히 하고, 관련된 정책 방향성도 일관되게 유지하니, 하위 말단 공무원까지 그 흔한 기름칠도 안통하는 곳이 되고 만 것이다. 지인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이지만, 기업인 출신의 대통령과 반대되는 곳에서 리더의 필요 덕목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결국 리더는 똑똑하거나, 많은 경험이 있거나, 능력을 증명하는 부분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인 살아온 길, 품성 이런 것들이 큰 조직에게 면면히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번 정권에서 반복되는 설화들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최근의 온라인 스타는 교육부를 개돼지 사육부로 둔갑시킨 고위공직자 나 모씨이다. 2급이나 되는 정책기획관이라고 하고, 전 정부에서 청와대 측근으로 시작해서 이번 정부에서도 승승장구 하고 계신 훌륭한 분이다.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이 분과 교육부, 더 나아가서는 현 정부에게 온라인 짱돌을 던지고 있다. 야당도 건수 잡은 듯 나서서 비난을 퍼붓는다. 유쾌하고 사이다같은 해학들이 온라인에 난무한다. 초반의 분노를 넘어선 흥겨움까지 느껴지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분노하고 있나? 우리는 망언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정말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나? 그들과 우리는 다른가? 우리는 그들을 그토록 비난할 위치에 있는것이 맞는가? 나는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나모씨는 기본적인 신분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세상의 기본 원리라고. 미국을 예로 들면서 인종을 신분으로 본 것은 그의 얕은 교양 수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인식이야 말로 외국인 혐오에 동조하는 99%의 대중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점이다. 동남아 사람들은 게으르고 사기를 잘 치며 성실하지 않다고 규정하는 것, 그게 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어차피 고급 인력이 될 수 없다고 보는 시각과 어느 부분이 다른가. 세상의 기본 원리가 경쟁에 의한 차별이라는 생각, 애초에 타고난 씨에 따라 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학원 투자가 결정되고 그에 따라 나타나는 학교 서열을 우리가 얼마나 열렬히 받아들이고 있는가와 다르지 않다. 내 계급 위를 부러워하고, 내 계급 밑을 멸시하기 위해 그렇게 촘촘히 계층을 나누는데 목매고 있는 99%의 대중들은 이미 뼛속까지 나모씨와 같은 부류다. 무슨무슨 ‘충’으로 특정 사회적 집단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언어가 일상화된 대중이 도대체 무엇에 발끈하는지 나는 알수가 없다. 공감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어서 세월호와 같이 충격적인 사건에도 반응하지 못하고 시위꾼과 배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대중이다. 우리는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희생자를 자기 자식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나모씨와 어느 부분이 다른가. 나는 결코 나모씨가 우리 일반 대중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백한 1%라고 보기도 어려운 나씨가 가진 생각이야말로 계층의 사다리를 노오오력으로 올라가는데 성공한 우리가 가지게 될 얼굴이다. 진짜 1%는 그런 망언을 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gated community에서 새어나오지도 않는다. 나모씨가 바로 우리의 성공적인 롤모델인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대중이 그렇게 분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말고는, 그저 우리의 모습일 뿐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나는 그렇다.

사천댁, 시추안하우스

호불호가 갈릴 것이 분명한 식당인데, 평일 저녁 예약 없이 가면 대기를 해야 할 정도로 붐빈다는 것이 놀랍다. 고수를 잔뜩 뿌린 저 치킨윙의 붉디 붉은 자태를 보라! 생각나는 맛이다. 가끔 가게 될 듯 하다.

 

 

 

물론 다음 날 화장실에서 화끈한 경험을 하는 것은 함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