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2017120115272340788-540x304
공안부장이 없는 사진을 겨우 골랐다.

임신한 아내와 공각기동대를 보다가 원작을 우롱하는 설정과 쿵쾅거리는 소리에 둘 다 중간에 나왔더랬다.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들어온 Arrival이라는 영화는 언제부터인지 헐리우드 외계인 공식 사운드가 되어버린 관현악기의 웅장한 웅~ 소리에 놀라면서 겨우겨우 끝까지 봤다. 둘 중에 어느 영화가 나중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최근 아내와 영화를 본 기억은 저 두가지가 전부다.

보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아내와 둘이 간도 크게 영화를 보러 갔다. 1987.

골수 경상도 대구 집안에 맞딸이면서 사회적 문제를 철저하게 등지고 살아온 아내를 보면서 놀라는 점은 경도된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무지와 공백이다. 중학교까지 배우는 한국사보다 근대, 현대 정치사는 더 먼 이야기다. 미국의 양당제에 대한 상식보다도 한국의 정당정치에 대한 지식이 없다. 아마도 반쯤은 의도적인 무관심일테지만 관점을 수립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준의 지식만 쌓여 있으면 쉽게 경도되고 말 것이다. 아마 이런 흐름이 쌓여서 반지성주의에 육박하는 이상한 극우가 형성됐을 거라는 생각에도 이른다. 어찌됐건, 이런 아내의 특징은 내가 섭취하는 소위 ‘진보적’ 대중문화 컨텐츠들이 그 자체로 재미를 지닌건지 아닌지를 판단해주는 기준점이 된다. 이제는 MBC 사장님이 되신 최승호 감독 겸 PD가 연출한 다큐를 봤을 때가 그렇다. 최승호가 누군지 뉴스타파가 뭔지 모른다. 이게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도 몰랐다. 영화가 다루는 간첩 조작에 대한 이야기, 국정원인지 안기부인지 하는 기관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다. 시사회에서 최승호 감독과 사진 찍을 기회가 생겨서 부탁을 했더니, 영화배우냐고 묻고 웃는다. 그런 그녀가 [자백]을 보고 흥미진진하고 볼만한 영화라고 했다. 아마 박근혜가 추락하는 희대의 사건이 아니었으면 같은 유형의 영화에서 보기 드문 히트를 쳤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입소문을 듣고 꽉꽉 들어찬 관객들의 스펙트럼을 보면서 벌써 이 영화는 재미있는 영화일 거라는 확신이 든다. 어리고 젋은 친구들이 연인끼리 와서 본다. 혼자서 보는 관객들도 꽤 있다. 아마 여러번 보는 사람들도 꽤 될 것 같다. 남자들끼리 와서 본다. 나같은 애매한 세대도 부부와 친구들이 삼삼오오 왔다. 당연히 실제 그 세대를 살아낸 사람들도 어떤 이는 부채감에, 어떤 이는 아련한 기억에 이끌려 엷은 흥분을 가지고 자리에 앉아 있다. 이건 영화가 재미 있다는 거다. 조금이라도 과도한 소위 ‘선동질’이 있으면 가루가 되도록 까였을 것이다. 영화 자체가 꼰대같이 교장질하면 티켓이 안팔려 이미 망했을 것이고. 정말 잘 찍은 극영화만이 그런 스펙트럼의 관객들을 한 자리에 꽉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내도 재미있게 볼 것이다.

박종철로 시작해서 이한열로 끝나는 그야말로 한국 민주세력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배우 열전을 동원해서 끝내주게 버무려 냈다. 아주 약간의 오바가 보이지만 배우들의 연기력과 기본적으로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의 경이로움이 흠을 매꾸고도 남는다. 문맥에서 등장하는 광주까지 포함하면 사실 상 한국 민주주의의 절반을 설명하는 영화나 다름없다. 치욕적인 현대사의 출발과 419, 전태일같은 굵직한 프리퀄만 덧대주면 그 자체로 한국 정치사의 전부다. 정말 한 번 봐야하는 영화다. 장준환 감독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항상 대중성보다는 감식안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대중의 공감보다는 천재의 외로움이 더 멋있게 보였다. 먹고 똥으로 만든 밥그릇이 쌓여가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어 간다. 이번에는 대중의 공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것인지 새롭게 깨달았다.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와 대중에 대한 멸시를 함께 품었을 그 때의 운동권 엘리트들의 한계는 오히려 이 영화로 해소되고 만다. 빨갱이로 맞아죽으며 던지던 짱돌과 화염병이 제작년 우리가 들던 촛불과 맞닿으며 공감의 양과 질을 극적으로 바꾸고 마는 것이다. 과거 세대는 610 항쟁의 광화문 사거리 사진을 보며 회상에 젖을 때, 새로운 세대는 30년 후 그 광장을 가득 매웠던 촛불의 흥분을 몸으로 느낀다. 세대를 이은 공감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서 공명하는 모습이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치유로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영화 안에서 연유하는 눈물이 작은 흐느낌이었다면, 공감의 공명이 만들어내는 눈물은 격한 통곡에 다다를 정도였다. 영화는 끝까지 센스있게도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불을 켜지 않도록 우리들을 배려해 주었다.

역시나 아내도 몰입하고 눈물지으며 공감에 연대했다. 이 영화가 천만 관객에게 공감의 공명을 끝까지 넓혀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말 사족이지만, 가공의 인물인 김태희보다 더 가공스럽게 잘못 그린 인물이 하정우가 연기한 검새다. 공안 부장이라고 딱 찍혀 나오는데 이 사람이 그 안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역할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 남영동 들락날락하면서 고문 끝나면 도장 받고 그러던 애들이 공안 검사들 아닌가? 그 때 하던 그 짓거리가 국정원에서 문서 조작해오면 그거로 기소해서 간첩 만드는 지금 그 검새 나리들이다. 최환인지 하는 사람이 잠시잠깐 객기를 부렸다면, 아마도 영화가 적확하게 묘사하듯이 경찰 새끼들이 대공이랍시고 대한민국 검찰을 우습게 보는 거에 욱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쪽 편에서 경찰이랑 짜고 어떻게든 묻어보려던 안상수 같은 잡것이 나중에 뭐 목숨을 걸고 진실을 파헤친 검새 히어로 코스프레 하는 것만 봐도 그 때 상황이 실제 어떠했을지 짐작이 된다.

김기춘이 중정 대공에 있다가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고, 영화 속의 박처원처럼 실제 고문과 가족 위해 협박을 서슴치 않던 정형근이 안기부 파견 출신으로 공안통이다. 김진태, 황교안이 지독한 골수 공안들이고, 박근혜는 온통 내각과 청와대 인선을 공안검사로 쳐바르기도 했다. 영화 변호인의 부림사건 당시 공안검사는 고영주라고 문재인 공산주의자라고 백주 대낮에 떠들고 다니다가 이리저리 쫓겨나고 벌금 물고 그러는 그 분이다.

박근혜 아비 시대를 얼룩지게 만든 수많은 흠결들 중에 인혁당 사건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나마 진짜 공안 중에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줄줄이 옷을 벗어서 검새 손에서는 사법살인까지는 막았다. 2차 인혁당으로 다시 옭아매서 결국 선고 후 하루도 안지나 바로 다 죽여버리긴 했지만, 그건 또 군인들 특기니까.

사족이 길어졌지만. 공안부장 미화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따끔한 거 빼고는 정말 좋은 영화다.

 

 

싱글라이더, 천년여우

<공각기동대> 실패 이후에 영화관 가기가 더 신중해진다. 딱히 흥미를 끄는 영화가 없을 때는 차라리 어둠의 경로나 DVD를 구해서 보고 싶었던 걸 찾아 보기로 했다. 그래서 보게 된 영화 두 편.

<싱글라이더> 

11월말에 벌어지는 사건들인데 등장인물들이 겨울 옷을 제대로 챙겨입지 않고 있어서 시작부터 설정에 구멍이 많다고 느꼈다. 게다가 동양종금사태를 그린 장면들에서 별로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이 보여서 시작부터 더욱 불안했다. 일정 수준 경지에 다다른 이병헌이 끌고가는 분위기,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장면들이 그나마 눈길을 붙들어 맸다. 이후에도 설정의 구멍들이라 생각한 것들을 계속 발견한다. 도대체 짐도 싸지 않고 호주로 날아온 것이며, 손에 쓴 주소가 지워지지 않는 걸 보니 내내 씻지도 않고 저러고 다닌다는 건가… 싶은 의문들. 부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의사소통 대상이나 방식들. 음식을 시키지도 않고 내내 창가를 보고 앉아있거나, 자연스럽게 게스트하우스 침대에 누워버리는 배짱들. 워킹홀리데이를 2년이나 했는데 아는 사람, 도와줄 사람 한 명 없어서 우연히 발견한 아재에게 매달리는 여자 등등.

이병헌이 이번에는 드디어 물리적인 자살을 하겠군… 하고 중얼거렸더니, 같이 보던 아내가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남자가 유서나 다름없는 글을 게시하고 거기서 죽었고, 그 삶이 아닌 다른 삶으로 도피했지만 거기서도 그의 자리는 없다는 것이니, 이번에는 정말 물리적인 자살을 하지 않을까? 아니면 소희랑 뻔하게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살려나? 하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퍼뜩 깨달았다. 아!

하나의 반전에 모든 것을 기대기만 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잘 준비했고, 섬세하게 접근했고, 배우들이 제대로 받쳐준 결과물이다. 몇 가지 설정의 부자연스러움만 좀 더 부지런한 취재와 집요함으로 극복했으면 더더욱 끝내주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천년여우, Millenium Actress>

존경하고 감탄스럽고 부럽고 안타까운 콘 사토시의 애니메이션. <퍼펙트 블루>, <파프리카>, <도쿄 갓파더즈>에 이어 아끼고 남겨두었던 작품이다.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사람의 작품들은 전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모두 콘 사토시의 캐릭터들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슬프지만 어둡지 않고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고 어리석지만 결국에는 어떤 깨달음을 얻고야 마는 그런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어떤 작품도 이야기를 하나의 틀 안에서 하나의 줄기로 전달하는 법이 없다. 파프리카는 현실과 각자의 꿈을 뒤섞고, 퍼펙트블루에서는 망상, 꿈, 현실과 시점을 마구 오간다. 도쿄 갓파더즈는 인물들의 사건이 뒤엉키는 와중에 기적을 슬쩍 크리스마스에 밀어넣으며 경쾌하게 현실 – 비현실을 엮어 낸다. 천년여우는 이 중에 단연 가장 멋지게 이야기들을 겹치고 경계를 뭉개다가 멋들어지게 연결짓는다. 은퇴한 여배우와의 인터뷰, 인터뷰어와 여배우가 몰입해서 만들어내는 과거의 기억,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 그녀의 삶을 이끌어 온 사건, 사건과 얽힌 주관적 기억, 또 다른 주관적 기억과 겹침이 넘실거린다. 영화의 모든 부분이 콘 사토시의 천재적 비전과 기획에 따라 심어져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 그의 영화를 보는 하나의 방법인 것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지진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인트로에서 기획사 사장이 영화를 돌려보며 지진을 겪는다. 그런데 여배우와 인터뷰하러 갔을 때, 그 지진이 여배우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언질을 듣는다. 실제 인터뷰를 시작하고 그녀는 자신의 탄생이 관동대지진 직후라고 고백하며 시작한다. 그녀가 배우를 그만두게 된 시점은 클라이막스 신을 찍다가 지진으로 인한 사고를 당했던 직후이고, 그 장면은 기획사 사장이 아침에 보다가 지진을 맞은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인터뷰 날의 지진은 그녀가 태어난 지진과 같이 그녀의 마지막을 알리는 지진이다. 이런 아름다운 기획과 디테일들을 사랑한다.  삶에 대해 그가 발견한 것들을 그토록 경쾌하고 아름다운 인물과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공각기동대

White washing이라니… 싱크로율 보고도 그런 얘기 할 수 있을까.

솔직히 기대는 많이 안했다. 21세기의 블레이드 러너 정도 되어야 원작의 힘과 아우라에 폐끼치지 않는 정도일 것이다. 그래도 바라마지않는 스칼렛 누님 버전으로 쿠사나기 마코토를 본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게 기대를 품고 하남 스타필드에 놀러갔다가 크고 큰 화면을 찾아 영화를 보러 갔다. 그것도 둥둥거리는 소리나 잔인한 장면이 부담스럽다는 임신한 아내를 끌고서. 그리고 결국 중간에 나왔다. 아내가 아무래도 못보겠다고 먼저 나갔고. 나도 곧 뒤따라 나갔다. 이야기의 진전이 거의 없어서 상영시간이 많이 남았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시간은 꽤 흘러 있었다. 다행이다 싶었다. 그 남은 시간 더 봐봤자 나의 소중한 공각기동대 추억만 흐려졌을 것이다.

일본은 역대 최대 흥행 영화 10편 중에 7편인가가 애니메이션인 나라다. 그저 애니메이션을 좋아할 뿐이 아닌거다. 그 많은 관객을 모을 정도로 흥미롭고 상품성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저 블록버스터 영화나 좀 찍어본 미국 코쟁이가 떡 주무르듯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내공이 부족한 사람들의 산출물이 늘 그렇듯이, 뭐 하나 놓치지 않으려 하고 그래서 남는 것은 다 쥐려고 손 뻗은 아이의 빈 손 뿐이다. 원작 만화책에 극장판 애니만 대여섯편이고 티비 시리즈도 두개인가 하고, 뭐 하나 빠지지 않는 매력적인 패럴랠 월드를 가지고 있는 프랜차이즈를 그렇게 한 손에 주무르려 하다니 무식한 양놈이 용감하다고 할 밖에 적합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공각기동대 월드를 급하게 정주행 한 사람이 주워섬기듯이 여기저기서 따온 장면들, 애니를 그대로 컴퓨터 그래픽으로 옮겨놓은 장면들, 전혀 다른 맥락에서 여러 시리즈에 등장했던 캐릭터를 섞어 놓는 과감성들. 봐주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스칼렛 형님마저 최후의 볼거리도 거절하는 마당에 무조건 빨리 나오는게 답이었다.

예의를 갖춰 평가한 듀나의 영화감상 일부를 옮겨 놓는다.

새로 짜넣은 이야기는 할리우드 식으로 느끼합니다. 내용은 시로 마사무네와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들보다 [S.A.C.] 텔레비전 시리즈에 살짝 더 가까운데, 기억상실증을 앓는 주인공의 정체성 고민과 사악한 자본주의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손쉽고 감상적인 방식으로 풀고 있어요. 주인공이 수퍼히어로물 주인공인 것처럼 ‘최초의 유일한’ 존재임이 강조되는 것도 영 걸리고. 깊은 고민이 없는 각본입니다.

출처: 듀나의 영화 낙서판

ghost-in-the-shell-movie-image-scarlett-johansson-motoko-kusanagi.png
뜬금없이 Ex Machina가 자주 떠오른다. 오리지널리티가 이렇게 어렵다.

도쿄갓파더즈,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20071109113712076

연이어 뒤져보고 있는 콘 사토시 명작 시리즈. 그의 작품 중에 가장 대중적이고 발랄하다고 하는 <도쿄 갓파더즈>다. 한국에서 개봉할 때 제목은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대부분의 한국어판 외화 제목이 큰 웃음을 주는 것과 달리 이건 원작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어서 좋다. <동경대부>라는 한자 표현이나, <도쿄갓파더즈>보다는 우리에게 훨씬 직관적이다.

콘 사토시의 세계관이 낙관을 도려내고도 쿨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발랄한 이야기에서도 그 특징은 여전하다. 오히려 대책없는 낙관이 없는 편이 강한 긍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 그런 긍정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세상에 드러난다. 구조는 변하지 않되 개인이 성장하는 이야기 틀에서 개인의 성장에 집중해서 큰 감동을 만들어 낸다. 구조에 대한 비판은 그 구조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통해 오히려 묵직하게 복부를 후려친다.

콘 사토시가 남기고 간 명작들이 몇 개 안남아서 슬프다. 다음에는 <천년여우>다.

컨택트, Arrival

화상에 임신에 오만가지 이유로 잘 움직이지 못하는 아내를 데리고 나와서 이 영화를 봤다. 시작 시간 십여분 전에 표를 사는 바람에 그닥 편치 않은 자리에서 봤다. 화면, 음악이나 효과음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의 연기가 흡입력 있는 덕분에 자리의 불편함은 상관없이 재미있게 봤다.

최근 본 영화들이 올해의 영화 Short list에 들어갈만 한 것들이어서 그랬을지. 보고 나서 아~ 재미있고, 전하는 메시지도 마음에 들고, 생각하게 할 것도 좀 있는 좋은 영화네.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라라랜드><너의 이름은>과 같이 정신못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영화가 어떤 말을 던졌냐고 아내에게 물어봤다. ‘따뜻한 천재’가 세상을 구한다고 한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하는 루이스가 천재라는 인상을 못받았다는 것에 놀랐다. 아마 지독한 여성 비하적 선입관 때문이 아니었을까. 딱 보니 과학 천재는 제레미 레너고 감성의 언어술사가 여자구만. 뭐 이런 식으로. 다시 돌이켜보니, 옆에서 치근덕대기나 하는 이언 보다는 루이스의 천재성이 더 돋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또 반성할 거리가 늘어난다. 난 루이스가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간성의 응축이라고 봤다. 발 7개 달린 외계인들이 3,000년 후에 ‘humanity’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하고, 루이스에게 지금 도움을 주겠다고 한다. 인류라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중의적으로 인간성을 뜻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루이스를 통해 극적으로 도달하는 진정한 집단 인류로서의 인간성; 따뜻함, 영민함, 사랑, 도전과 용기에 더하여 연대까지. 닭살 돋는 메시지들을 영화의 막판에 조밀하게 구겨 넣어놓은 바람에 멋적을 시간도 없이 감동의 몸통공격 한 방 먹고 끝나는 영화다.

집에 돌아와서 뉴스를 보다가 한겨레에서 발견한 <컨택트> 영화평.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시니컬하고 말 많은 것이 딱 내 스타일인듯 싶다. 제목 번역에 대한 조소, 칼 세이건 옹의 <Contact>와의 구조적 유사성 지적질이며, 닭살돋는 진보적 가치에 대한 유쾌한 거부감까지. 감동의 몸통 공격 한 방에 제법 묵직함을 느꼈던 나로서는 허탈할 정도였다. 그래도 역시 그의 평론에 대부분 공감한다. 평타 정도 되는 취향 타는 영화라고 본다. 나는 물론 好 취향에 속한다. 그것도 많이. 한겨레 영화평론에서 가장 많이 동의하는 구절을 옮겨 놓는다.

결국 남는 것은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뿐이다. 따뜻함과 차가움, 정치와 정서, 부드러움과 강함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서서 미끄러지지 않는 그녀의 연기와 존재감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저지르고 수습 못하는 뻥축구적 트릭과 공허한 위아더월드적 외침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기화하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번 감별에 갈음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781274.html?_fr=mt3#csidxa9d22b11393c33d94344aad35277296

arrival4
큰 화면으로 볼 만 하다.
548210593f64e_-_mcx-amy-adams-0111-1-xl
자신감 있게 쪼개는 모습이 제일 예쁜 Amy Adams

라라랜드

한참 전에 본 영화인데 이제사 적어 놓는다.

뮤지컬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라라랜드>는 인트로에서 이건 뮤지컬이야! 라고 소리치고 시작한다. 화면 색감이며 빠르게 끊어가는 호흡이며 중간중간 어색하지 않게 등장하는 노래들이 흥미로웠다. 거기까지는 보통의 뮤지컬 영화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유없는 반항>의 유명한 천문대에 가서 둘이 교감을 나누는 장면부터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어 버린다. 두 주인공이 갑자기 날아오르는 순간 짧은 경탄과 함께 완전히 영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tumblr_ocdecvzrru1rzc0hlo1_500
바로 이거!!!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예술작품의 형식이 가지는 힘을 뭉개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이 아니고서야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실같음’에 기반해서 이야기의 힘을 증폭한다. 주인공에 대한 몰입보다는 이야기를 조망하는 시청자로서 그 안에 빠져드는 것이다. 영화 촬영과 관련된 기술은 거의 대부분 얼마나 박진감 넘치고 환상적인 현실을 만들어내느냐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이미지 자체를 표현 도구로 보는 예술영화들도 분명히 있지만.) 반면 뮤지컬은 기본적으로 희곡에 기반한 극이다. 물리적인 극장에 묶여 있는 장르다. 웅장함이나 신선한 장치로 이야기를 강화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현실을 지시하는 것들을 관객과 약속하고 늘어놓는데서 시작한다. 아무도 울렁이는 푸른 커튼을 바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아무도 판자로 만든 배 위에 연기자들이 실제 물리적인 항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그 장치들을 전제로 하여 바다를 상상하고 파도 속에 사투를 벌이는 선원을 상상하면서 그들의 이야기와 노래에 빠져든다. 소설은 어떤가? 영화가 결코 소설의 감동을 넘기 어려운 이유는 독자가 상상을 통해 개입하여 만들어내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의 현실을 재현한 영화가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실체가 없을 수록 더 관객의 상상력이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뮤지컬 영화라니! 배경이며 등장인물들의 분장이며 모든 것을 ‘사실’같이 꾸미고, 그들이 갑자기 말 대신 노래를 한다! 나는 이런 부조화 속에서 상상력을 동원할 구멍을 찾지 못하겠다. 이 관점에서 최악은 온갖 상을 휩쓸었던 2012년 <레미제라블>이다. 보통의 뮤지컬 영화들이 이야기의 굴곡과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노래를 끼워넣는 노력을 한 것에 비해, 이 영화는 문열어라 따위의 대사까지 노래로 친다. 마치 노래로밖에 의사소통을 못하는 상상 속의 외계인들이 18세기 프랑스를 흉내내는 연극을 만들었는데, 그걸 카메라로 찍어서 CG 처리를 한, 그런 의미없는 필름같이 느껴졌다. (뭔가 마음에 안들고 싫어하는 부분을 이야기할 때는 마치 봇물 터진 듯이 취향과 이유가 흘러나오는 성향은 고쳐야 된다고 생각한다. 라라랜드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 다른 영화들을 꼭 박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미 늦었지만.)

<라라랜드>는 그런 형식 상의 근본적인 한계를 하늘로 날아오르는 스탭을 통해 해결한다.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이 아니고, 뮤지컬 영화의 장르를 다시 쓰는 데 성공한다.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환상과 현실이 절묘하게 섞이는 실사 영화에서 정교하게 삽입된 넘버들로 이야기를 증폭하여 전달하는 것은 어쩌면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핵심일 것이다. 마지막 두 사람이 다시 마주쳤을 때 영화 전체를, 두 사람의 인생 전체를, 그 시간동안 앉아있던 관객의 감상 전체를 아우르는 넘버는 그런 새로운 장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준다. 뮤지컬 영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보여줄 수 없는 장면이면서, 뮤지컬 장르의 핵심을 확실히 즈려밟고 있지 않은가.

<스파이더맨>보다는 <버드맨>에서 진가를 확인한 엠마 스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내는 감동한 라이언 고슬링, 잘 짜여진 이야기 등 감독의 연출 외에도 모든 요소가 잘 어우러진 좋은 영화다. 꽤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봤던 영화인데, 너무너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라라랜드”보다는 “랄라랜드”가 더 발랄하지 않나? 원음에도 가깝고. ㅎㅎ

PAPRIKA

<Perfect Blue>에 이은 콘 사토시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기본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대책없는 낙관을 깔끔하게 도려낸 쿨한 세계를 멋지고 예쁘게 그린다. 그 속에서 발랄하고 극단적인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파국을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밀고나가면서 장르 영화의 빛도 발한다. 대체로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만, 그것은 결코 정반합에 따른 전진이 아니다. 그저 과잉에 대한 과잉의 맞대응으로 균형을 다시 회복한 것 뿐이다. 어떤 경우에 그 균형은 구조가 만들어낸 수많은 파국 중 하나만의 해결일 뿐이다. 문제를 만들어낸 것들은 변하지 않은 채로 그 세계 다른 어딘가에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성장한다. 개인의 작은 진전만이 그 커다란 파국을 겪은 대가다. 지금까지 본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특징들이다. 관점 자체가 내 취향에는 매력적이다.

영상을 보면 영화를 훨씬 뛰어넘는, 그 매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너의 이름은>의 경우 <라라랜드>처럼 사실적인 장면들에 기가막히게 상상력을 녹여 넣었다. 사실적인 장면들도 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각도, 화면 배치와 이동을 보여준다. 반면에 파프리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류로 보일만큼 찬란한 상상력을 화면 가득히 펼쳐놓는다. 거기에 이미지를 폭증시키는 음악까지 완벽하다. 강렬한 대상 이미지가 지배하는가 하면, 동선이 앞서 나서기도 하고, 음악이 흐름을 뒤덮다가, 결국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뒷통수를 친다. 영화의 백미나 다름없는 퍼레이드가 그렇다. 온갖 종교, 쾌락, 은밀하거나 은밀해서 왜곡된 욕망, 가지지 못한 것들이 정신없게 떠들썩한 산더미가 되어 퍼레이드 한다. 그 행렬을 만나면 인간은 주체할 수 없이 욕망 그자체로 변신하여 전체의 일부가 된다. 그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죽음만 건너면 바로 눈 앞의 천국이 나에게 오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괴상한 지옥의 현현이 된다. 은유도 아니고 직유도 아니고 세밀화가의 묘사나 다름 없는 장면이다. VR에 접속한 군집으로서 인류를, 아직 거기에 다다르지 않은 우리에게 설명하는 가장 현실적인 묘사로 봐야 하지 않을까. 매트릭스에 접속해서 재배되고 있는 인류를 묘사한다면 영화 매트릭스의 장면이 아니라 바로 이 파프리카의 행렬이어야 할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와는 결이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내 눈에는 격이 다른 천재로 보인다. 훨씬 강렬하고 폭발적이며 신랄하다. 멋지다.

이런 귀한 재능이 병마에 단명한 육체의 한계로 미처 만개하지 못한 것이 정말 안타깝다.

몇몇 인상적인 화면캡쳐들 모음

 

Perfect Blue

1997년작. 이렇게 시대를 앞서나가는 천재들이 있다. 부럽다. 가끔은 이런 천재를 가지기 위해서 영혼과 행복은 조금 팔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콘 감독은 영혼을 많이 팔아서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갔을지도 모른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8989351731_3읽은 책 업데이트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2005. 원작은 1992년. 덴마크 작가의 추리소설로 추정되는 장르불명의 장편 소설

책 한권으로 담기 약간은 버거운 장편소설이다. 요즘 책처럼 넉넉히 종이를 낭비하는 법 없이 여백도 좁혀서 빽빽하게 페이지를 채웠음에도 600쪽이 넘는다. 비스듬히 앉거나 누워서 읽기으려면 팔꿈치를 어딘가 지탱해야 한다. 지하철에서 읽을 때도 양 손을 다 써야한다. 그럼에도 쉽게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중고등학교 때 정말 밤을 새는 줄 모르고 읽어댔던 무협지가 생각날 정도로 몰입하며 읽었다. 600여쪽을 훨씬 넘쳐나는 것들이 책 속에 있다. 잘 짜여진 추리소설의 얼개 속에 박진감 넘치는 사건들. 움베르토 에코를 연상할 정도의 박학다식은 생물학, 의학, 특히 얼음과 눈과 항해에 대한 도통 들어보지도 못한 지식. 경계에 끌려온 주인공을 통해 만들어내는 사회, 관계, 사랑에 대한 긴장감. 가이아 이론의 관점에서 인류와 지구 사이가 불화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통찰. 무엇보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한없이 매력적이며 복합적인 스밀라까지.

김연수의 장황한 추천사 때문에 산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이 책까지 읽고 나면, 더 이상 당신이 죽기 전에 읽어야만 하는 추리소설이란 없다.

영미, 남미, 서유럽 고전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도 있고, 폴란드, 러시아를 거쳐 스칸디나비아까지. 세상에 읽을 책은 많은데 인생은 너무 짧고 분주하게만 느껴진다. 동남 아시아나 인도 같은 번역의 특혜를 입지 못한 지역의 걸작들까지 생각하면, 한국어 사용자로 태어난 것이 또 다른 의미에서 안타깝기도 하다. 우좌지간 읽으면 후회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해서 좀 찾아봤는데. 영 꽝이다. 소설을 재현해내는 영화는 없다. 모든 이의 개인적인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수천만 개의 상상력을 어떻게 단일한 상업 영화로 이길 수 있겠는가. 원작을 보지 않은 영화, 혹은 원작을 비틀어버린 새로운 영화만이 시청의 대상이다. 박찬욱의 <아가씨>처럼. 우좌지간 영화는 캐스팅부터 반쯤 말아먹고 들어간다. 줄리아 오몬드라니. 게다가 거대한 수선공은 뭐가 잘못되어서 저리 쪼그라들었는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