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시조, 노마

일본

푸코의 철학이나 양자 물리학, 혹은 테드 창 같은 SF 소설들을 읽다보면 소칼의 지적 사기에 스스로 뛰어든 꼴이 될 때가 있다. 세계라는 실체는 전혀 물리적이지 않고, 총체적 진실은 그저 공허한 지향일 뿐이며, 사실 조차 하나의 개념으로 뭉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눈 앞의 만져지는 현실과 만나 뭔가가 붕괴하는 지점이 있다. 거창하지만, 쉽게 말하면, 50억명에게 50억개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의 구성 요소는 모두 맥락적인 사실과 진실과 오해로 만들어져 있다는 거다. 색즉시공 공즉시색까지 가며 정신이 모호해진다.

KOvsJP

“일본”이라고 많은 사람이 쓰고 이야기하지만 어떤 일본도 절대적이거나 총체적이지 않다. 백제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도 있고, 세계를 삼키려 들던 일본도 있다. 장인 정신과 엔지니어링을 결합하여 또 다시 세계를 거꾸로 들던 일본도 있고 극도의 신경증적인 사회 문화 속에서 수많은 불행을 만드는 일본도 있다. 선진국, 대국으로서 성숙하고 교양있는 대중을 품은 나라지만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보면 미국만도 못한 무식쟁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심지어 영토의 경계조차 의견이 갈린다.

요즘 일본과 한국의 갈등 양상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보면 재미있다. 다양한 일본과 한국 중에 어떤 결과 결이 부딪히고 있는 것인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찰나의 진실이나 인상을 붙잡고 어디에 활용하고 있는지. 그래서 결국 물리적인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렇게 세심히 살펴보면 훨씬 더 흥미진진할 것이다.

박원순씨 아들의 병역 문제를 가지고 인생을 건 남자가 한 매체(?)를 통해 주장하는 말을 보자. 아무리 우습고 어지러워도 잘 살펴보자. 수많은 사실과 진실 중에 일부를 끄집어 내어 아전인수를 뻔뻔하게 시도하는 모습이 자못 흥미롭다. 짐짓 객관적 뉴스인 양 하는 기사 형식은 덤이다.

‘박원순 아들 병역비리 의혹’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무죄주장

이제 쓰레기나 다름 없는 한국의 정치인이 주장하고 조선일보가 보도한, 거기에 자민당 극우가 공명하여 만들어내고 있는 주장을 보자. 드레퓌스 사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 깡패국가 에피소드만큼 핫한 것은 없지 않나 싶다. 뭔가 비슷한 얼개가 보이지 않는가?

조원진·조선일보·후지TV·아베의 수출규제 ‘환상 공조’

이 모든 사단의 원인 사건을 박근혜 정권이 3권 분립을 뭉개면서까지 막으려 했었다는 사실은 가슴 한 편을 찡하게 한다. 드레퓌스 사건 만큼이나 역사적 맥락을 극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소재가 아닐까? 얼마나 이야기가 풍부해질 수 있는가? 근현대사까지 갈 수 있는 저력을 보여준다.

[사법농단 2년] ②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조직이익 맞바꾼 사법부

일본의 극우 라인업이 날 세워서 만들고 있는 현실은 박근혜, 조원진, 조선일보가 김앤장, 외교부, 국정원 등과 손발을 맞추며 만들어내던 현실과 맥을 같이한다. 그 때는 그렇게 부드럽게 이어지던 현실이 이제 어설픈 깡패국가를 동원해서 부숴야할만큼 거칠고 성글어졌다.

[칼럼] 日경제보복, ‘친일3인방’에 책임 물어야

그럼 이제는 무얼 어떻게? 청와대가 외교적으로 만들어내는 Frame과 적절히 들고 일어나는 시민사회 모습은 또 다른 한국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그래도 어느 경우에나 저 일본도 일부일 뿐이고 지금 이 한국도 지금 떠오른 한 국면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애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부딪혀오는 일본의 찌질함과 비열함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전체도 아니다. 지금 장렬하게 보이는 우리의 모습은 갑자기 등장한 정권 때문만은 아니다. 그게 한국이다. 그러나 지금 이 비열한 일본과 똥꼬를 맞춘 나라도 우리 한국이다.

어제의 한일보다 더 나은 한일로 이어붙이는 고급진 시도가 깨어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발하기를 기대해 본다.


스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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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인스타그램. 자알~ 찍었다. ^^

정말 몇년만에 조선호텔 스시조에 큰 돈 쓰러 갔다. 아내 생일이 다가오는 걸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요한 일들이 쏟아지는지라 짧은 시간에 강한 임팩트를 내는 파티가 필요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 참에 몇년동안 마음 속에만 고이 모셔두던 스시조로 내달리기로 했다. 이게 얼마만이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토요일 점심 카운터 자리를 예약했다. 다 찼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크다. 그런데 1부, 2부로 운영하는데 어느 시간대를 택하겠냐고 한다. 에? 주말이면 2부 3부 운영까지 한다는 그 호텔 부페 식당도 아니고, 스시조 카운터가 2부제? 손님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 1부에 남았다는 2석을 예약했다. 인당 20만원씩은 각오해야 하는, 그것도 요리사 바로 앞에 나란히 앉아서 먹는 카운터 석에 2부제를 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이 온다니, 세상 내 월급 빼고 다 오르는게 사실인가보다 했다.

당일 출발 직전에 예약 확인 전화가 왔다. 아침부터 딸애를 밥 먹이고 어머니께 넘기는 준비 시키느라 준비가 조금 늦었다. 11시 30분부터 1부가 시작하고 1시 20분까지 마쳐야 한다고 하길래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조금 늦는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무려 정시에 동시 시작을 해야 해서 늦을 거면 2부에 캔슬된 자리로 옮겨주겠다고 한다. 정시 시작? 카운터에서 나란히 8~10명이 앉아서 똑같은 순서로 초밥먹기 대회라도 벌이는 건가? 귀를 의심했다. 조금 늦어도 되지 않느냐고 물어봤지만 완강하다. 몇년만에 가는 게 죄인이라 그런지 요즘에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마음이 캄캄해진다. 기십만원 쓸 판인데 개운해야하는데 말이다.

술을 마셔야 하니 택시타고 총총거리고 출발한다. 늦지 않으려고 아내는 자기 생일상인데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나선다. 도착해서 20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기분좋은 두근거림으로 바뀐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는 특별한 곳에 가는 기분을 더욱 끌어올린다. 저런. 아직 카운터 준비가 안되었으니 잠시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다. 11시 30분 스시먹기대회가 현실로 성큼 다가온다. 옆을 보니 우리 같은 선수 커플들이 두런두런 하고 있다.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좋다.

짜잔! 아니 그런데! 돈생기면 가까운 스시효만 다니던 몇년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뀐 모양이다. 아직도 안효주씨가 스시를 놓지 않았고, 그 밑에서 형님형님 하시던 분이 서초점 카운터를 풀타임으로 하고 계신데, 스시조 카운터에는 젊디 젊다 못해 파르스름할만큼 활기찬 셰프들이 반겨준다. 스시먹기대회에 함께 참전한 전우 커플들을 슬쩍 스캔해 본 아내는 또 다른 소식을 알려준다. 우리가 가장 늙었다고 한다. 압도적으로. 꼰대 자격지심과 심한 이질감이 동시에 펄떡인다.

몇년 전에 방문하고 처음이라고 아는 척을 하려니, 담당한 셰프가 많이 바뀌었다고 단언한다. 큐베이 스시와 제휴를 어디 뭔가로 바꿨다고 하는데, 일본 내 스시야 순위에 관심 없는 나로서는 그 의미를 알 방법이 없다. 일단 밥부터 다르단다. 적초를 썼다고 한다. 에도마에 스시 운운 한다. 나중에 아내와 이야기해보니, 이 때에 이미 둘 다 속으로 마음이 덜컹 했었다.

요이~ 땅! 스시먹기대회가 시작됐다. 우리 부부 오른 쪽의 마지막 2개 자리 선수들은 아직 입장 안했으나, 애초에 완강하게 공지한대로 세 명의 셰프가 일정한 속도로 음식을 내기 시작한다. 첫 접시는 성게 껍데기에 담은 성게, 콩소메, 젤리 따위를 섞은 전채요리다. 요즘 성게 달고 맛있다. 거기에 콩소메에 젤리, 크림 종류까지 얹었으니 깊게 달고 맛있다. 뭐 좋다. 달고 맛있으면 좋지 않나. 전복과 게우 소스 당연히 훌륭하고.

스시를 시작한다. 손 닦는 물티슈를 가져다 놓고 선포한다. 아마 변화한 시스템에 대한 공지인 것 같다.

  1. 우리 스시는 절대 젓가락을 쓰지 마시고 손으로 드시고 휴지에 닦으시면 됩니다. 그게 시스템입니다. 원래 스시는 손으로 드시는 겁니다.
  2. 가장 최적의 소스나 향신료로 간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찍거나 추가하지 마시고 그대로 드시면 됩니다.
  3. 스시는 만든 직후 드시는 게 제일 좋습니다. 첫 스시는 제 손에서 직접 가져다가 드시면 됩니다. 바로 가져가세요.

난 원래 스시를 주로 손으로 먹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젓가락질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내 수준으로는 스시를 뒤집어 생선에 필요한 만큼 간장을 딱 맞게 적실 수가 없다. 서투르게 하다가 스시의 밥을 간장에 푹 찍으면 그야말로 아까운 한 피스를 날리고 만다. 밥이 부스러져 떨어지기라도 하면 주접스레 밥을 주워먹어야 한다. 제일 안좋은 것은 네타를 떨구고 망연자실할 때다. 아주 불쌍해 보이면 한 개 더 만들어 준다. 하지만 창피하기 이를 데 없다. 이미 간장을 바르거나 소스가 덮고 있는 스시는 미련없이 젓가락으로 잡는다. 뭘 찍어먹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흰살 생선을 잡고 닦은 휴지와 줄줄 흐르는 간장을 닦은 휴지는 처참하게 다르다. 손 닦는 수건을 매번 갈아주는 시스템은 아니었다, 참고로.

2번은 뭐 좋다. 요즘에는 점점 더 많이 그렇게들 내는 것 같다. 게다가 난 간장 매니아는 아니다. 비싼 요리는 원래 요리사의 비전을 손님에게 전달해야 하는 법인데, 맘대로 망치게 두면 되나. 내 비전을 망치지 마시오. 아주 동의한다.

3번은 솔직히 거북했다. 두툼한 남자 손에서 줄줄 간장이 흐르는 스시를 넘겨받아 바로 입에 넣기에 뭔가 거슬리는게 있다. 게다가 주로 무너질 것 같은 스시, 도마를 적실 것 같은 스시를 그렇게 준다. 무너질거면 쥐지를 말던지 김에 말던지 할 것이지… 아 물론, 꺄아! 하면서 즐겁게 받아서 인사까지 꾸벅 하고 먹자마자 환희의 표정을 짓는다. 카운터에서 요리사 거슬려서 좋을 게 정말 1도 없다. 그 정도 순리를 따를 나이는 먹었다는데 자부심이 든다.

나도 젊지만 나보다 더 싱그럽게 젊은 손님들은 핸드폰으로 사진 찍기를 거르지 않는다. 우리 셰프는 재료도 들고 나와 보여주고, 손에 쥔 모습을 찍으라, 내 얼굴은 초상권 없다, 여자분은 드시고 남자분이 찍으시라 사진 찍는 커플에게 기꺼이 요리와 서비스를 내준다. 아, 여기는 손으로 먹는 시스템이었다.

재료는 확실히 훌륭하다. 우니야 계절도 있겠지만 정말 신선한 향과 달콤함이 극진하다. 참돔은 앞으로 도미 회는 다른데서 먹기 힘들게 만들 정도로 훌륭하다. 흰살 생선이나 조개, 오징어들은 종종 가는 스시효에 비교해도 완전히 한 수준 위다. 기본적인 찜, 굽기 기술이야 역시 훌륭하다. 새로운 시도도 좋고 비주얼도 훌륭하다.

변화했다고 단언한 부분은 스시 자체다. 적초를 쓴 샤리는 우려했던대로 풍부한 초 맛보다는 단맛으로 달려갔다. 네타는 재료의 높은 수준을 무색케 할 정도로 조리로 밀어부친다. 조미로 범벅한 네타와 달콤한 적초 샤리는 큼직한 피스에서 나름 조화를 이룬다. 혹여 배불러서 밥 양을 조절하지 마시라. 네타 조미를 밥 양에 따라 조절해주지 않아서 밸런스가 깨지고 만다. 배불러도 주는대로 먹을 것. 스시효에서 게살에 새우에 성게를 얹어서 약간 달콤한 간장을 발라주는 게 있는데, 장난스런 웃음을 가득 품고 이런 것도 한 번 먹어봐! 달콤하지? 하는 유머로 활용한다. 여기는 그 정도는 애교였다. 누군가에게는 트렌디한 훌륭한 스시겠지만, 벌써 꼰대로 접어드는 젊은 40대 중반 입장에서 재료를 죽이는 과한 조리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대부분 달다. 내 경우는 코가 맹맹한 단맛을 아주 싫어하는데, 간장 조린 소스가 다른 단맛 내는 재료들과 엮여서 그런 맛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스시조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숯불에서 구운 부분을 아래로 놓고, 뭘 바르고 또 올리고 달콤한 간장과 소금, 다시 와사비로 마무리한 오도로! 훌륭한 요리 한 접시를 대접받은 기분이지만, 오도로는 어디갔나 싶었다. 무슨 김밥 마냥 속을 잔뜩 넣고 토치로 굽고 또다시 김으로 손잡이를 만든 고등어 누름초밥! 내 사랑해마지않는 시메사바 맛은 정녕 1도 느껴지지 않은 달콤 김밥이었다.

초희-고등어
이게 진짜 고등어 초밥 | 출처: 어떤 분 블로그

등푸른 생선과 조개류에 대한 접근은 재료의 본질 파괴나 다름 없이 보였다. 한 번 가고 가지 않는 회사 앞 양고기 집이 있다. 정말 양 냄새가 안난다. 워낙 어린 양을 쓰고 잘 마리네이드해서 먹기 좋게 구워준다. 왜 양을 먹는지 모르겠다. 육향이 들지도 않은 고기는 병아리 후라이드 말고 더 먹기 싫다. 이 곳의 고등어와 청어가 딱 그런 처지에 있다. 스시초희 시절의 박경재씨가 잘라준 고등어 초밥은 아직 꿈에 나온다. 너무 맛있다고 하나만 제발 더 달라고 하니까 종이에 싸놓은 한 줄을 새로 꺼내 내 한 피스를 중간에서 잘라주고 나머지를 치워버리던 모습도 생각난다. “고등어는 제가 국내에서 몇 번째에 든다고 자부합니다.” 라던 폼나던 한마디는 덤이다. 보존을 위한 초절임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 수준이었다. 고등어로 태어났으면 고등어로 죽게 해줘야하지 않겠나. 재료에 대한 예의다.

스시먹기대회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카운터의 오마카세는 호텔 결혼식 테이블 디너가 아니다. 손님 자리만 확인되면 전체 일정에 따라 수백 접시의 음식을 내오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거다. 원래 많이 씹고 늦게 먹는 편이고, 스시같은 끝내주는 음식을 술도 없이 먹을 수 없어서 종종 코스 중간에 주저앉기는 일쑤다. 다들 같은 피스를 똑같은 방식으로 서브되면 덥썩 먹으라는 방식대로 먹는 것은 좋다. 그런데 각자 속도가 있기 마련인데, 겨우 그 정도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결혼식장도 아니고 주방과 테이블의 거리가 먼 룸에서 진행하는 코스 요리도 아닌데 말이다. 코 앞에서 아직 멸치 안주에 사케를 홀짝이는 것을 보면서도 다음 코스로 간다. 게다가 다음 코스는 두툼한 손에서 바로 가져가야하는 스시다. 유후.  나오는 스시도 블로그와 한 톨도 다르지 않다. 내 옆자리 손님들과도 한 피스도 다르지 않다. 심지어 코멘트도 똑같다. 억대 히노끼 다이 위에서 오마카세 흉내내는 것 같다. 말이 좀 심했다.

다행히 우리 옆 테이블 선수 두 분이 십여분 이상 늦게 입장하는 바람에 그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내가 잠시 속도를 늦춰줄 것을 청하자, 기다렸다는듯이 늦은 팀의 스시를 빠른 속도로 낸다. 1주년이라는 젊은 커플은 놀라운 속도로 사진 찍고 먹고 속삭이고 셰프와 농을 친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코스의 끝에서 내가 추가로 청한 아지를 같이 얻어 먹었으니 그걸로 부담을 덜기로 했다. 물론 이미 계란까지 다 먹은 다음으로 보이긴 했지만.

아… 너무 투덜댔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돈생기면 매일 가야지 했던 곳 하나가 날아간 심정에 비할바는 아니다. 안타깝다.

물론 간만에 맛있게 잘 먹었다. 누가 젊고 트렌디한 셰프가 즐겁게 내놓는 달콤 풍미 가득한 스시 오마카세를 싫어하겠나? 줄이라도 서서 1부, 2부 들어가고 볼 일이다.


노마

214728707집 책장에는 장 지글러가 쓴 책이 두 권 있다. 하나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또 다른 하나는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1999년 초판에 2007년 한국 소개가 첫번째 책이고, 두번째는 2007년 초판에 한국에는 2018년에 들어왔다. 첫 책은 자기 자식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고 두번째는 손녀와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나란히 꽂혀 있는 책 두 권의 모습만으로도 그들의 10년과 우리의 10년을 조망할만 하다. 그러나 최근 책에서 손녀와 주고 받은 이야기 중 노마(NOMA)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개인화된 검색 서비스에서 NOMA를 찾아보면 어떨까. 내 경우에는 덴마크의 유명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인 노마가 가장 먼저 뜬다.

하지만 장 지글러의 손녀는 NOMA라고 했을 때 영양결핍과 위생 문제로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지글러는 그런 사진들을 부록으로 첨부했던 보고서가 읽히지 않은 슬픈 사실을 이야기한다. 어느 신중한 친구의 충고 이후로 그는 더 이상 NOMA에 걸린 소년 소녀들의 사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각각 노마의 위키 페이지와 충격적인 사진 대비는, 아래는 감춰두겠다. 당신은 노마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계속 읽기 “일본, 스시조, 노마”

계절, 독서, 인생, 식도락 그리고 가족

계절은 가을을 지난다.

그러나 여행은 없다.

 

책 읽을 시간은 점점 더 부족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한국어 출판된 책들을 사모았다. 대중적 장르 소설처럼 술술 쉽게 읽을 수 있어서 놀라고, 잘 짜여진 저패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이 손에 잡힐 듯한 통찰과 깊이, 떡밥과 수수께끼의 여백이 또 놀랍다.

책장에서 잠자던 책들이 눈에 살살 밟히다가 덥썩 덤빈다. 하나 하나 고를 때도 수많은 책 광고 속에서 내게 뛰어든 녀석들이다. 오래 방치해 두면 하나씩 나한테 튀어오르며 강짜를 부린다. 트루먼 카포티, 테드 창, 밀란 쿤데라, 그리고 물고기, 우주, 미술사에 대한 교양서들을 그렇게 읽는다. 문 앞의 야만인들도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고, 좌파 계열의 두꺼운 양장본들도 거실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론 하루키의 신작과 노벨상 수상자의 흥미진진한 소설들이 먼저 뛰어오긴 할테다.

 

생애 전환기, 직업 전환기

마흔을 넘어 시속 40킬로의 인생에 접어들었다. 나라에서 생애전환기라고 건강검진도 공짜로 해준다. 혹시 그 동안 눈이라도 멀었는데 운전하고 다니는 것 아니냐고 운전면허 적성검사도 도래한다. 결혼도 했고, 아기도 왔다.

새로운 사업도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열혈 기업가 정신도 부족한 터에 혼자 나서기는 어렵다. 마음 맞는 후배님과 함께 최신 트렌드에 올라타 달려나가는 인공지능 기술 기업과 연계한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팀장에서 이사로 갔다가 이제 파트너로 이직했다. 오랜만에 손끝이 아스라히 저리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오랜만에 찾아온 흥분과 스트레스, 업무량 폭증을 맞아 제법 얼얼하다.

어찌된 인생이 마흔 무렵부터 무섭게 변화하고 빠르게 움직이며 흥미진진하다. 좋다.

 

화려한 미혼의 식도락은 갔다.

그 대신 집밥이 왔다.

 

 

 

 

계속 읽기 “계절, 독서, 인생, 식도락 그리고 가족”

구의동 가정식 이태리 식당, 제이스토브

완전히 팬이 되었다. 설렁 설렁 걸어서 자꾸만 가고싶은 맛집이 되었다. 사장님 혼자서 작은 부엌에 복작복작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고 미심쩍다. 기다림 끝에 나온 음식을 보면 고급 레스토랑의 플레이팅은 아니다. 하지만 한 번 먹어보면! 정말 솜씨 좋은, 어쩌면 은퇴한 셰프쯤 되는 사람이 친한 친구들을 불러다가 식사를 대접할 때나 나올법한 그런 감동이 있다. 작은 음식점 치고 메뉴가 꽤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 메뉴판이 너무 얇아 보인다. 소문 안났으면 좋겠다. 사장님이 혼자 감당하되, 망하지 않을 정도만 사람들이 왔으면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든다.

먹고 마시고 놀고

나름 인생에서 큰 변화를 겪고 있는 와중에, 일상은 더더욱 즐겁고 소중하다.

예쁘다! 구리한강시민공원

유채꽃은 한 풀 꺾였지만 햇살과 맑은 하늘과 강렬한 꽃들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맛있다! 외식과 고기 집밥 -_-;;;

나가서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한다. 의사센세한테 눈물 쏙빠지게 혼나지 않으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

 

소소한 즐거움

아내와 걷기. 큰 차 기다리기. 사진 가지고 놀기 등등

원강, J.stove

원강

맨날 다니던 곳 말고 새로운 곳을 가보고 싶다는 육식부인에 부응하고자 가본 고깃집. 논현동 골목길에 있는 <원강>이라는 곳이다.  첫날은 갈빗살, 둘째날은 생등심을 시도. 말이 필요 없다. 허름한 가게에서 웬 1인분에 5만원이 훌쩍 넘는 고기를 파나 싶은데, 먹어보면 알 수 있다. 정말 좋은 고기를 잘 숙성시켜서 부위에 맞게 잘라내고 직원이 최적으로 구워준다. 갈빗살은 기름진 고소함이 함부로 씹어넘기지 못하게 하고, 두껍게 잘라낸 생등심은 기름기 없이 담백한 고기 씹는 즐거움을 보여준다. 게다가 반찬으로 나오는 파김치, 부추김치, 무채 김치, 고사리, 김과 간장, 묵은지 볶음 등은 남도 맛이 알싸하게 배어나오는 끝내주는 밥도둑들이다. 심지어 밥도 맛있다. 물론 찌게와 국물도 맛있다. 공짜로 주는 선짓국의 선지조차 돈내고 먹는 다른곳들보다 훨씬 맛있다.

무밥, 콩나물밥과 같은 특이한 메뉴, 아직 시도 안해본 다양한 고기부위, 게다가 자신있게 적어 놓은 나주곰탕까지 다른 메뉴를 먹어보고 싶게 만드는 좋은 식당을 만났다.

물론… 비싸서 힘들다. 돈 쪼들리면서 느끼는 건데…. 소고기 진짜 비싸다. ㅠㅠ

 

J.stove

구의동의 재발견. 지난주에 사전투표하려 동사무소를 걸어갔다가 오는 길에 마주친 식당. 큰길가도 아니고 골목 안쪽 코너에 눈에 잘 띄지도 않게 자리잡고 있다. 아내가 여기 나름 유명한 집이라고, 같이 한 번 오자고 했다. 토요일 점심에 설렁설렁 걸어서 가봤다. 완전 깜짝 놀랐다. 햄버거야 뭐 요즘 더 맛있는 홈메이드버거집들이 많기는 하지만 이 곳의 버거도 정직하고 괜찮다. 엔쵸비를 비벼넣은 올리브오일 파스타를 시켰는데, 이건 진짜 가격대비 이 정도 파스타를 먹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재료를 쓰는 양, 면 삶은 상태 모든게 정말 만족스럽다. 이탤리 원산지 식으로 한다고 짠맛을 강조하지도 않고, 한국 입맛에 맞추다고 마늘을 통으로 갈아넣지도 않은 담백한 파스다다. 버거도 그렇지만 집에서 솜씨 진짜 좋은 사람이 손님 초대해서 만들어주는 그런 느낌이다. 여기도 다른 메뉴들이 궁금하다. 더 가보고 싶은 식당이 두 군데나 생겼으니, 나름 생산적인 주말이다.

식당 몇 군데

최근 먹으러 다녔던 식당들 중에 몇 군데 메모.

<서북면옥>

집 근처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꽤 이름난 냉면집. 냉면 잘라달라는 사람들, 자리 배정받는거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 영업하냐고 전화하는 사람들에게 꼬장꼬장한 사장님이 계시다- 냉면 안잘라준다고 써붙여놓으시고, 자리도 격하게 배정하신다. 전화기를 들면서 하시는 말씀은 “오늘 영업합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은 어울리는 컨셉이다. 평양냉면의 세계에 대해서 뭔 무협지 소설 쓰듯이 말들이 많다. 심심하다는 둥 그래도 먹고 나면 생각이 난다는 둥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맛있어서 먹는거지 뭐. 이 집은 면발에도 간이 좀 되어 있고 지릿한 소고기향이 훅 올라오는 국물에 적당히 맛있는 김치랑 나온다. 밍밍하고는 거리가 멀다. 비빔을 먹으면 단 맛이 너무 많이 나서 면이 아까운 수준. 편육이나 만두를 같이 시키면 둘이서 흡족하게 먹고 나올 수 있어서 아내와 나 둘 다 아주 좋아한다. 최근에 티비에서 다시 몇 번 조명을 받으셨는지 사장님이 옷에 신경을 쓰시는 것 같다. 오래오래 잘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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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롯데월드인지 월드타워인지 백화점인지 이름도 헛갈리는 잠실에 애브뉴엘 식당가에 있는 인도 식당이다. 먹고 나서 찾아보니 그냥 한국 사람이 만든 가맹점인듯 싶다. 단맛이 확 올라오고 향신료는 저 밑바닥에서 살짝 동하는 수준의 한국식 카레를 낸다. 버터치킨을 시켰는데 뭔 토마토 소스에 설탕 친 게 나와서 깜놀. 탄두리 치킨도 작은 닭을 쓰고 고기를 연하게 하기 위한 이런저런 궁리를 한 모양이다. 야들야들하기는 한데 탄두리를 잘 쓴 큼지막한 치킨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메뉴도 이런저런 고민할 것 없이 딱딱 시킬 수 있게 배려한 것인지, 별로 고민할 게 없다. 커리 종류도 매우 제한적.

휴일에 잠실에 가면 거의 식당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 없다. 어지간한 식당에는 웨이팅이 기본 30분 이상이 걸린다. 별로 기다릴만한 곳도 아닌데 기다리기가 뭐해서 항상 애브뉴엘 식당가로 발길을 돌린 적이 꽤 된다. 여기도 그러다가 오게 되었는데…IMG_5477

똭 하고 총괄세프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다. (주방장 이름이 셰프 프로파일인줄 알았다.) 문자형 인간의 특성 상 글자들을 읽다보니… “인도 All iz well 호텔 10년 근무”!!!! <세 얼간이들>로 번역한 훌륭한 인도 영화에서 등장하는 바로 그 문구 아닌가. 알이즈웰. 한 때 내 비밀번호로 쓸 정도로 흥겨워한 문장이다. 델리에서 그래도 수개월 일도 한 터에 알이즈웰 호텔이 뭔지 금방 찾아봤다. hotel-all-iz-well어이가 없다. 델리 후진 뒷골목의 모텔에서 십년이나 근무한 요리사라니… 음식이 그 모양인 이유가 있었다. 한국 시장이 점점 더 녹록하지 않게 수준이 올라가고 있으니, 곧 이런 사짜들은 정리가 되리라 기대한다.

참고로 롯데가 이런 걸 참 못하는 것 같다. 애브뉴엘을 명품관으로 만들려면 거기에 위치한 음식점들도 신중하게 고르고 품질관리를 해야 한다. 맛은 있지만 그 옆의 크리스탈제이드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값을 다 받기에 구멍이 너무 많다. 맥주 잔이 작은 병 한 개도 다 안들어갈 것만 골라서 주는 건 정말 짜증난다.

 

<스코파 더 셰프>

어버이날 기념으로 나와 아내가 큰 맘 먹고 점심에 기십만원을 쏟아부은 식당. 맛도 있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요즘 제대로 유행하는건지 트러플 기름과 가루를 여기저기 치댄 것이 제법 비싼 분위기를 낸다. 어머니를 위한 자리였는데, 어머니가 너무 짜다고 하시고 잘 못드셔서 상심했다. ㅠㅠ

근데. 가격. 너무 비싸다. 스테이크나 샐러드 종류보다 파스타의 가격이 너무 높다. 사만얼마짜리 파스타라니… 파스타 뒤에 메인을 같이 먹지 않는 한국인들의 특성을 겨냥한 것이라고 해도 너무하다. 그리고 서버들의 숙련도가 별로다. 어버버버는 기본이고 설명도 잘 못한다. 가게에서 가장 어린 친구가 혼자 나와 우리 7명을 상대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최악은 조리복 입고 나와 담배피고 정문으로 들어가는 조리장과 졸개들이다. 12시 예약을 했고 거의 맞춰서 도착했다. 주차공간이 없는지라 발렛을 찾고 있는데 없다. 어머니와 아내가 먼저 올라가서 발렛을 부탁했다. 어디선가 연락을 받고 이제야 온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하얗고 하얀 천에 멋들어진 검은 띠들을 두르고 자기 이름(물론 영어로 된 짧은 아기같은)을 수놓은 조리복을 입은 사내들이 담배를 비벼끄며 정문으로 올라간다. 눈도 마주친다. 설마 했지만 들어가보니 그 사람들이 언제 봤냐는 듯이 인사를 한다. 게다가 오픈키친. 뭐라도 손으로 잡는거 아닌가 싶어서 불안한 시선을 주방으로 던진다. 옛날에 일식 부페가 한동안 유행한 적이 있다. 유명한 집 중에 하나가 일하던 사무실 2층에 있었다. 조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루루 나와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올라가는 걸 본 뒤로 그런 모습이 너무 거슬린다. 나도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안다. 피우고만 와도 옷에 냄새가 배고, 손에는 담배 쩐내가 어지간히 손을 씻어도 가시지 않는다. 손님이고 나발이고 기본적으로 자기 직업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들이 파인다이닝 흉내를 내는 것 자체가 가소롭다.

조카들이 신나게 뛰노는 바람에 교양없는 손님이 되어서 나도 챙피했다. ㅎㅎ 다행히 낮 손님은 우리밖에 없어서 한 숨 놓았다. 우좌지간 절대 비추다.

너무 후지게 대한 것 같아서 찾아보니 아무래도 점심에 가서 식사를 하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나보다. 맥주가 중심인 펍 같은 분위기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점심에 아무도 없었나보다. 소르티노 세프의 명성만 보고 잘 알아보지도 않은 우리 탓도 크다고 결론. 그래도 조리복담배일당은 나쁘다.

 

부산 여행

춘천에 이어서 연휴에는 1박으로 부산 여행을 선택.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 두 가지나 됐고 모두 별미로 즐거웠으니 이보다 더 좋기는 어렵다. 마무리로 선택한 역전의 이탈리안 코스까지 완벽!

그래도 먹는다.

그래도 나는 먹는다.

성수동 핑거팁스: 버거 훌륭한. 혼자 버거 두 알, 맥주 두 알 먹음. 골목길 찾기와 어리버리한 스탭 참기만 성공하면 됨

가락시장역 쌀모네 키친(발음 잘 모르겠음): 오만원 넘으면 찍어주는 도장 6개를 모아 플래터를 공짜로 먹다. 훈제연어가 최고.

롯데월드타워 애브뉴일인지에 있는 크리스탈제이드 뭔 급의 중식당: 맛있다. 디테일들은 마치 허우대는 좋지만 여기저기 허술한 중국 본토와 같다.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국물 숟가락, 메뉴가 덕지덕지 그려져 있는 식탁 위 종이, 작은 맥주 한 병이 다 안들어가는 애매한 크기의 맥주잔, 소룡포보다 헐래벌떡 먼저 나오는 동파육 등등. 그래도 중국 음식에 존경을 보낸다.

춘천 기차 여행

임신 두 번째 3개월에 접어든 아내는 안정을 찾고 적응하고 있다. 첫 3개월보다 에너지도 넘친다. 마지막 3개월이 되면 힘들어진다고 하니 지금이 기분전환하러 다닐 수 있는 유일한 시기라고 한다. 매일 의무감으로 씹어 삼키는 소고기에 지친 아내도 위로하고 바람도 쐴 겸 해서 일부러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갔다. 미세먼지로 우중충한 나날과 달리 맑고 쾌청한데다가 볕도 좋아서 소풍가는 기분이 두둥실 떠올랐다.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역시 임신한 몸으로 대중교통을 타고 놀러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은 머리가 뽀글한 아줌마 아니면 머리와 목이 두껍고 얼굴이 어두운 사내가 차지하고 앉아있다. 큰 맘 먹고 구청에서 받은 임산부 배지를 늘어뜨려보지만 흘긋 보고 갈등의 순간을 넘긴 사람들은 마음을 굳게 먹고 눈을 감는다. 혼자 다닐 때는 문제없던 길이 임신한 아내 손을 잡고는 험준한 모험이 된다. 계단이 그렇게 많고 잠시 잠깐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그렇게 없는지 몰랐다. 춘천역에 내려서 소양댐 언저리 음식점 거리를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십여분만에 먼지를 가르고 도착한 버스는 이미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 앉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중년을 훌쩍 넘긴 노년의 관광객들 뿐이라 배도 아직 남산만하지 않은 젊은(?) 임산부가 쉴 좌석은 기대할 수 없다. 택시를 타고 차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잠시 후회한다.

지난 춘천 방문 때 우리를 감동시켰던 샘밭 막국수와 숯불 닭갈비를 먹으러 간다. 그런데 택시 기사분이 넉살 좋게 이런저런 말을 붙이고 든다. 내심 본인이 소개비를 챙기는 곳을 추천하거나, 먼 거리 음식점이나 관광지를 추천하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고개를 든다. 귀를 쫑긋하고 들어보지만 그저 춘천을 정말 좋아하는 토박이 아저씨의 마음 씀씀이가 보인다. 기사분 말씀을 듣고 샘밭을 포기하고 명가 막국수에 갔다. 샘밭 막국수보다 훨씬 담백하고 거친 옛맛을 간직한 곳이다. 마늘과 갖은 양념으로 맛을 뭉쳐버리지 않고 훨씬 담백하고 은근한 맛을 자랑한다. 김치까지 마구 퍼먹었는데도 입 안이 텁텁하지 않고 메밀의 여운이 남는다. 곧바로 두 번째 집으로 걸어간다. 원래 샘밭막국수에서 닭갈비와 막국수를 한 번에 해결하려고 했으나, 명가 막국수는 닭갈비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춰 확대 재개봉했다는 장호닭갈비로 갔다. 장호 the grill! 이름도 트렌디하고 건물이며 인테리어가 범상치 않다. 커플 세트라는 미명으로 더덕구이, 소금구이, 양념구이, 막국수 1그릇을 세트로 팔고 있다. 이렇게 다 맛보게만드는데 주문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조금 전 막국수 한그릇에 감자전을 품고 왔다는 건 이미 잊었다. 그런데 이 집은 그저 실망 뿐이었다. 아직 오픈 이후에 안정이 덜 되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불이 들어온 뒤 한참뒤에 고기가 나오고, 여전히 화력은 지나치게 강하고 고기는 순식간에 익어서 타들어간다. 적당히 익은 지점을 안내하는 직원도 지나다니지 않는다. 무엇보다 너무 작은 닭을 쓰고 손질한 방법이 별로인지 지난 번 샘밭에서의 감동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뒤이어 나온 막국수는 정말이지 배부르다 핑계가 없었더라면 살짝 분노를 자아낼 정도였다. 부산에서나 먹는 밀면이나 아니면 덜 쫀쫀하게 끊어낸 냉면같은 정체 불명의 면발에 갖은 양념과 깨소금을 들이부은 무더기를 내왔다. 젊은 서울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여 튜닝한 맛이라고 한다. 단맛과 기름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는게 뭐 그리 중요했다 싶다. 결과적으로 가열찬 투자로 시작한 장호 더 그릴은 막국수가 이런 식이어서는 장수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먹었으니 소화시켜야 다음 것을 먹는다는 건 몸으로 체득한 진리다. 소양댐을 거닐고 유람선을 타고 청평사로 가서 막배 시간이 간당간당할때까지 기어올라가서 늦은 봄 산 속의 벗꽃을 누비고 내려온다. 부랴부랴 기차를 타고 왕십리역에서 다시 또 고기를 먹고 늦은 귀가를 했다. 18,000보를 넘게 걸었으니 오자마자 뻗어서 잤다. 그리고 다음 한 주를 내내 골골댔다.

많은 사람들이 임신 소식을 전하면 마음 굳세게 먹고 체력을 키우라고 조언한다. 무슨 일이 다가올지 여전히 잘 모르지만, 체력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아무래도 고된 길이 될 것 같다. 힘을 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