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25%

Tipping point for large-scale social change – ScienceDaily 2018년 6월 7일

뉴스페퍼민트의 번역 소개 – 2018년 6월 14일

통제된 집단에게 변화하는 언어규칙을 가지고 실행한 실험이기는 하지만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의 비중이 25%를 기점으로 실패와 급격한 성공으로 갈린다는 연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그 동안 한국 사회의 변화에 비추어보면 경험적으로도 납득할만한 결과다. 극단적인 소수만으로는 무력을 동원하거나, 소수 엘리트 계급에서 권력을 획책하지 않는 이상 어떤 변화건 실패해 왔다. 그러나 백만명이 서울 한복판에서 시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변화가 성공할 것이라는 강력한 징표가 된다. 그 백만명에 동조하는 몇곱절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영향을 주는 주변 사람들까지 합하면 충분히 시민의 25%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87년 민주화 투쟁에서 서울에 모인 백만명, 박근혜 탄핵에 참여한 촛불집회 백만명이 그래서 중요했나보다. 앞으로 진보적 변화를 꿈꾸는 모든 세력들이 전략으로 택할 통찰로 보인다.

문제는 이것이 진보적인 변화에만 해당하는 법칙이 아니라는데 있다. 반동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데도 같은 법칙이 작동한다. 한동안 우리나라 선거 지형에는 25%에 달하는 콘크리트 ‘보수’가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게다가 그 25%는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지역과 연령대 별로 아주 구체적인 실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지역, 연령별 투표율을 보면 거의 정확하게 선거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 25%는 그냥 가만히 보수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젠다 -대부분이 기득권을 강화하는 반동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겨우겨우 이루어놓은 교직원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도 하고, 범법화하기도 하고, 진보 정당을 해산하기도 하며, 규제를 단두대에 보내기도 한다. 25%의 콘크리트가 우직하게 밀어부치며 결국은 사회에 반동적 변화를 관철시켜왔다. 이명박근혜 정부 9년은 그러한 사회 변화가 마구잡이로 발생한 비극의 시간이었다.

진보적인 아이디어는 근본적으로 소수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진보적 변화는 어떻게 25%까지 공감대를 확산하느냐의 문제가 쉽지 않다. 지식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것이 퍼져야 하며, 교양이 되어야 하고, 가치판단까지 작동해야 한다. 노예제도 폐지나 여성의 선거권이 일반화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를 떠올려 보자. 지난한 길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수구를 강화하는 방법들은 극단적일수록 해당 계층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낸다. 부동산 투기로 배를 불리는 계층에는 강력한 재산세 폐지가 가장 강력한 동의를 불러일으킨다. 사용자 집단에게 노조 폐지는 공식적인 어젠다가 되는 순간 반대할 수 없는 유혹이나 다름없다. 미국의 트럼프를 보자. 기존 민주당과 공화당은 절대 낼 수 없는 멕시코 장벽 따위가 오히려 미국의 불행한 25%를 단결시킨다. 결국 반동의 변화는 더 극적인 방식으로 더 공고한 변화 열망 집단을 만들어가며 집행된다. 비극적이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건전한 ‘보수’ 세력-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의 등장은 오히려 사회의 진보를 위해 필수적이다. 현재 사회의 과거 성취는 인정하고 그것에 기반한 가치 체계를 세우는 보수가 있다면, 반동적인 변화가 극단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은 오히려 줄어들지 않을까. 종북 일당과 지역주의 일당이 패퇴하고, 무자비한 사용자 일당도 깰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우리가 성취한 민주주의 국가를 기반으로 한 보수가 들어섰으면 좋겠다. 이재오가 돌변하고 김무성이 극우로 돌아서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이 민주화 세력의 편에서 이루어낸 성취를 보수적으로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한나라당이 한동안 진보 의제를 선점하는 듯이 광고한 적이 있다. 그게 실제 가치였고 주장이었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더 달라졌을 것이다. 시민들이 갈아엎은 토양에서 수구가 퇴비가 되어 새로운 모습이 피어나길 기대해 본다.

보수 그라운드 제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211027001&code=910100

자유당이 뭔 포럼인지 위장 쇼를 개최하면서 제목을 ‘보수그라운드 제로’라고 붙였다. 주로 핵폭탄이 직격한 지점에서 폭발이 일어난 곳을 부르는 전문용어가 그라운드 제로, 폭심지다. 9/11 테러사건의 세계무역센터 부지를 지칭하기 시작하면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가치 중립적으로 무언가에 공격당해 무너졌다는 느낌보다는, 악한 적에게 당해서 새로운 시작이나 반격을 의미하는 장소가 더 와닿는 의미다. 9/11 그라운드 제로에서 테러와의 전쟁 선포가 딱 그 그림이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놓고 볼 때, 보수 그라운드 제로는 언어도단이다. 반동적인 수구가 보수를 참칭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라운드제로의 상징성까지 가져다가 쓴다. 선거에 참여한 시민이 뭐 자살테러 감행하는 테러리스트일리도 없고, 그들이 다시 세우려는 반격이 테러와의 전쟁만큼이나 명분을 쌓은 것도 아닐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에는 물론 개인적으로 반대한다.)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붙인 이름인지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기래기는 quote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출처도 밝히지 않고 보수의 몰락이 침몰한 세월호같다고 빗댔다. 이쯤 되면 그냥 지능이 낮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선거 감상문

문재인이 모든 질문의 답이 아니고, 민주당은 항상 내 편이 아니었기에, 민주당 석권이 모양 빠지기는 매한가지다.

어쨌건 과거의 문법에 단단히 매어 있던 조직과 관행과 인식들이 한번 끊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음에 큰 희망을 가진다.

새로운 토양위에 새로운 시대적 당위를 찾을 수 있는 질문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 우리 시대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방법, 사회를 이루고 모여 사는 이유, 그 이유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질문했으면 좋겠다.

결국 실체를 만드는데 실패한 “대한민국”, “국격”, “보수의 가치” 따위를 내려놓고 더 구체적이고 진짜 정치적인 질문들이 나와야 한다. 새 판에서 당면과제도 다시 물어야 한다. 페미니즘이 그렇고 복지가 그렇고 교육이 그렇다.

이번의 선거 결과는 그런 질문에 답하는 사람들 중 특정 관점의 열렬한 배제를 보여준다. 아직 질문은 남았고 찾아야 할 답도 쌓여있기만 하다. 새로운 토양 위에 다양한 질문이 나오고 그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정치 이야기가 꽃피우기를 기원한다.

김문수, 안철수가 배제된 서울시에서 28세 페미니스트가 보통 사람들의 시야에서 뛰놀기를 바란다. 종북 말고 다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된 경상도에서 이제 노인 복지를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토호들의 토건 민원 창구가 붕괴된 지자체와 지역 의회에서 공동 육아를 궁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선별급식이냐 무상급식이냐의 소모적인 논쟁이 끝난 지점에서 학생 인권에 관심이 쏠리기를 바란다.

그런 질문들에 답하려면 문재인의 민주당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민주당이 보수에 자리를 틀고 앉고, 다채로운 질문에 답하겠다고 나서는 이익집단이 정치에 뛰어들고, 시민들은 그런 집단들에 이해를 투영하여 지방자치를 자기것으로 만들수 있을 것이다.

그게 DJ가 뿌리고 노통이 라쳇을 걸어서 길러놓은 민주주의의 빅 픽쳐라고 믿는다. 그런 일들의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오래 전 적어둔 짧은 생각

블로그의 임시 저장 글을 보다가 별다른 수정 없이 등록하는 글.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장면들이 있다. 중환자실에서 수술 후 몽롱한 의식으로 보았던 장면 인데 의사 간호사 무더기와 함께 들어오던 아버지의 의료용 침대가 그렇다. 휠체어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이 울부짖음만 쏟아내며 바라본 발인식, 내가 기댔고 나에게 기댔던 벗의 장례식장,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삼키던 어머니 모습 등, 개인적인 상실이나 슬픔들이 그렇다. 공공의 기억들도 내 안에서 아프게 자리잡은 것들이 있다. 1980년 광주가 그렇다. 운동권에서 수혈받은 감정이 아니라, 얇디 얇은 사료들과 예술들이 나를 그리로 데려간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도 그렇다. 깡패를 동원한 경찰에게 맞아 죽는 이들도 그렇다. 그래도 광주 다음으로 강렬한 이미지는 가라앉고 있는 세월호다. 그 이미지를 둘러싸고 내가 사는 이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은 결국 이미지를 떠올리기만 해도 격한 눈물을 쏟게 만든다.

그 슬픈 이야기 속 안 곳에, 그저 하나의 교통사고에 온 국민이 빨갱이한테 휘말려서 정부를 탓하고 세상을 탓한다고 삿대질하는 국회의원이 있다.

중국에서 아이폰 생산하는 폭스콘 공장에서 한 달에 십여명이 투신 자살을 계속해서, 폭스콘이 기숙사에 그물망을 설치하는 상황은… 자살하는 한명 한명의 정신건강 문제인지? 폭스콘의 관리 문제인지? 아니면 글로벌 생산 아웃소싱 기업의 노동 환경 문제인지?

18세기 공장에서 착취당하던 아동들이 전염병에 집단 몰살 당하거나, 아니면 공장 화재로 아무도 대피하지 못하고 야간조로 일하던 아이들이 전부 타죽었다면… 그건 도망치지 못한 개인의 문제인지? 시대의 낙후성 때문에 발생한 전염병 사고이거나, 아니면 그냥 화재 사고인건지? 아니면 아동 개념도 없고 노동자 개념도 없고 아무런 규제도 없이 자본만이 작동하는 구조의 비극인지?

비극을 바라보는 관점은 정치적이어야 한다.

제주도에 수학여행을 배를 타고 간다. 그 배는 각종 규제 완화를 틈타 자본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불법을 넘나드는 배다. 불법을 넘나들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 배후에는 뭔가 권력기관과의 수상한 거래가 있다는 정황이 보인다. 그 배의 이상 행동에 대해 모니터링 체계는 작동하지 않았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충분히 탈출 가능한 시점을 모두 넘겨버렸다. 이후에는 국민 여론 악화를 피하기 위한 정치 – 언론 동원 쑈 뿐. 이후에는 정권의 부담을 덜기 위한 물타기, 반대 여론 형성 등이 인간이 근대에 이룬 사회에서 발생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저열한 모습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어느 정도에서 멈출 것이냐는 문제는 있다. 정말 교통사고라 여기는 영역도 정치적으로 들여다 보면 다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안전이 사회 구성원이 요구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라고 볼 때. 비싸고 큰 차를 사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안전도의 격차는 무엇으로 정당화할 것인가? 교통사고들을 모두 모아서 분석해보면, 연간 수입이나 보유 자산에 따라 사고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날 것인가? 돈이 없을 수록 위험한 세상이다.

구조적 문제는, 그것이 수구적 이해에 배치될 때에 한해, 개인의 선택과 능력이라는 신주단지 같은 허울에 충분히 은폐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월호가 교통사고이어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세월호를 교통사고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그런 특권이 없거나, 그런 특권을 부당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단호히 정치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글을 살펴보며 돌아보게 된다. 단호히 정치적으로 나서고 많은 이들이 공감했는가? 적어도 사람과 짐승을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자리잡지 않았나. 희생자들과 다음세대에 티끌같지만 중요한 성취를 넘겨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스스로 거짓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