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vs. 국정농단

00503338_20180528국정농단은 종종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언론이나 세간에서 짓는 이름은 그냥 말 나오는대로 붙이는 게 아니고 목적과 함의를 전달하기 위해 신중하게 디자인한 결과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제가 그저 병원 대신 청와대에 집어넣은 우중의 판단이 근본 원인이라면 이토록 처참한 국정농단의 주범으로 몰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다. 최순실 정도 되는 캐릭터가 등장해서 국정을 주무르는 이미지가 나와줘야 이제 국정농단의 면이 선다. 게다가 최순실은 거기에 걸맞는 행태를 미디어에 노출하며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명명은 다른 측면에서 이 사태의 본질을 지적한다. 당연히 시스템의 문제가 크지만, 특정 자연인의 무지와 탐욕이 만들어낸 예외 사례라는 느낌이 그것이다. 가장 큰 시스템의 실패로 많은 사람들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지적할 정도로 시스템 문제를 구체적으로 구조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공직자 인선에 대한 문제, 예산 배정 및 활용에 대한 문제 등 굵직한 문제점들부터 청와대 보안 규정 준수와 같이 어찌보면 작은 부분까지 시스템의 실패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시스템의 한계는 언제고 존재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난 사고들은 박근혜 – 최순실이라는 명콤비가 저지른 일보다는 규모도 작고 전문적이었다. 같은 구멍이지만 자격미달자들이 벌인 개인적 행각이 그 구멍을 더 크게 벌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민중은 권력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해당 문제에 대응했다. 정치꾼들이 케케묵은 내각제를 꺼내들고 온 힘을 다해 휘두르고 다녔지만 여론은 여전히 직관적인 이해가 어려운 분야로 쉽게 뛰어들지 않았다. 결국 마녀사냥과 같은 구도 – 헤아릴수 없이 효과적이다-를 멋들어진 정책으로 소화해낸 문재인정부의 기획력이 아직까지 주효하고 있다. 적폐청산. 이 역시 고도의 명명 전략이 제 역할을 다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사법농단은 양승태라는 타겟을 전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최순실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여성에 중년에 복부인 이미지에 무식하고 편법을 저지르는 캐릭터와 비교할 때 일제시대 이후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법률 엘리트 계층의 최상층 인물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가 보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양승태 개인에 대한 모욕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최순실에 대한 질타와는 비할 바 아니다. 사태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양승태라는 비정상적인 인물이 벌인 사건으로 보기에 무리가 많다. 어디에서 갑자기 외부인이 등장한 것도 없다. 박근혜는 무지몽매한 대중이 그녀의 보금자리를 잘못 찾아주는 바람에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 기존 시스템에는 없던 최순실이라는 이물질이 끼어들어와 깽판을 친 구조다. 이때문에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양승태가 누군가? 엘리트 권력기관에서 스스로 발생하여 결국 최정상에 오른 심장이나 다름 없다. 판사 조직의 최고 수장이 외부 인사의 더러운 피로 가능할법 하지도 않고, 실력과 자격이 모자란 사람이 수많은 경쟁자를 밀치고 그 자리에 오를리도 없다. 그렇게 안에서 태어난 요인이 수장에 오르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백선하 교수가 그토록 원했던 ‘병사’는 백남기씨의 사인이 아니고 한국 사법정의의 사인이 되었다.

따라서 사법농단, 사법거래, 재판거래라는 표현은 모두 적합하지 않다. 수많은 부조리와 실패를 드러내며 대안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검찰권력과 더불어 사회 정의 시스템 전반의 내적붕괴로 이해해야만 한다. 양승태 개인이 비정상적인 대통령과 작당하여 재판을 거래했다는 관점은 당치도 않다. 청와대 비서실장, 대법관과 법무부장관, 외교부장관이 연통을 주고 받으며 모의하는 작태는 개인의 일탈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무서운 시스템적 실패다. 정치와 행정의 긴밀함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여기에 사법과 정보기관이 모여들어 주고받은 작당을 보자면 헌법부정세력 외에 적당한 이름짓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법조계는 스스로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검찰은 칼을 대는 시늉으로 일관하고 법원은 영장도 자료제출도 조사협조도 없다.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은 제식구 감싸기로 기대를 배신하고 있고, 언론은 빚내서 종부세 낸다는 악성루머 배포에 여념이 없다. 로스쿨 강사로 전직했는지, 법대교수들의 움직임도 답답할만큼 없다. 무엇보다 사명감의 낭만보다 로펌 계약연봉이 훨씬 중요한 예비법조인들은 아예 관심조차 없다. 조직 내부의 사람들은 마치 검찰마냥 조직 보호에 여념이 없다. 검찰이야 되도 않는 검사동일체라는 무슨 조폭같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잘못된 과거사도 집요하게 반복하려는 쓰레기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판사는 좀 달랐지 않았나? 한 명 한 명이 독립적인 사법기관으로서, 서슬 퍼런 시대에 용감한 판결을 실행한 사람도 종종 나오고,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인 고백도 검찰이나 경찰이 아닌 사법부에서 앞장서서 세상의 변화를 추인하고는 했다. 모든 사회적 진보는 사법부의 보수성이라는 필터를 거치며 사회 규범으로 안착할 수 있다. 결국 사법부의 보수성은 끊임없는 변화를 전제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선악이 명징해야 속이 편한 조폭 검사 조직과는 결이 다르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의 법조계는 모두 거북목을 하고 가마니를 뒤집서 쓰고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다.

아마 양승태 하나도 제대로 못잡을 것이다. 잡는 놈들, 집어넣을 판단하는 놈들, 보도하는 놈들, 구경하는 놈들 전부 한통속 엘리트 아닌가. 우중에게는 보여주지도 않고, 봐도 관심도 없고, 관심 있어도 이해도 못하고, 이해한다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걸 마주칠때는 점진적 진보가 가능한 것이지 의구심이 든다. 그저 경찰, 검찰, 판사랑 안엮이고 사는게 유일한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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