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독백, 읽은 책들

식상한 표현들보다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려워지는 것이 나이를 먹는 증거인가보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40대라는 정체성에 묻어 있는 온갖 것들, 가족에 대한 클리셰 등등. 전에는 집단의 변명처럼 들리던 말들이 이제는 막 내 속에서 끄집어 낸 것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잠시잠깐 신경을 안쓰니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쳐다보는 시간이 뒷목을 서늘하게 감싸쥐도록 맹위를 떨치고 있고,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은 쌓여만 가고, 가사 분담의 큰소리도 허언이 되어 가고 있다. 이 또한 ‘먹고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아닌가 하고 주장하고 싶지만, 면이 서지 않음은 어쩔 수 없다.

작은 습관 하나씩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내가 40대까지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깨달은 아주 작은 무기 하나다. 블로그에 독백을 적는 것으로 의미 없는 웹서핑 시간을 바꾸는 일을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역시 쪼그라든 자의식에 먼저 던져줄 미끼는 당연히 책이다.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 사모은 책들을 읽어가고 있다. 부담스럽지 않은 페이지 수도 좋고, 소설마다 세계관이 확연하게 다르기에 한 작가의 책을 계속해서 읽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완전히 내 스타일이라고 달려들기는 조금 어렵다. 책만 쓰고 산 사람이고, 일본계 영국인의 정체성도 힘이 없는 상황에서 문학적 성취도 살짝 노벨상을 타기에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는 민족성같은 자의적이고 때로는 악의적인 관념보다 음식 문화가 차라리 더 근대부터 형성된 민족 관념을 설명하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근본도 별로 없는 먹거리들을 가지고 가장 멋진 음식 문화를 만들어낸 일본의 맛을 다룬 에세이를 지나치기 어렵다. 전 세계에 꼰대질하고 다니는 영국인이 읽어내는 일본의 풍경은 우리 눈에 전여옥만도 못한 수준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는 익살스럽게 포장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일본에 대한 서구인의 이미지들을 애용한다: 작고, 조용하고, 쓸모 많고, 가업에 집착하는 장인이고 등등. 물론 음식 이야기만 놓고 생각하면 두부, 국수 등 저자가 언급한 음식들을 먹으러 일본에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훌륭한 책이다.

서구인들의 오만하다못해 유쾌한 세계 논평은 오리엔탈리즘에 그치지 않고 세계사를 하나의 우스운 농담으로까지 만들어버린다. 딱 그 정도의 책 한 권이 있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그라는 이름을 기억해 놓고, 앞으로 내내 걸러야겠다. 출판사의 제목짓기와 마케팅 역량이 제법인 것 같다.

편의점 인간과 살인 출산은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들이다. 발칙한 상상만으로 소설이 되긴 어렵다. 몇몇 단편은 그래서 실패한다. 그러나 이 사람의 소설은 설정의 힘에 이야기의 깊이를 더한 문학의 자격이 넘친다. 일본 문단의 규모와 생산성을 다시금 경탄하게 하는 소설들이다.

일본 소설을 이야기하는 한국인 입장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빼놓을 수 없다. 대학교 시절 충격과 경탄으로 접한 하루키의 소설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반드시 읽어야하는 책이 되었다. 한 번 인정받으면 절대다수가 주류 취향을 공유하는 기이한 모습이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하루키의 신작에 저항하기는 어렵다. 끝간데 없는 상상력과 가공할 세계관 제조 능력으로 지어놓은 거대한 공간에 용두사미 이야기를 펼치던 시기를 조금씩 벗어나는가 싶다. 노벨상을 목표로 하며 반전이나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적 언급을 한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마치 경상도 노인이 대학생 간첩 찾는 것 같은 괴이한 시각이라 본다. 뭐, 노벨상 타려면 인생으로 증명해야 하는 실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 좀 더 적극적으로 힘내기를 빈다.

다시 일본의 장르 소설로 돌아가보면, 워낙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다. 노골적인 장르 문학이라 젠채하는 선비 입장에서 그 동안 완전히 방치했던 분야가 추리, 공포물이다. 사실 무협지와 같이 한 번 잡으면 놓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컸다. 단편집으로 샀고, 게다가 e book으로 사서 무협지 함정에 빠지는 걸 피했다. 소설은? 당연히 훌륭하다.

장르 중에도 일부 발은 담갔으나 깊이 들어가보지 않은 곳이 SF이다. 80년대, 혹은 약간 중2병스러운 제목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라는 책은 그 유명한 테드 창의 중편정도 되는 길이의 소설이다. 컨택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테드 창의 나와 당신의 이야기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서 이 사람의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SF 장르에서 아이작 아시모프 수준의 파장을 일으켰고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훌륭한 분이다. 더 많이 썼으면 하고 기도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SF 팬들의 대열에 동참한다.

오바마가 2017년인지 2016년인지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는 운명과 분노. 영어 제목으로는 Fate and Fury가 되어 제법 운이 맞는데 번역하니 이 맛이 없어진다. 조금의 의역을 허용하여 운명의 이면(裏面) 정도면 어떨까 싶다. 약간은 작위적이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지만 기본 설계가 워낙 탄탄하고 장면과 국면을 뒤섞은 묘사가 이끌어가는 서사가 모든 허술함을 매워간다. 두 단어의 제목, 두 장으로 나뉜 소설, 운명과 이면, 사랑과 분노, 가족과 친구 등등 잘 계획한 구조가 주는 울림을 남김없이 즐길 수가 있다. 정말 잘 쓴 소설이다. 이 작가의 책이 더 궁금해서 지금은 아르카디아를 사서 읽는 중이다.

즐거운 소설 읽기는 재미보장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잠으로 이어진다. 무협지같이 빨려드는 이야기와 상상력은 이 작가의 특기다. 너무 큰 욕심을 내지 않고 만들어낸 세계에서 현실감을 살짝 비틀고 그 지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직조한다. 당연히 강추다.

글쓰는 솜씨가 일정 수준에 다다른 한국 작가로 김영하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김영하를 가리는 현대문학상 소설집도 있다. 한 때 장강명 등이 한국문학의 영역을 넓히고 새롭게 하는 모습에 기대가 컸는데, 김영하와 같이 새로운 주류를 형성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 다만 TV에서 셀럽 소설가를 개척하는 모습이 겹치며 기존 작품들보다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논픽션으로 록산느 게이의 페미니스트 고백록인 헝거, 네덜란드 저널리스트가 영국 가디언 협업으로 영국 금융가를 파고들어 뱅커의 세계를 탐사한 상어와 헤엄치기가 있다. 헝거는 반드시 세상에 나와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혐오에 빠진 여성들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페미니즘은 진지해야 한다. 세상의 절반이 차별당하고 있다는 관점보다는 여성이라는 조건을 더하면 안그래도 심각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더욱 거세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키가 190 넘고 키보다 몸무게 숫자가 더 많이 나오는 흑인 여자, 그것도 타히티 이민자 출신, 그리고 강간 생존자. 여성이라는 조건이 그 모든 소수자 지위에서 오는 차별과 폭력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 페미니즘이 모든 해방의 첫걸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물만난 고기같이 신나서 본인의 부족함을 더욱 만천하에 알리고 다니는 정희진이 서두에서 추천사를 쓴 것이 옥의 티일 것이다.

시카고 학파의 네오콘들이 제3세계를 어떻게 망치는지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부터 시작해서 문 앞의 야만인들과 같이 금융계의 전설적인 기록물들을 지나 1997년과 2008년 금융위기의 이면을 파헤친 수많은 논픽션과 창작물들은 내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다. 99% 시위가 있던 뉴욕에서 뱅커들에게 야유를 보내기 위해 모인 시민들에 대한 뱅커들의 조롱섞인 웃긴 이야기가 있다. 아침부터 데모하러 나왔는데 이미 모두 출근해 있고, 아무리 기다려도 퇴근을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모두들 그 정도 벌어도 된다고 납득하고 집에 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같이 승자들의 삶 1분 1초, 1센티, 1평을 갈구하는 99%가 아닌 이상, 금융계 장벽 너머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금융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인 보통 사람들을 위해 런던 씨티의 탐험 안내서와 같은 책이 상어와 헤엄치기이다. 월스트리트와 뉴욕의 아버지뻘인 씨티와 런던을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아카데미 전문가들의 식견은 종종 대중 교양서를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더 쉬운 방식으로 흘러들어온다. 일부 의사, 변호사, 건축가나 그냥 ‘교수’들이 세상에 꼰대질하느라 써댄 책들을 피하는 법만 익히면 생각보다 유능한 이야기꾼들이 자신들의 전문 영역을 맛있게 요리해다가 가져다주는 상찬을 즐길 수가 있다. (첨언하자면 가장 피해야 할 사람들은 의사다. 그들은 상아탑도 아니고 그냥 단힌 세계인 작은 병원과 의료계 안에서 자아를 완성한 치들이기 때문에 우리 세상에 대해 해 줄 말이 없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에서 ‘도시’의 의미를 잃어버린 게토를 다시금 깨닫게 되고, GDP는 틀렸다를 통해서 시카고를 극복할 수 있는 틈새를 목격한다. 그리고 스탠리 밀그램의 겁나는 실험은 인간이 윤리를 논하고 나누어야 한다는 필연을 이야기해준다.

틈틈히 읽은 책들 중에 정리할만한 것들은 이 정도이다.  책이건, 회사건, 개인사건 좀 더 생산적인 되새김질이 될 수 있는 독백을 다시 시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