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도서] 나는 고발한다 – 해제ㅣ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ㅣ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7 에밀 졸라 (지은이), 유기환 (옮긴이) | 책세상 | 2005년 5월
그 유명한 (그러나 제목과 날짜는 외워도 뭔 일인지는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역사 이벤트인)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해서 에밀 졸라가 쓰고 ‘발표’했던 글들의 모음집이다. 자세한 내용은 가끔 주옥같은 글들을 배포하는 ㅍㅍㅅㅅ의 [드레퓌스 사건과 100여 년 후의 한국]을 참조하면 좋다. 정리가 잘 되어 있고,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도 언급하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의미를 곱씹어보는 메시지도 던진다.
최근 읽어보는 사회학 고전들에서 일관되게 받는 인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위의 언급한 글과 같이, 오늘 우리 사회의 핵심을 찌르는 말들이 1~2세기 전 서구 저작들에서 어찌 그렇게 통렬하게 적혀있는지 하는 놀라움이다. 바로 뒤이어 드는 감상은 서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라는 되새김이다.
에밀 졸라의 글을 봐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자기들이 열어 젖힌 근대의 이상에 대한 자부심과 근원 의식이 철철 넘친다. 에밀 졸라에게는 대혁명이 세상에 꺼내 놓은 이상적인 사회상이 큰 힘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의인화한 프랑스로 등장하고 있지만, 졸라가 열렬히 연모하고 헌신하는 대상은 결국 사회적 이상임이 분명하다. 대혁명이 왜 프랑스였는지, 대혁명 자체는 어떤 구체적인 시발점과 동력을 가지는지에 대한 분석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대혁명은 그 이전 역사도 재구성할 정도의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프랑스, 서구에는 어떤 이상향의 본질적인 기준점이 있다.
드레퓌스 이후에도 서구는 수많은 격변을 겪어 왔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물론이고, 냉전 중심의 세계 질서 개편 속에서 68혁명, 사민주의 도입, 여전히 진행 중인 유럽의 통합 작업, 중동과의 관계와 최근의 난민 사태까지. 사건들이 가지는 파괴력과 스케일은 차치하고서라도, 하나하나의 문제들이 얼핏 보기에도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맥락을 지니는 어려운 것들이다. 우리가 지지고 볶는 (빨갱이, 장애인, 노동자, 외노자 등) vs. (애국시민 혹은 국민)의 구분 같이 선명하고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는 이슈들이다. 이런 사건들 속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졸라들이 등장했고 희생했기 때문에 서구의 현재가 지금과 같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가 빠른 시간에 서구 교양층을 모방하면서 발전하고 있지만, 개화기의 일본과 같이 근원적인 패배감을 떨칠 수 없는 상황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이런 생각도 든다. 대혁명, 드레퓌스 사건, 제노사이드, 68 등을 겪으면서 꾸준히 진보하고 있다는 것에 희망을 품지만, 졸라와 같은 희생과 참여가 끊임없이 요구될 수 밖에 없는 물리적인 조건들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대혁명 이후에도 반동으로 인한 공화국 현실화는 한참이 지연되었고,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한 세력은 마치 고전문학의 주제처럼 현재성을 가진다. 파시즘의 악행을 확인했을 뿐, 인종차별과 파시즘은 언제든지 입을 벌리고 있고, 소비자로 전락한 현대 시민은 68과 같은 에너지를 회복할 가망이 없어 보인다. 시지프 신화처럼 계속해서 굴려올리지 않으면 패배하고 마는 것이 거시적인 역사에서도 진실처럼 보인다.
카뮈는 문학으로 시지프의 승리의 순간을 은유해 냈지만, 우리는 어떤 식으로 승리를 모사해야 하는지 궁금하다. 대혁명과 같은 기준점과 진보의 방향성에 기초한 역사 이해, 현재의 연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우리 식으로 써내는 것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나라 극우는 그렇게 역사에 집착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기준점(남한 정부 수립)과 방향(반공, 신자유주의)을 바탕으로 현실 인식(정치혐오, 배제에 기반한 동질화)을 구축하고, 미래(착취구조의 유지)를 현실화하려는 정교한 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