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무시무시한 책을 쓴 오찬호의 다른 책. 이북으로 출간되기를 기다렸다가 알림을 받자마자 사서 봤다.
같은 주제의 변주이어서인지, 아니면 학생들의 속내라는 신선한 주제가 아니라 자본에 포획된 대학이라는 다소 알려진 주제라서인지 첫 책보다는 밋밋하다. 사회학자가 아닌 본격적인 저자로서 자아를 깨달은 오찬호가 이리저리 시도하는 장치들 – 가상의 인물의 독백이라던지-은 어색하기만 하고,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힘도 모자라다.
비슷한 주제로 책이 여러 권 쏟아져 나오던데… 잠시 쉬어가야 할 타이밍인 것 같다. 그래도 역시 널리 읽혔으면 하는 책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전적인 수필집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로 처음 만난 찰스 부카우스키의 장편 소설이다. 소개글들에서 주인공인 헨리 치나스키(Henry Chinaski)가 작가의 실제 모습과 흡사한 자전적 인물이라는 말을 듣고 흥미가 더했다. 여러 소설에 등장하는 동일한 이름의 주인공은 필립 로스의 네이선 주커먼을 생각하면 된다. 평생 이런저런 소설을 쓰면서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소소한 장치는 쏠쏠한 재미가 있을테다. 에세이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치나스키는 그야말로 막장 인생의 끝을 보여준다. 사십년전이나 다를 바 없이, 아니 오히려 심화된 구조적 폭력의 희생자. 과거나 다름없이 약자가 약자인 내적인 이유 – 불합리, 나약, 나태, 불성실, 비열, 배신, 탐욕 등등. 반복되는 파멸의 장치인 술과 도박.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오히려 그 시절 대놓고 까대기도 어렵던 마초적 관점. 실패로 범벅된 백인 남자. 그런 인물이 그에게 걸맞는 여자와 함께 제목처럼 막노동꾼으로 생존해 ‘있는’ 장면을 그린다. 1인칭 관점이지만 열거한 특징들 외에는 숨겨진 부분도 없이 투명하다. 직업과 직업을 전전하며, 여자들을 바꿔가며, 도시를 옮겨다니며 끝이지 않고 움직이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시간의 진행이 아니라 지극히 고정된 한 장면이다. 투명한 주인공을 통해 비추는 어떤 것(삶이건, 사회건, 역사건)의 그림자.
해석은 각자의 몫이라는 편리하고 비겁한 촌평을 남기며 옮긴이도 당혹스러움을 피해간다. 나는 치나스키, 혹은 치나스키를 넘어 부카우스키에게 나를 투영한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결혼과 2세에 대한 계획 등 사건을 거치며 이제야 내 시간이 어디론가 흐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변하는 것만이 시간으 흐름을 증명한다. 변하지 않으면 부지런히 떠돌지만 같은 모습인 치나스키와 다를 바 없다. 부카우스키의 시각에서 치나스키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부카우스키처럼 겨우 힘을 내서 역사에 남을 걸작을 쓸 기회라도 있다. 그러려면 먼저 치나스키의 관성에 묶인 정적인 장면을 깨뜨려야 하고, 그건 움직임을 멈춤으로서만 가능하다. 소설에서 빠져나온 치나스키는 세상을 잃게 되지만, 부카우스키는 그를 다시 가두어 걸작을 쓴다. 인생의 시간을 그의 손으로 감아돌린다. 나는 치나스키이지만, 부카우스키를 꿈꾸게 된다.
영화 원제목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살펴보면, 맥락까지 한국어로 바꾸던 시절에서, 영어 교육에 비이성적인 돈을 쏟아붓는 국민국가답게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과도기적으로 자국민의 외국어 역량을 무시하고 ‘라빠르망’처럼 국적불명의 괴단어를 만들어서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여튼 요즘은 그것보다는 낫다. 최근에 이상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오히려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문화적 맥락을 지니는 단어를 그대로 쓸 때이다. 이제 소설에도 이런 경향이 범람하나보다. ‘팩토텀’이라니… 내가 모른다고 어려운 단어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너무한거 아닌가 싶다. 혹시 찾아보게 만들려는 역자의 심오한 의도인지도 모른다. 이 일 저 일 잡일 허드렛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을 가르키는 말이란다. 아무래도 영미문화권 애들이 가지는 배경이 더 있을 것 같아서 유래를 찾아보니 Jack of all trades가 나온다. 그 전에 중세에는 Factotum 철자로 master of everything이라고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모든 일의 달인에서 (약간 부정적인 의미의) 팔방미인으로, 다시 허드렛일로 연명하는 일꾼인생으로 단어의 의미가 흘러간다. 역시 훌륭한 역자의 미끼를 덥썩 물었던 성과가 있다. 기가 막힌 제목이지 않은가. 감동했다. 물론 그래도 제목을 저렇게 둔 건 이해할 수 없다만.
영화화도 됐다고 하지만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다. 누가 치나스키의 역할을 맡던지 간에 부카우스키보다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휴먼스테인, 미국의 목가 등 대표작 중심으로 보고 있는 미국 작가 필립 로스의 소품. 과장이 1도 없는 건조하고 간결한 묘사. 묘사만으로 만들어가는 서사. 어느 장면이건 시공을 확장할 수 있는 통찰이 스며들어 있고, 결국 그려낸 인생 혹은 장면은 제목처럼 모든 사람의 것이다. 소설의 즐거움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깊은 울림을 주는 그런 책.
역시 내가 좋아하는 후장사실주의자의 작품과 한국을 싫어하는(?)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김솔이라는 작가도 찾아봐야겠다. 심사평들을 보면 당선된 작품과 유사한 설정을 반복하면서 칼을 가는 중인 것 같다. 어떻게 갈고, 어떻게 베어가는지 지켜보고 싶은 작가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작가들의 작품에 선입견이 들듯이, 어떤 대학교을 나왔고 어디서 등단했는지도 선입견을 준다. 이 책에 작가 소개에는 나이는 있지만 대학이 없어서 조금은 더 나았다. 대체적으로 훌륭했고, 소재와 방식에서 넓어진 느낌이라 좋았다. 심사평들을 보니, 천편일률적인 칭찬이 아니라, 치열한 심사 과정이 풍겨나온 느낌이라 좋았다. 각자 자기의 취향을 무기 삼아 다툼을 일으킨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난다. 동료 작가의 어설픈 작가론보다 작가 본인의 변을 실은 것도 이상문학상보다 훨씬 낫다. 다만 각 작품마다 달려 있는 평론들을 읽어보면 우리나라 평론이 얼마나 조악하고 뒤쳐져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소설과 같이 있으니 그 열악함이 더 도드라진다. 이런 식으로 대중에 노출되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더 좋아지기를 기대한다. 평론도 등단하는 시스템을 가지다 보니… 상상력과 창의력, 주장과 논쟁이 사라진 죽도록 지겹고 정형화된, 그러면서 아무 감흥도 없는 그런 글이 되어버렸다. 곤충이 머리 가슴 배 있듯이 평론 쓰는 틀도 그렇게 고정적으로 보였다. 아주 거슬렸다. 그것 빼곤, 작품이건 뭐건 다 좋다. 이상문학상도 이런 젊은 감각을 좀 더 베껴대면 어떨까. 예를 들어 딱 그 표지부터라도.
죽음과 그것에 영향을 받는 개인, 혹은 사회를 섬세하게 그린 김경욱의 작품이 대상. 당선작들 전반에 세월호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큰 상흔이 직간접적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몇몇 단편은 눈물짓기도 했다. 다만 단편의 맛을 살릴 수 있는 발랄함이나 새로운 시도는 다른 년도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유쾌하다. 수긍이 된다. 이해하기 쉽다. 놀랍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부터 수많은 진보 정치 세력에 대한 충고들을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와 경험으로 풀어낼 줄은 몰랐다. 간혹 일본에서 나오는 급진 활동가들의 가벼운 저작같이 않을까 걱정했지만, 형식과 달리 깊은 고민과 경험이 고여 있는 훌륭한 책이다. 마지막 완독한 독자에게 던지는 말이 내내 무겁게 남아있다.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까.
미국 작가가 이런 책을 써발기는 거야 수없이 당해봐서 어지간하면 걸려들지 않는다. 독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우리나라에까지 번역된 책이면 일단 검증되지 않았을까 하는 조급한 판단을 하고 구매했다. 제목만 그럴듯한 초 두괄식 미국 책들은 자세히 읽어보면 간단한 주장을 실증주의적 근거들로 뒷받침하기라도 한다. 이건 뭐 그냥 돈 남아도는 보수적인 의사의 본인만 납득하는 자기주장 쪼가리 문집이다. 이제 유럽 작가도 동시대인은 미국인에 준하여 검증하고 사야겠다는 소중한 지혜를 얻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