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라이더, 천년여우

<공각기동대> 실패 이후에 영화관 가기가 더 신중해진다. 딱히 흥미를 끄는 영화가 없을 때는 차라리 어둠의 경로나 DVD를 구해서 보고 싶었던 걸 찾아 보기로 했다. 그래서 보게 된 영화 두 편.

<싱글라이더> 

11월말에 벌어지는 사건들인데 등장인물들이 겨울 옷을 제대로 챙겨입지 않고 있어서 시작부터 설정에 구멍이 많다고 느꼈다. 게다가 동양종금사태를 그린 장면들에서 별로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이 보여서 시작부터 더욱 불안했다. 일정 수준 경지에 다다른 이병헌이 끌고가는 분위기,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장면들이 그나마 눈길을 붙들어 맸다. 이후에도 설정의 구멍들이라 생각한 것들을 계속 발견한다. 도대체 짐도 싸지 않고 호주로 날아온 것이며, 손에 쓴 주소가 지워지지 않는 걸 보니 내내 씻지도 않고 저러고 다닌다는 건가… 싶은 의문들. 부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의사소통 대상이나 방식들. 음식을 시키지도 않고 내내 창가를 보고 앉아있거나, 자연스럽게 게스트하우스 침대에 누워버리는 배짱들. 워킹홀리데이를 2년이나 했는데 아는 사람, 도와줄 사람 한 명 없어서 우연히 발견한 아재에게 매달리는 여자 등등.

이병헌이 이번에는 드디어 물리적인 자살을 하겠군… 하고 중얼거렸더니, 같이 보던 아내가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남자가 유서나 다름없는 글을 게시하고 거기서 죽었고, 그 삶이 아닌 다른 삶으로 도피했지만 거기서도 그의 자리는 없다는 것이니, 이번에는 정말 물리적인 자살을 하지 않을까? 아니면 소희랑 뻔하게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살려나? 하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퍼뜩 깨달았다. 아!

하나의 반전에 모든 것을 기대기만 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잘 준비했고, 섬세하게 접근했고, 배우들이 제대로 받쳐준 결과물이다. 몇 가지 설정의 부자연스러움만 좀 더 부지런한 취재와 집요함으로 극복했으면 더더욱 끝내주는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천년여우, Millenium Actress>

존경하고 감탄스럽고 부럽고 안타까운 콘 사토시의 애니메이션. <퍼펙트 블루>, <파프리카>, <도쿄 갓파더즈>에 이어 아끼고 남겨두었던 작품이다.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사람의 작품들은 전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모두 콘 사토시의 캐릭터들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슬프지만 어둡지 않고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고 어리석지만 결국에는 어떤 깨달음을 얻고야 마는 그런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어떤 작품도 이야기를 하나의 틀 안에서 하나의 줄기로 전달하는 법이 없다. 파프리카는 현실과 각자의 꿈을 뒤섞고, 퍼펙트블루에서는 망상, 꿈, 현실과 시점을 마구 오간다. 도쿄 갓파더즈는 인물들의 사건이 뒤엉키는 와중에 기적을 슬쩍 크리스마스에 밀어넣으며 경쾌하게 현실 – 비현실을 엮어 낸다. 천년여우는 이 중에 단연 가장 멋지게 이야기들을 겹치고 경계를 뭉개다가 멋들어지게 연결짓는다. 은퇴한 여배우와의 인터뷰, 인터뷰어와 여배우가 몰입해서 만들어내는 과거의 기억,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 그녀의 삶을 이끌어 온 사건, 사건과 얽힌 주관적 기억, 또 다른 주관적 기억과 겹침이 넘실거린다. 영화의 모든 부분이 콘 사토시의 천재적 비전과 기획에 따라 심어져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이 그의 영화를 보는 하나의 방법인 것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지진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인트로에서 기획사 사장이 영화를 돌려보며 지진을 겪는다. 그런데 여배우와 인터뷰하러 갔을 때, 그 지진이 여배우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언질을 듣는다. 실제 인터뷰를 시작하고 그녀는 자신의 탄생이 관동대지진 직후라고 고백하며 시작한다. 그녀가 배우를 그만두게 된 시점은 클라이막스 신을 찍다가 지진으로 인한 사고를 당했던 직후이고, 그 장면은 기획사 사장이 아침에 보다가 지진을 맞은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인터뷰 날의 지진은 그녀가 태어난 지진과 같이 그녀의 마지막을 알리는 지진이다. 이런 아름다운 기획과 디테일들을 사랑한다.  삶에 대해 그가 발견한 것들을 그토록 경쾌하고 아름다운 인물과 사건과 이야기를 통해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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