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갓파더즈,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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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뒤져보고 있는 콘 사토시 명작 시리즈. 그의 작품 중에 가장 대중적이고 발랄하다고 하는 <도쿄 갓파더즈>다. 한국에서 개봉할 때 제목은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대부분의 한국어판 외화 제목이 큰 웃음을 주는 것과 달리 이건 원작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담고 있어서 좋다. <동경대부>라는 한자 표현이나, <도쿄갓파더즈>보다는 우리에게 훨씬 직관적이다.

콘 사토시의 세계관이 낙관을 도려내고도 쿨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발랄한 이야기에서도 그 특징은 여전하다. 오히려 대책없는 낙관이 없는 편이 강한 긍정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 그런 긍정은 가지지 못한 사람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세상에 드러난다. 구조는 변하지 않되 개인이 성장하는 이야기 틀에서 개인의 성장에 집중해서 큰 감동을 만들어 낸다. 구조에 대한 비판은 그 구조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통해 오히려 묵직하게 복부를 후려친다.

콘 사토시가 남기고 간 명작들이 몇 개 안남아서 슬프다. 다음에는 <천년여우>다.

트럼프 개드립

From this day forward, it’s going to be ONLY America First! A–me—ri-ca– FIRST!

트럼프 취임연설 중

이걸 본 한 네덜란드 방송국이 심야 쇼에서 시작한 개드립. 전 세계가 한마음으로 개드립 물결에 참여하고 있다. 진짜 웃겨 죽는다. 소개한 블로그를 링크해 둔다.

이 모든것의 시작인 네덜란드 소개 영상: 

유툽에 가서 이어보기 해 놓으면 한 번에 내내 시청할 수 있다.

진짜 대박!

PAPRIKA

<Perfect Blue>에 이은 콘 사토시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기본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대책없는 낙관을 깔끔하게 도려낸 쿨한 세계를 멋지고 예쁘게 그린다. 그 속에서 발랄하고 극단적인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파국을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밀고나가면서 장르 영화의 빛도 발한다. 대체로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만, 그것은 결코 정반합에 따른 전진이 아니다. 그저 과잉에 대한 과잉의 맞대응으로 균형을 다시 회복한 것 뿐이다. 어떤 경우에 그 균형은 구조가 만들어낸 수많은 파국 중 하나만의 해결일 뿐이다. 문제를 만들어낸 것들은 변하지 않은 채로 그 세계 다른 어딘가에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성장한다. 개인의 작은 진전만이 그 커다란 파국을 겪은 대가다. 지금까지 본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특징들이다. 관점 자체가 내 취향에는 매력적이다.

영상을 보면 영화를 훨씬 뛰어넘는, 그 매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너의 이름은>의 경우 <라라랜드>처럼 사실적인 장면들에 기가막히게 상상력을 녹여 넣었다. 사실적인 장면들도 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각도, 화면 배치와 이동을 보여준다. 반면에 파프리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류로 보일만큼 찬란한 상상력을 화면 가득히 펼쳐놓는다. 거기에 이미지를 폭증시키는 음악까지 완벽하다. 강렬한 대상 이미지가 지배하는가 하면, 동선이 앞서 나서기도 하고, 음악이 흐름을 뒤덮다가, 결국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뒷통수를 친다. 영화의 백미나 다름없는 퍼레이드가 그렇다. 온갖 종교, 쾌락, 은밀하거나 은밀해서 왜곡된 욕망, 가지지 못한 것들이 정신없게 떠들썩한 산더미가 되어 퍼레이드 한다. 그 행렬을 만나면 인간은 주체할 수 없이 욕망 그자체로 변신하여 전체의 일부가 된다. 그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죽음만 건너면 바로 눈 앞의 천국이 나에게 오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괴상한 지옥의 현현이 된다. 은유도 아니고 직유도 아니고 세밀화가의 묘사나 다름 없는 장면이다. VR에 접속한 군집으로서 인류를, 아직 거기에 다다르지 않은 우리에게 설명하는 가장 현실적인 묘사로 봐야 하지 않을까. 매트릭스에 접속해서 재배되고 있는 인류를 묘사한다면 영화 매트릭스의 장면이 아니라 바로 이 파프리카의 행렬이어야 할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와는 결이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내 눈에는 격이 다른 천재로 보인다. 훨씬 강렬하고 폭발적이며 신랄하다. 멋지다.

이런 귀한 재능이 병마에 단명한 육체의 한계로 미처 만개하지 못한 것이 정말 안타깝다.

몇몇 인상적인 화면캡쳐들 모음

 

Marqui de Sade

제목과 상관없는 포스트.

그야말로 혹시나? 하는 기우일 뿐이지만, 생각난 김에 기록해 놓는다.

이 블로그는 사실 상 외부로 열려있는 블로그라기보다는, 개인의 일기장에 가깝다. 굳이 외부 오픈을 막아놓지 않았다뿐이지, 조회도 거의 없고, 쓰는 내용도 외부의 독자를 향한 것이라기 보다 글쓰기 연습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어쩌다 웹검색을 타고 들어오는 트래픽들이 간간히 있다. 일주일에 서너명 정도가 들어와서 한 번 읽고 나간다. 그정도.

그런데 얼마 전까지 재미있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사드 후작의 <미덕의 불운>에 대한 짧은 책 후기 포스트에 사람들이 구글 키워드 검색으로 종종 들어오는 것이다. 희하한 일이다. 어떤 키워드인지는 보이지 않지만, 제목이 ‘사드, 미덕의 불운’으로 되어 있고 태그에도 사드가 있으니 아마 ‘사드’를 키워드로 들어오는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때는 온 나라가 THAAD로 난리가 나던 때였다. 그때는 사람들이 사드에 관한 글을 미친듯이 찾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오는구나 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구글에 사드를 검색해봤다. 미국 구글, 한국 구글, NCR로 설정한 구글 등을 다 들어가봤다. 그런데 내가 쓴 포스트가 나오려면 몇 페이지를 건너가야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찾지 못했다. ‘사드 미덕의 불운’이라고 모든 단어를 쳐 넣어야 내 포스트가 첫페이지에 나온다. 뭔가 이상하다.

옛날에 네이버에서 근무할 때 하루에 유입되는 검색어 수를 살펴본 적이 있다. 검색 이용 건수야 셀수없이 많지만, 실제 입력되는 검색어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겨우 500여개의 개별 검색어가 하루에 입력되는 전체 검색 건 수의 90% 가량을 차지한다고 했다. 전국민이 거의 똑같은 검색어만 하루종일 주구장창 입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조금은 나아졌을지 모르겟다. 어쨌건 그래서 네이버와 구글은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다르다는 결론을 냈었다. 500여개 검색어면 중국 교포를 써서 하나하나 대응 페이지를 손으로 만들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검색 로직 따위… 구글이 가지는 중요성과는 천지 차이다. 그러면 이런 환경에서 사드 후작과 그의 작품을 검색하는 종자가 거의 2주에 한번씩 내 포스트에 들어올만큼 많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500여개는 거의 대부분 그날 화재에 오른 검색어들이거나 연예 쪽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증거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500여개 관심사로 하루가 갈무리되는 한국에서, 제대로 번역된 작품도 몇 개 안되는 사드 후작을, 조회수도 안나오는 블로그의 포스트를 찍어서 최소 2주에 한 번 들어온다는 건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다. 국정원이건 십알단이건 어디건 이슈가 되는 검색어 중심으로 어떤 내용들이 웹에 떠도는지 기계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 아닐까? 네이버야 쉽게 조절 가능할테지만, 구글의 경우에는 몇 페이지까지 나오는 것들 다 살펴봐라! 이런 명령에 따라 디벼보는 건 아닐까? 우습게도 박근혜 최순실 개판이 나기 시작하면서 사드 포스트에 대한 조회는 뚝 끊겼다. 미사일 사드에 대한 이슈도 잦아들었겠지만, 사드 후작에 대한 관심도 그 즈음에 같이 끊길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이명박 때부터 국정원을 위시하여 청와대까지 감청에 기반한 사찰이 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제 아비 곁에서 이런 협잡을 보면서 컸을 박근혜가 국정원을 그냥 내버려두었을리 없다. 감청이니 도청이니 하는 말들이 나온다. 말도 안되는 상상 같지만, 이미 말도 안되는 루머들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 상식을 압도한다. 분노보다도, 사드를 찾다가 내 포스트에서 잠시 교양(이라고 쓰고 변태라 읽는다)의 일격을 맞았을 그 분들에게 느끼는 동정이 앞선다.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다음 생에는 사람답게 살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미덕의 불운이 아니라 그 쌍둥이 소설인 <악덕의 번영>을 직접 살고 계신 분들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