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가을을 지난다.
그러나 여행은 없다.
책 읽을 시간은 점점 더 부족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한국어 출판된 책들을 사모았다. 대중적 장르 소설처럼 술술 쉽게 읽을 수 있어서 놀라고, 잘 짜여진 저패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이 손에 잡힐 듯한 통찰과 깊이, 떡밥과 수수께끼의 여백이 또 놀랍다.
책장에서 잠자던 책들이 눈에 살살 밟히다가 덥썩 덤빈다. 하나 하나 고를 때도 수많은 책 광고 속에서 내게 뛰어든 녀석들이다. 오래 방치해 두면 하나씩 나한테 튀어오르며 강짜를 부린다. 트루먼 카포티, 테드 창, 밀란 쿤데라, 그리고 물고기, 우주, 미술사에 대한 교양서들을 그렇게 읽는다. 문 앞의 야만인들도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고, 좌파 계열의 두꺼운 양장본들도 거실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론 하루키의 신작과 노벨상 수상자의 흥미진진한 소설들이 먼저 뛰어오긴 할테다.
생애 전환기, 직업 전환기
마흔을 넘어 시속 40킬로의 인생에 접어들었다. 나라에서 생애전환기라고 건강검진도 공짜로 해준다. 혹시 그 동안 눈이라도 멀었는데 운전하고 다니는 것 아니냐고 운전면허 적성검사도 도래한다. 결혼도 했고, 아기도 왔다.
새로운 사업도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열혈 기업가 정신도 부족한 터에 혼자 나서기는 어렵다. 마음 맞는 후배님과 함께 최신 트렌드에 올라타 달려나가는 인공지능 기술 기업과 연계한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팀장에서 이사로 갔다가 이제 파트너로 이직했다. 오랜만에 손끝이 아스라히 저리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오랜만에 찾아온 흥분과 스트레스, 업무량 폭증을 맞아 제법 얼얼하다.
어찌된 인생이 마흔 무렵부터 무섭게 변화하고 빠르게 움직이며 흥미진진하다. 좋다.
화려한 미혼의 식도락은 갔다.
그 대신 집밥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