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에 찬사를.

크게 벗어나거나 제 길을 만들만한 깜냥도 되지 않으면서, 나는 남들 다 하는 것들에 대한 낮추어봄과 남달리 하겠다는 심보가 제법 고약하다. 그런 맥락에서 누적된 선택의 합은 아직까지 그닥 좋은 성적이라 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자족할만은 하다.

뒤늦게 한 결혼과 아이갖기는 유별난 심보 덕분에 미뤄져 오던,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특별한 선물 같은 경험이다. 왜 남들 다 하는 것이라 우리도 당연히 할 수 있고, 심지어 더 잘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우리는 오롯히 보너스 같은 특별함만 누리면 될 줄 알았더랬다. 그러나 평범함은 정말 특별함을 품은 것이기도 했다.

세세한 힘든 과정을 여기에 기록할 수는 없다.

다만 모드 평범한 부모와 잘 자라주는 아기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보낸다는 것만 적어 둔다.

 

탄생부터 비범한 보름이가 8월 12일 9시 20분에 벼락같이 세상에 왔다.

임산부 배려석에서 시작한 생각

아내가 임신하고 생긴 버릇들이 있다. 전철을 탈 때마다 발동하는 버릇들은 출퇴근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역사에 들어서는 동선부터 플랫폼으로 가는 길, 갈아탈 때 이동하는 경로가 얼마나 비표준체 친화적인지를 살펴보게 되는 것이 첫번째다. (비표준체는… 장애인, 장애우, 교통약자 등등 관습적인 호칭부터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찾다보니 나온 이상한 조어들 중에 도저히 뭘 고를지 모르겠어서 선택한 단어다. 보험업계에서 건강보험을 한 번에 들지 못하고 나 금방 안죽는다고 변명해야 들어줄까말까 한 사람들을 부르는 용어가 비표준체다. 딱 적확한 용어 아닌가!) 배가 불러갈수록 나와 함께 발맞추어 걷는 속도가 느려지고, 계단을 오르며 내쉬는 숨이 힘들어지는 아내를 보고 생겨난 습관이다. 임산부에게도 이렇게 힘들진데, 휠체어가 필요한 사람에게 이동권이란 허황된 꿈일 뿐이다.

전철에 올라타서는 가장 먼저 핑크좌석의 상황을 살핀다. 제발 그 자리들이 비워져 있기를 애타게 바라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직) 아니다. 핑크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 임산부에게 자리를 비켜주는 경우는 출산 경험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아주머니들밖에 없다고 한다. 괴팍한 노인들이 앉은 경우야 그렇다 쳐도, 남자들이 앉아있는 경우도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내에게 물어보면 그야말로 우문현답이 나온다. “거기 앉을 생각을 하는 남자들은 이미 일어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족속들이다’라는 것이다. 앉자마자 이어폰을 켜고 눈을 감거나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묻는다는 게다. 젊은 여자들은 더 당당하다. 외면할 수 없을 정도의 배를 내밀고 그 앞에 서서 눈을 마주쳐도 소용 없는 부류가 젊은 여인들이라고 한다. 늙고 젊고를 떠나 남자가 자리르 비켜준 적은 8개월 동안 단 세 번이란다. 대낮에 영업을 다니는 것 같은 젋은 아저씨, 말쑥한 정장을 입고 한창 때의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백발의 노인, 그리고 부자가 같이 앉아있다가 아버지에게 떠밀려 잔뜩 볼에 불만을 머금고 일어난 중학생 아들. 내가 아내와 같이 전철에 탈 때면 핑크좌석 앞으로 가서 거의 시위를 해서 자리를 받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다.

출퇴근 시에 정말 가끔 눈에 띄는 임산부가 있으면 따라다니면서 보호해주고 싶다. 아내는 노산에 난산을 걱정해서 임신 전에 미리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마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삶에 더없는 축복의 시간이 다시 겪고 싶지 않을 고난의 시간으로 새겨졌을 것 같다. 바퀴벌래들처럼 우수수수 오가는 출퇴근 시간에 임산부를 위한 배려는 개인의 손익계산서에 담을 수 없는 비용일 뿐이다. 출퇴근 시간에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남들이 덜 밀칠 것 같은 공간에 숨어서 서 있는다. 배를 내밀었다가 더 위험한 경우를 겪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저 정말 작은 한 조각일 뿐이다. 결혼과 함께 시작된 셀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여자를 공격한다. 가까이에서는 여자가 아기를 낳고 키워야 한다는 아내 부모님의 압박부터, 무심코 재취업하면 되지 않냐는 나의 말까지 가족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나와 다름없이 사회인으로서 경력을 쌓아온 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은 감히 한 조각이나마 공감한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이다. 정말 최선을 다해 아내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문자 그대로 끔찍하게 적대적인 시공간이 사정없이 이빨을 들이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사회는 아기 낳는 여자를 격렬하게 혐오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여성을 공격할 수 없어 보인다. 당연히 여기는 관습과 무관심 몇 조각이 모이면 사회에 어느 누군가에겐 생존을 위협하는 힘이 되어버린다. 끔찍하다.

구글링하다가 눈에 띈 젊은 남성 블로거의 경험담과 주장… 연민이 들다가, 자신만만함과 근저에 깔린 논리가 짐작되어 참담함을 이길 수 없다. 배려는 의무가 아니라고 주워섬긴다. 선진국에서 임산부 배려석을 운영하는 경우가 있냐고 달겨든다. 내 돈 내고 내가 왜 그래야 하냐는 강변은 차라리 순진하다. 아직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둥, 배려석은 지정석이 아니라고 하며 자못 식자연 하는 태도도 이야기해볼만 하다. 왜 핑크 따위를 칠해서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재생산하느냐는 논점일탈도 약방의 감초라 뭐 괜찮다. 그러나 왜 임산부가 당당하게 요구하지 않느냐는 말에 이르면 강간당한 여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는 경찰과 판사가 떠올라 두려움까지 든다.

교통 약자석에 대한 패러디라고 하는 사진이다.8cb5d4841459112dacf0e1444c248b16edb3b1eded7bc7131b528902910cf220이건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하나같이 이 사회에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약자들 아닌가. 내 생각과 상관없이 저 그림은 그냥 이 사회의 병적인 증상이 수정처럼 맺혀 있는 증거물이다.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이 일반 교양대중이 쓸 수 없는 하위문화를 벗어나 우뚝 솟아 있는 증거물이다. 게다가 남성들의 성적 억압이 표출된 하이힐도 있지 않은가. 임포텐스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유사-페니스를 달아주는 느낌으로 하이힐 배려석을 저기에 가져다 놓는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조국은 없다고 했고,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고 했다. 예이츠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했었나, 노인을 돌보는 나라가 아니라고 했던가. 역사는 진보하는 게 맞을까? 약자를 위한 나라가 없음은 수백년 부르짖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여자에게서 태어나 전 세계 어디서든 노동자로 살며 결국에는 노인이 될 남성들이 ‘나라’를 만들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닐까. 임산부를 아내로 두고 곧 한 여성의 부모가 될 것이며 곧 노동력을 상실하는 노인이 될 나로서는 생존의 문제다. 누구에게 그렇지 않을까. 자신부터 돌아보면 좋겠다. 나의 생존이 저 의자들에 새겨진 사람들의 생존과 다르지 않다. 정말로 그렇다.

어느 피곤한 오후의 넋두리이다. 요가 갔던 아내가 전철에 편히 앉아서 집에 돌아갔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