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도미난스

8956607893_1[한국이 싫어서]에 이어서 장강명 소설을 연속으로 읽었다. 배명훈의 장르소설이 떠오르는 흥겨운 읽기였다. 배명훈의 잘 짜여진 플롯만큼이나 [호모 도미난스]의 이야기 골격은 괜찮은 편이다. 거기에 시점, 인물의 관점이 교차하면서 툭툭 끊기는 단락으로 들어서는 구성은 박진감을 준다.

책읽기가 무겁게만 느껴지는 사람들 , 한국의 소설가들이란 예술 운운하는 자아도취자밖에 없다고 실망하는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호모 도미난스],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8937473070_1.jpg응원하는 작가 장강명의 책. [한국이 싫어서]

어제 밤에 잠깐 읽다가 출근길에 놓지 못하고, 결국 점심시간에 속독해서 다 읽어버렸다. 중단편 소설이 가진 매력을 아낌없이 뿌려주는 책이다. 읽기 쉽고, 재미 있고, 통렬하기도 하고, 생각하게도 한다.

다큐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소설이라고 포장해서 내니 이것도 참 징후적이다. 변기를 내놓고 예술작품이라고 할 때는 고정관념을 부수는 예술적 효과라도 있을진데. 이거는 다큐를 허구로 받으며 위화감이 없다니 나름 예술적 효과 아닌가 싶다.

계속 이 분이 좋은 책들을 쓰면서 더욱 지평을 넓혀나갔으면 좋겠다.

끝까지 간다.

이 분의 뒤를 이어,

유다가 예수를 부정하듯이 본인을 부정하시던 분

예상한대로 최선을 다하고 계신다.

어떤놈이 들어서건 하는 짓거리들은 일관되다는 가설이 다시 한 번 입증되는 슬픈 순간이다.

이런게 어떻게 가능할까?

사회가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우리가 무뎌진 것이 원인 중에 하나일 것이고. 옛날 같으면 시위하다 누가 죽으면 열사가 되고 수십만이 모였다. 이제는 공공연한 부관참시를 해외토픽마냥 전시해도 당당하다. 누굴 뭐라고 하겠나. 다음번이 내가 아니기를 바랄밖에.

가수 이승환은 나라 윗분들이 저열하다고 말한다. 나라에 윗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저열한건 우리 시청자들이다.  경찰들이야 언제는 안그랬는가. 그들은 일제시대부터 일관될 뿐이다. 저열함도 느낄 새 없이 사라진 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영향력이다. 노조 탓하는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 다들 배가 불러서 그렇다는 말이 다시금 와닿는다.

읽은 책 업데이트

[고통에 반대하며], 프리모 레비

역사 속의 현실과 개인의 삶이 극적으로 빚어낸 보석같은 유산이 프리모 레비의 글들이다. 삶 자체가 역사고 증언이며 경종 같은 사람에게 그 개인적 이면은 어떨지 상상이 안된다. 이 책은 프리모 레비의 개인적인 모습을 일부 내보이는 에세이들이다. 그가 고난을 버텨냈던 이유를 찾으려는 것도 방법이겠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의 에세이같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깊고 넓은 개인을 발견하는 재미가 더 크다. 원제는 이탤리어로 [L’altrui mestiere]라고 한다. 영역본 제목은 [Other People’s Trades]. 다른 사람의 일, 또는 직업, 또는 멋지게 부제를 붙였듯이 ‘타자를 향한 시선’이다. 도대체 왜 ‘고통에 반대하며’라는 창조적인 제목을 갖다 붙였는지 이해가 안된다. 에코의 에세이마냥 “화학자가 다른 사람의 일 넘보는 방법” 정도도 괜찮을 것 같다. 표지 또한 제목만큼이나 생뚱맞다. 어느 글토막에서도 성녀 테레사가 버려진 아기를 보듬는 것 같은 장엄한 풍경은 없다. 게다가 고통에 반대한다니… 유쾌하고 지적이고 어린아이같은 호기심에 흥분한 노인이 풀어놓는 이야기 보따리 표지로는 최악이다. 전에 현대 화가의 그림을 표지로 쓴 책을 그대로 표절해서 이상한 제목을 붙인 책을 보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인문학 책을 만드는 분들이 좀 더 상상력이 풍부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그냥 돈 좀 더 주고 원작 표지를 준용하시던지.

[고무보트를 타고 상어 잡는법], 모르텐 스트뢰크스네스

시종일관 신나고 재미있다. 장르를 알 수 없는 글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소설 9 숟가락에 현실 1 숟가락을 섞어서 중심을 잡았다면, 이 책은 에세이, 여행기를 9 스푼 넣고, 꾸미기와 허구를 반 스푼씩 섞어서 맛을 냈다. 정보, 감상, 이야기가 섞여 들어와서 수용, 이해, 감동을 자아내는 흥미로운 책이다. 내게 그린란드 상어는 무엇이고, 함께 잡으러 다닐 친구는 누구고, 그 와중에 어떻게 삶을 이어가는지 생각하게 했다.

오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젠.

돈 계산 해보니 이제 일년에 몇 번 못갈 수 밖에 없다. 본격적인 긴축 재정 돌입 전에 결혼 선물로 약속받은 사케를 먹으러 전격 방문. 신나게 먹고 마셨다. 자주 못간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먹거리들@Bali

모든 면이 더할나위없이 훌륭했던 여행이지만, 음식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JIMBARAN

RIMBA, AYANA 리조트 음식들은 조식부터 식당들, 인룸 다이닝까지 모두 나무랄 데 없이 매우 훌륭했다. 태국, 인도 등 뭔가 길거리 음식이 더 맛있다고 유명한 곳들에서 느꼈던 것인데, 고급 식당에 가면 훨씬 더 맛있다. 인도네시아 음식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먹을 경우 그 맛이 결코 서구의 요리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야나 리조트 내 인도네시아 식당이 그런 경험을 주었다. 물론 경치가 90% 이상을 담당하는 Rock Bar의 경험은 나름 특별했다.

 

Wedding Diner @TRESNA CHAPEL DINNER VENUE

식사가 맛있는 결혼식이 있었던가. 기억에는 없다. 혹은 내 결혼식에서 먹는 밥은 다 맛있는건가? 이야기 들어보니 신랑신부는 결혼식 때 먹지도 못한다는데. 발리의 절벽에 차려진 끝내주는 테이블 때문인지 다들 맛있게 즐겼다.

 

@CANDIDASA

다이빙 캠프로 전환. 주저앉지 않으려고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순식간에 극과 극 체험이지만 나름 맛있고 훌륭한 음식들. 특히 난데없이 등장한 파인다이닝 빈센트와 피자 화덕에 혹해서 들어간 피자집은 깜짝 놀랄 수준이었다. 정말 한산하고 작은 해변 마을에도 괜찮은 먹을거리가 이렇게 많다니 감탄스럽다.

 

@SEMINYAK

발리가 왜 유럽인들로 들끓는 관광지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던 Seminyak. 서울보다 훨씬 높은 성공 확률로, 서울의 비싼 다이너에 절대 뒤지지 않는, 그러면서 훨씬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식도락이 있다. 세련된 소품이나 패션 쇼핑은 기본. 관광 도시가 어떤 매력이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커다란 몰이 아니라 개성있고 깔끔하고 수준높은 샾들의 향연.
Kultur라는 로컬 음식점은 많이 먹어봤던 동남아 음식의 완전 새로운 차원을 보여준다. 진짜다. 하다못해 소금뿌린 닭구이에도 뭔가 한 칼을 심는다. 불맛 제대로 나는 모닝글로리 볶음 말이 필요 없다. 세티모 시엘로라는 이탤리안 기반 식당도 충격적이었다. 음식들이 너무너무 훌륭해서 이틀 저녁을 다 갔다. 물론 좋은 식당들이 즐비안 세미냑에서 이틀씩 가는 건 어떤 식당이라도 과도한 애정이긴 했다. 둘째날 저녁은 훨씬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음식의 수준이 기본적으로 훌륭하고 항상 놀라게 하는 킥이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호텔 풀사이드 바에서 먹은 점심이며, 언제나 깔끔하고 다양한 조식이며 모두모두 훌륭했다.

읽은 책 업데이트

 

애브리맨, 필립 로스, 2006

휴먼스테인, 미국의 목가 등 대표작 중심으로 보고 있는 미국 작가 필립 로스의 소품. 과장이 1도 없는 건조하고 간결한 묘사. 묘사만으로 만들어가는 서사. 어느 장면이건 시공을 확장할 수 있는 통찰이 스며들어 있고, 결국 그려낸 인생 혹은 장면은 제목처럼 모든 사람의 것이다. 소설의 즐거움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깊은 울림을 주는 그런 책.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2016

역시 내가 좋아하는 후장사실주의자의 작품과 한국을 싫어하는(?)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김솔이라는 작가도 찾아봐야겠다. 심사평들을 보면 당선된 작품과 유사한 설정을 반복하면서 칼을 가는 중인 것 같다. 어떻게 갈고, 어떻게 베어가는지 지켜보고 싶은 작가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작가들의 작품에 선입견이 들듯이, 어떤 대학교을 나왔고 어디서 등단했는지도 선입견을 준다. 이 책에 작가 소개에는 나이는 있지만 대학이 없어서 조금은 더 나았다. 대체적으로 훌륭했고, 소재와 방식에서 넓어진 느낌이라 좋았다. 심사평들을 보니, 천편일률적인 칭찬이 아니라, 치열한 심사 과정이 풍겨나온 느낌이라 좋았다. 각자 자기의 취향을 무기 삼아 다툼을 일으킨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난다. 동료 작가의 어설픈 작가론보다 작가 본인의 변을 실은 것도 이상문학상보다 훨씬 낫다. 다만 각 작품마다 달려 있는 평론들을 읽어보면 우리나라 평론이 얼마나 조악하고 뒤쳐져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소설과 같이 있으니 그 열악함이 더 도드라진다. 이런 식으로 대중에 노출되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더 좋아지기를 기대한다. 평론도 등단하는 시스템을 가지다 보니… 상상력과 창의력, 주장과 논쟁이 사라진 죽도록 지겹고 정형화된, 그러면서 아무 감흥도 없는 그런 글이 되어버렸다. 곤충이 머리 가슴 배 있듯이 평론 쓰는 틀도 그렇게 고정적으로 보였다. 아주 거슬렸다. 그것 빼곤, 작품이건 뭐건 다 좋다. 이상문학상도 이런 젊은 감각을 좀 더 베껴대면 어떨까. 예를 들어 딱 그 표지부터라도.

부르키니 금지법 논란

최근 프랑스의 부르키니 금지법에 대한 기사나 칼럼들을 대충 지나치다가,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글이 있어서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수영복 전쟁: 부르키니와 라이시테 그리고 프랑스 공화주의 (슬로우뉴스)

함께 연작으로 게재된 두 편의 글도 흥미진진하다.

종교와 여성의 복장: 글자그대로 vs. 글에 담긴 정신

테러의 위협 vs. 욕조의 위협

.

.

..

.

.

.

.

.

.

.

프랑스에 막연한 동경을 가진 불문학도로서 최근 부르키니를 금지하겠다는 논란은 얼핏 이해하기 어렵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는 프랑스. 공화정체을 혁명을 통해 출산한 근대사회의 모태. 영미 제도권에 철학, 문학, 예술, 경제, 군사 전반에서 (미약하지만) 대항마 구실을 하고 있는 나라. 한국 사람들에게 유명한 소르본 대학은 그저 지역 순번에 따라 파리 제4대학일 뿐인 쿨한 나라. 그 대학들에 진학하기 위해 치르는 바깔로레아의 철학 문제를 놓고 온 국민이 토론에 빠져드는 나라. 게다가 철학 문제들의 수준이란… 우리에게는 도저히 같은 지구 상에 사는 존재들같지 않은 질문들일 뿐이다: 미학과 윤리와의 관계를 논하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꿈은 필요한가?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등등. 십대부터 이런 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독서와 교양을 쌓은 나라에서 이슬람을 억압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부르키니를 금지한다? 사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지경이다.

부르키니 금지법을 비판하는 글들은 직관적이다. 부르키니가 프랑스 안보에 위협이라는 주장을 인용하며 그 편협한 시각을 비웃는다. 부르키니를 입은 여인을 해변에서 강제로 벗게하는 사진은 시청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차이를 인정하고 자기 결정권을 지닌 개인을 지지한다는 윤리적 우위를 발판 삼아 온갖 준엄한 비판을 쏟아낸다. 비판을 넘어 비난과 조롱의 시도도 넘친다. 수녀들이 수녀복을 입고 해변에서 물장난 치는 한 장의 사진 아래 부르키니 금지를 비웃는 한 줄의 코멘트를 보자. 부르키니를 입은 여인에게 손가락질하는 프랑스 인이나, 폭탄을 숨긴 것 아니냐고 추궁하는 만평도 돌직구다.. 단순한 조롱에서부터 세계 석학들의 묵직한 비판까지, 다양한 계층과 의견들을 볼 때 부르키니 금지법 비판은 당연해보인다.

그러던 중에 글 처음에 언급한 포스트를 하나 읽게 되었다. 무식을 밝혀주는 글이다. 부르키니 금지는 사실 상 프랑스라는 국가의 뿌리와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 프랑스는 우리말로 세속주의라 번역되는, 종교와 정치의 철저한 분리 기반에서 생겨난 공화국이다. 종교에 휘둘리고 종교와 결탁하거나 경쟁하던 왕권, 봉건제를 한번에 혁파하면서 태어난 국가가 세속주의를 헌법의 1조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도 헌법을 보면 국민에게서 권력이 유래하는 민주 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고, 임시정부에 뿌리를 둔 시발점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최근의 미국처럼 헌법의 문자적 의의를 다시 강조해야 할 만큼 실상이 궤를 벗어나는 것도 현실이긴 하다. 우리나 미국이나 약자들은 다시 헌법책을 들고 저항할 지경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헌법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오래 전에 학교에서 니캅이나 부르카 등의 착용을 금지한다는 뉴스가 기억난다. 그 때에도 뭔가 명쾌하지 않은 느낌으로 뉴스를 봤다. 프랑스는 세속주의를 현실 법체계에 최대한 반영하여 공공연한 종교 상징을 공공 장소나 시설물에 전시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하고 있다고 한다. 긴 역사를 가진 건축물이라던지, 특정 종교의 성직자라던지 일부 예외 규정이 존재하기는 한다.성공적인 비난 중의 하나인 물놀이를 하는 수녀들 사진의 경우, 성직자에 한해서 종교적 표현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왜곡된 주장이다. 어쨌건 프랑스 법은 일관되게 세속주의를 실천해 왔으며, 그 영향력을 강화해 왔다. 이명박이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던지, 서울 시청 광장에 대형 십자가를 짊어진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한다던지 하는 행위는 프랑스인의 관점에서 불법인 것이다. 세속주의의 원칙에 더해 프랑스가 생각하는 진보의 정당성도 부르키니 금지의 한 축을 이룬다. 바깔로레아 철학 문제와 같은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지 ‘판단’이 필요한 영역에서 입장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다. 인류의 진보가 윤리적 판단 기준을 변화시킨다는 전제 하에, 부르키니에 대한 금지가 여성 인권을 확대라는 윤리적 실천이라 보는 것이다. 이 부분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몇몇 아프리카 부족들은 전통, 종교를 이유로 생활환경이 바뀐 현대에도 여성 할례를 행하고 있다. 이슬람 혹은 인도와 같은 회교 국가 일부에서는 여성을 부속물이나 재산처럼 취급하며, 명예 살인의 희생양으로 삼기도 한다. 더 극단으로 가보자.  부족 간 갈등 해결을 전쟁으로 해결해야 하는지, 전쟁에 이기면 몰살, 강간, 약탈로 끝을 맺는 것이 정당한지, 식인 풍습은 어떤지를 생각해 보면 인류의 진보가 수행해야 하는 윤리적 변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극단적인 문화 상대주의는 인류 전반에 공히 적용할 수 없고, 그 선을 긋는 것은 어떤 기준에 의한 선택이어야 하며, 그 기준을 인류의 진보라는 방향성에 놓겠다는 건 지극히 온당하고 고무적인 일이다. 결국 부르키니 금지에 대해 느껴지는 거부감은 기술적으로 볼 때 주당 30시간 노동을 한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보를 실천하는 수준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적인 현상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움직임은 프랑스의 예외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독일이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등 확산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단순히 프랑스의 부르키니 금지가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 여성 차별을 해방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도 현실 세계에 적용할 때에는 다양한 전술적인 선택들을 고려해야 한다. 법의 변화는 우리 모두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사회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할 때 많은 희생과 비용을 요구한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부분은, 법의 변화는 급진적이면 안되고, 변화의 방향을 섬세하게 반영하되, 변화를 현실로 뿌리내릴 수 있게 맨 뒤에서 사회를 아우르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이었다. 먼저 부르키니를 입는 여성들의 입장을 상상해야 한다. 계몽적인 교양 시민의 입장에서 부르키니를 입는 여성은 억압에 처해 있는 피해자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종교적인 영향력은 이성의 설득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개인의 행복은 이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종교에 충실한 이슬람 신자들은 삶을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둘째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로 반 이슬람 정서가 칼을 다듬고 있는 와중에,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자들의 부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대중을 파고든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비극을 낳았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진보를 진전시키는 한걸음 한걸음이 부르키니 금지처럼 소수의 의결로 간단히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되는 교훈이다.

결국 대의는 이해할만한 맥락이 있으나 조급하고 급진적이며 논란을 부르는 입법은 프랑스의 어떤 조바심을 말해주는 증상이다. 앞서 소개한 글의 저자는 프랑스적인 근본이 위협받고 있으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프랑스의 적응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말한다. 천천히 알맹이부터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공화국은 이제 없다는 것이다. 급격한 난민 유입, 이미 10%를 차지하는 프랑스 내 이슬람 인구는 부르키니 금지와 같은 법률들이 상당한 프랑스 국민을 적극적으로 차별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맞는 주장이지만 역시 첨예한 대결 구도에서 한 쪽을 선택하는 의견이라는 점에서 프랑스가 채택하기 어려운 답으로 보인다. 저명한 생명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뜨뜻미지근한 조언을 한다. 윤리적 선을 긋는 것은 필요하지만 예민하고 섬세한 일이고, 이것은 밀어부쳐서 달성하기 보다 감화를 통해 보듬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모두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노학자다운 진단과 처방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만들어 낸 물리적 조건 변화가 너무 빨라서, 문화적 감화에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실천하기 어려워 보인다.

처음 소개한 저자가 일상화된 테러리즘을 받아들이고 사는 법을 논의의 말미에 붙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프랑스의 조급증은 테러리즘의 공포가 지배하는 현 사회적 분위기가 낳은 미숙한 인식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차분한 대응보다 더 극단적이고 믿을만한 것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미국이나 다른 여타의 국가들처럼 노골적인 국수주의, 배타주의, 반이슬람 주의로 내달리지 않은 것은 프랑스적인 훌륭함이다. 그럼에도 부르키니 금지법은 전술을 바꿔야한다. 변화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떨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시기가 묘하게도 지카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적이 인류의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 소두증 영아의 사진이 주는 직관적인 두려움, 통제하기 어려운 모기라는 전염 매개체, 게다가 인류의 기본적인 본성인 섹스로까지 전파되는 전염경로까지, 지카는 무서운 위협으로 다가올 법도 하다. 그러나 인류는 훨씬 더 냉정하고 차분하게 공격에 대응하고 있다. 지카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은 올림픽을 치뤄냈고, 싱가폴에서는 변형되어 위험이 적다고는 하지만 지카가 토착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상어의 공격으로 죽는 사람의 수가 자판기가 넘어져서 깔려 죽는 사람보다 적고, 어쩌면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 도시의 삶 자체인 현실에서, 과장된 위협에 대한 대응은 보다 더 이성적이어야 한다. 테러리즘도 마찬가지다. 최근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본토에서 테러로 목숨을 잃을 확률보다 욕조에서 익사할 확률이 더 크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테러는 결국 심리전이다. 공포에 질린 과잉 대응은 오히려 테러리즘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 따위를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거나, 부르키니 금지 법안을 내걸고 정치적 어젠다를 파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피터 싱어와 같은 혜안을 실천하려면, 먼저 테러와 함께 사는 법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낼 수도 있겠다.

사족이지만 북한의 핵실험 이후 한국의 정치인들이 취하는 태도는 테러와의 전쟁을 천명한 부시가 명함도 못내밀 수준이다. 트럼프가 멕시코나 이슬람에 대해 내뱉은 망언들은 한국 수구 정치인들에게 한 수 지도를 받아야 할 유아적 수준으로 보일 정도다. 오랜 시간 동안 좌파를 말살해 온 효과가 이런 국면에 가장 돈값을 하게 된다. 진정한 가치를 배재해 온 어정쩡한 중도우파는 이런 류의 어젠다에 선택지가 별로 없다. ‘우리도 기본적으로 동의하는데… 뭐는 어떻고 뭐는 어떻고 등등 그래서 너네는 잘못이다.’  결국 궁색한 반박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궁색해 지는 순간 이미 판은 수구가 주도한다. 노골적인 퇴보로 달려가는 경주에서 머뭇거리는 개 따위가 통과할 결승선은 없다. 다른 방향에 먹이가 있다고 짖어댈 패기도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퇴보의 길로 모두 내달리지 않고 토론의 여지를 두며 방향을 찾는 프랑스에게 건투를 빌고 희망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