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 서은혜 (옮긴이)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5월
전쟁이건 기업이건 문화건, 세계와 맞짱 뜨는 레벨의 견고함이 일본 작가들에게서는 느껴진다. 세대의 특징일 수 있으나, 서구의 것을 끌어들여 일본 관점에서 세계를 파헤치는데 성공적이지만, 밖으로 뻗치는 인사이트 부족이 장점이자 단점.
한국의 현재를 위해, 미시마와 싸우는 오에를 응원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보면 이 사람이 정말 일본 사람인가 싶은 정도로 온전하게 68을 거쳐 히피를 회상할 수 있는 유럽 교양인이 미국에서 동시에 길러진 사람 같은 착각이 든다. 공각기동대와 같은 일본 만화는 세계, 인간에 대해 집요한 질문과 날카로운 혜안으로 가득차 있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 멤버들이 동경대에서 주고 받은 대화의 주제는 문자 그대로 시대와 세계를 달린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한걸까?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보면 어떤 매커니즘으로 그런 확장이 가능했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일본인 특유의 자기를 계속 돌아보는 세심함으로 사르트르, 엘리엇을 끌어들이고 – 특히 항상 번역을 언급하며 주체적인 ‘받아들임’을 되새기는 것도 특징적 -, 작가 개인의 현실과 경험을 소설 속에 겹쳐내면서 서구의 주제가 일본의 개인에게 녹아드는 생생함을 부여한다. 그리고 소설의 사건과 플롯들은 마치 서구와 일본의 섞임같이 현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줄다리기하며 ‘세계’를 이야기하고 주장하는데 쓰인다. 특히 일본의 구전 전승, 문학의 다양한 장르(연극, 일본 전통극, 하이쿠, 희곡, 영화 시나리오, 소설과 시)를 소설 속에서 액자나 소재로 주무르고, 각각의 소재들에 시간성을 부여하며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재주는 세공의 달인같은 일본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세계를 일본으로 끌어들여 세계에 대한 질문을 농밀하게 끓여내는 솜씨는 이루 말할 데 없이 훌륭하다. 읽으면서 계속 감탄과 전율을 자아내는 경지다. 다만 오에의 방식에 국한되는 양상일지, 아니면 세계를 소화하는 일본에 걸리는 부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안에서 밖으로 던지는 힘은 강렬하지 않다. 서구의 고전들이 세계에 던지는 강렬한 메시지들은 이 경우 소설 뒤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 상 의도적인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가르치거나 주장하기보다, 자기 이해의 과정을 보여주며 상대방을 깨치게 하는 전략으로도 보인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오에 수준의 작가가 꼰대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단단한 버팀목이라고 해도 좋다. (늙은 김지하를 보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미시마 문제’는 세계를 일본 속에서 재창조한 결과물이 얼마나 놀라운 개연성을 획득하는지 통렬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끝내 감추지 못하는 예언자적 욕망을 이미 소설 속에서 소름돋게 이루어낸 것 아닌가. 2005년 발표한 이 소설의 미시마 문제에서 자유로운 2015년 선진 국가가 있는지? 주네브 조직이 현재의 ISIL의 배후에 있다고 해도 아무런 어폐가 없다. 한국에서 등장하는 극우 단체의 준동, 서북청년단의 부활이 시게가 뿌려 놓은 씨앗을 기반으로 행동에 나선다면? 프랑스의 르뺑 일가가 이끄는 국민전선 또한 주네브가 그리는 큰 그림 속의 장기말이라면?
오에와 미시마의 싸움 아닌 싸움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유이고. 오에에게 응원을 보내는 이유다. 오에 겐자부로가 그리듯이, 그것은 세계의 문제고, 일본의 문제고,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족: 우리나라는 세계 속에서 어떤 수준일까? 우리는 해방 이후 역사가 딱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수준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빨갱이(혹은 미제) 타령에, 인민 학살과 내전에, 군사 독재 세력의 등장과 귀환에 매몰된 사이, 신자유주의의 충실한 톱니바퀴 구축에 매진하는 속국. 세계를 꿈꾸기는 커녕 공동체마저 분쇄된 빈곤한 문화, 동족 상잔의 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