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이야기

http://blog.daum.net/irepublic/7889249

위의 링크는 즐겨찾는 미디어에 발행된 한 블로거의 글이다. 제목은 “결혼을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블로거가 이 글을 저장한 카테고리 이름은 “젊고 지친 사람들에게”이다. 나이 마흔을 살짝 넘겨서 결혼하게 된 나로서는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제목이다. 단번에 클릭하고 들어와서 읽기 시작한다. 첫문단의 마지막 부분은 “결혼할지 말지 고민된다면 그냥 결혼하지 않는게 옳다고 본다”이다. 당혹 속에서 카테고리 이름을 보고 블로거 이름을 본다. 나쁜 습관이지만 평면적인 꼰대라 치부해버리고 다음 서핑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블로거의 이름이 머릿속에 남아서 다시 머물렀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내가 몇몇 글들을 직접 블로그까지 타고 들어와서 탐독했던 분의 블로그다. 번득이는 통찰에 놀라기도 하고 깊게 공감하는 글을 만나기도 했고, 이번 글처럼 마음 속이 당황스럽고 불편해서 어떤 사람인지 더 보고 싶어서 들어온 경우도 있었다. 다시 한 번 일면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나쁜 습관임을 깨닫는다.

그래도 첫 문단의 당혹스러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 개인 경험과 너무나 배치되는, 혹은 개인적으로 상처를 주는 확신이라서 그렇다. 넘어가도 될 것을 평면적인 비난을 한 내가 면목이 없어서 글을 더 읽어 본다. 다음 문단의 시작은 “결혼에는 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이다. 그리고 글쓴이 본인의 확신을 당당하게 내세운다. 어떤 근거를 필요로 하는 주장이 아니기 때문에 별 상관은 없지만 내가 주장하는대로 경험했다! 라는 식의 접근은 불편함만 가중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에는 거의 궤변에 가까운 언설이다. 흔들리지 않았냐고 묻는 것 자체가 확신이 결여된 것이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확신이 없으면 시작을 의심하게 된다는, 그래서 확신없이 시작하는 결혼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뒤이은 설명은 조금 더 나아간다. 확신은 합리적인 계산적인 것이 아니고, 약간은 미친짓이며, 인생의 주요 결정은 이런 확신이 있어야 실패로 좌절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전개. 계산하듯 결혼을 고민하는 사람들이나, 확신도 없으면서 끌려가듯이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일침으로 보인다.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은 두가지다. 하나는 글쓴이가 말하는 ‘확신’과 ‘실패의 극복’이라는 것이 독선과 정신승리와 뭐가 다를까 하는 의문이다. 자기 확신은 거의 항상 기만적이다. 피그말리온 설화까지 끌어다가 자기확신의 장점에 대해 신화를 만들지만, 현대 사회에서 성공을 목표로 놓는 모습에서 이미 얕은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자기 확신에 가득차서 사회에 악을 저지르고 응징을 받지만,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악역은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운명, 자기확신 이런 것들은 로맨틱 코메디에서 가볍게 다룰 때나 부담이 없다. 진지하게 인생의 큰 의사결정들에 대입하게 되면 이렇게 무섭게 다가온다. 두번째는 이 글이 위치한 카테고리와 함께 피해갈 수 없는 꼰대스러움에 대한 거부감이다. 자기 확신에 찬 단언, 그 근거로 본인의 경험과 신념, 하나의 주장으로 세상 진리를 꿰뚫을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것을 지혜라고 강변하는 모습, 그런 모습을 본인이 뿌듯해 하는 희열까지, 어느 하나 불편하지 않은 것이 없다. 첫번째 느낌이 결국 두 번째 생각의 결과를 가져왔다고도 생각한다. 결국 조건을 보고 혼인상대를 찾거나, 고민만 하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요즘 것들에 대한 불쾌감을 포스트 하나로 거창하게 포장한 것 뿐이다.

나는 최근 십수년간 결혼적령기를 거치는 사람들에게 운명이나 자기확신보다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핵가족으로 넘어오고 전 국민이 궁핍한 삶을 벗어나 처음으로 소비자 개인으로 살기 시작한 세대이면서, 저성장으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이전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대. 오로지 개인의 역량, 노력으로 경쟁 우위를 만드는 것이, 그래서 이것이 재산, 키, 몸무게와 같은 숫자로 환원해서 비교할 수 있는 시대의 사람들. 사회적 합의라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경험이 일천하여 극우 친일 군벌의 딸, 재벌의 개를 50% 넘게 지지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빨갱이라 부르던 사람을 80% 넘게 지지하는 그런 시대. 무리를 이뤄 산다는 것의 의미도 단단하지 않고, 개인의 삶이 가야 할 방향도 명확하지 않고, 결혼에 대한 정의나 의미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그런 흔들리는 시대다. 고민이 드는 건 지성의 근거이고 교양의 작용이다. 이런 시대에 결혼이라는 큰 의사결정에 자기확신을 가지고 뛰어드는 사람은 역대급 위인이거나 이미 젊어서 완성된 꼰대이지 않을까.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함께 사는 의미에 대한 교양 근육의 훈련이고, 물리적으로 삶을 나누는 방법에 대한 훈련이다. 부부관계, 남녀관계,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역할, 사회에서 가족을 바라보는 관점과 요구 모든것이 바뀌고 있다. 불안과 의구심은 당연하다. 꼰대들이 지금 해줘야 할 것은 자신들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방식을 찾도록 도와주거나, 최소한 방치하는 것이다. 젊은 이혼부부들은 양가 부모들이 주도하는 고난의 결혼식을 거쳐, 부모의 도움으로 마련한 거주지에서 매주 유산을 받기 위한 양가 방문을 하며 70년대 가족 개념에 자리잡으려다가 그만 폭발한 경우가 많다. 이들 중에 상당 부분은 운명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깨어지면 그건 확신이 아니었다는 건 중세에 마녀 사냥에서나 강변하던 궤변일 뿐이다. 믿음이 충실하고 진실되면 정화의 불 따위 거리낌이 없을 것이지 않은가.

나는 나와 아내가 같이 만들어갈 앞으로의 삶을 비교적 낙관한다. 비판적이고 비관적인 습성에 반해 이런 낙관에는 이유가 있다. 더 잘나거나 훈련을 잘 받았기 때문은 아니다. 고민하고 시기를 놓치고 상대를 놓치며 서로 허비한 시간이 꽤 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섣부른 자기확신에 빠져서 실패할 기회도 함께 놓쳤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주변의 실패와 성공을 보고 두 사람의 결합에서 더 중요한 것과 실패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을 고민할 시간과 기회도 얻었다. 결혼을 결심하며 내가 다짐한 것은 운명의 상대에게 던지는 피그말리온의 소망이 아니었다.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것, 계속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어느 무엇보다 우리 두 사람이 우선순위가 되도록 한 번 해보겠다는 것 정도였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작은 파고들을 넘기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운명 따위보다는 내가 다짐하는 노력에 결혼과 인생을 맡겨보려고 한다. 그래야 실패해도 반성하고 수정하고 다른 노력으로 이겨낼 수 있고, 적어도 똑같은 실수는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까지 쓰고 다시 읽어보니 내 개인 경험을 비난하는 것으로 오해한 한 블로그 글을 끌어다가 자근자근 씹고, 결국 내 경험에 근거한 주장을 똑같은 방식으로 늘어놓는, 그러면서 자기만족을 느끼는 꼰대짓을 하고 있다. 소심한 일기장이 꼰대의 일장 연설로 넘어가는 순간은 이토록 은밀하고 달콤한 쾌감이다. 이 글로 불쾌감을 느낄 누군가에게 미리 머리를 조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