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시조, 노마

일본

푸코의 철학이나 양자 물리학, 혹은 테드 창 같은 SF 소설들을 읽다보면 소칼의 지적 사기에 스스로 뛰어든 꼴이 될 때가 있다. 세계라는 실체는 전혀 물리적이지 않고, 총체적 진실은 그저 공허한 지향일 뿐이며, 사실 조차 하나의 개념으로 뭉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눈 앞의 만져지는 현실과 만나 뭔가가 붕괴하는 지점이 있다. 거창하지만, 쉽게 말하면, 50억명에게 50억개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의 구성 요소는 모두 맥락적인 사실과 진실과 오해로 만들어져 있다는 거다. 색즉시공 공즉시색까지 가며 정신이 모호해진다.

KOvsJP

“일본”이라고 많은 사람이 쓰고 이야기하지만 어떤 일본도 절대적이거나 총체적이지 않다. 백제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도 있고, 세계를 삼키려 들던 일본도 있다. 장인 정신과 엔지니어링을 결합하여 또 다시 세계를 거꾸로 들던 일본도 있고 극도의 신경증적인 사회 문화 속에서 수많은 불행을 만드는 일본도 있다. 선진국, 대국으로서 성숙하고 교양있는 대중을 품은 나라지만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보면 미국만도 못한 무식쟁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심지어 영토의 경계조차 의견이 갈린다.

요즘 일본과 한국의 갈등 양상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보면 재미있다. 다양한 일본과 한국 중에 어떤 결과 결이 부딪히고 있는 것인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찰나의 진실이나 인상을 붙잡고 어디에 활용하고 있는지. 그래서 결국 물리적인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렇게 세심히 살펴보면 훨씬 더 흥미진진할 것이다.

박원순씨 아들의 병역 문제를 가지고 인생을 건 남자가 한 매체(?)를 통해 주장하는 말을 보자. 아무리 우습고 어지러워도 잘 살펴보자. 수많은 사실과 진실 중에 일부를 끄집어 내어 아전인수를 뻔뻔하게 시도하는 모습이 자못 흥미롭다. 짐짓 객관적 뉴스인 양 하는 기사 형식은 덤이다.

‘박원순 아들 병역비리 의혹’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무죄주장

이제 쓰레기나 다름 없는 한국의 정치인이 주장하고 조선일보가 보도한, 거기에 자민당 극우가 공명하여 만들어내고 있는 주장을 보자. 드레퓌스 사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 깡패국가 에피소드만큼 핫한 것은 없지 않나 싶다. 뭔가 비슷한 얼개가 보이지 않는가?

조원진·조선일보·후지TV·아베의 수출규제 ‘환상 공조’

이 모든 사단의 원인 사건을 박근혜 정권이 3권 분립을 뭉개면서까지 막으려 했었다는 사실은 가슴 한 편을 찡하게 한다. 드레퓌스 사건 만큼이나 역사적 맥락을 극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소재가 아닐까? 얼마나 이야기가 풍부해질 수 있는가? 근현대사까지 갈 수 있는 저력을 보여준다.

[사법농단 2년] ②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조직이익 맞바꾼 사법부

일본의 극우 라인업이 날 세워서 만들고 있는 현실은 박근혜, 조원진, 조선일보가 김앤장, 외교부, 국정원 등과 손발을 맞추며 만들어내던 현실과 맥을 같이한다. 그 때는 그렇게 부드럽게 이어지던 현실이 이제 어설픈 깡패국가를 동원해서 부숴야할만큼 거칠고 성글어졌다.

[칼럼] 日경제보복, ‘친일3인방’에 책임 물어야

그럼 이제는 무얼 어떻게? 청와대가 외교적으로 만들어내는 Frame과 적절히 들고 일어나는 시민사회 모습은 또 다른 한국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그래도 어느 경우에나 저 일본도 일부일 뿐이고 지금 이 한국도 지금 떠오른 한 국면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애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부딪혀오는 일본의 찌질함과 비열함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전체도 아니다. 지금 장렬하게 보이는 우리의 모습은 갑자기 등장한 정권 때문만은 아니다. 그게 한국이다. 그러나 지금 이 비열한 일본과 똥꼬를 맞춘 나라도 우리 한국이다.

어제의 한일보다 더 나은 한일로 이어붙이는 고급진 시도가 깨어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발하기를 기대해 본다.


스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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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인스타그램. 자알~ 찍었다. ^^

정말 몇년만에 조선호텔 스시조에 큰 돈 쓰러 갔다. 아내 생일이 다가오는 걸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요한 일들이 쏟아지는지라 짧은 시간에 강한 임팩트를 내는 파티가 필요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 참에 몇년동안 마음 속에만 고이 모셔두던 스시조로 내달리기로 했다. 이게 얼마만이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토요일 점심 카운터 자리를 예약했다. 다 찼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크다. 그런데 1부, 2부로 운영하는데 어느 시간대를 택하겠냐고 한다. 에? 주말이면 2부 3부 운영까지 한다는 그 호텔 부페 식당도 아니고, 스시조 카운터가 2부제? 손님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 1부에 남았다는 2석을 예약했다. 인당 20만원씩은 각오해야 하는, 그것도 요리사 바로 앞에 나란히 앉아서 먹는 카운터 석에 2부제를 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이 온다니, 세상 내 월급 빼고 다 오르는게 사실인가보다 했다.

당일 출발 직전에 예약 확인 전화가 왔다. 아침부터 딸애를 밥 먹이고 어머니께 넘기는 준비 시키느라 준비가 조금 늦었다. 11시 30분부터 1부가 시작하고 1시 20분까지 마쳐야 한다고 하길래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조금 늦는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무려 정시에 동시 시작을 해야 해서 늦을 거면 2부에 캔슬된 자리로 옮겨주겠다고 한다. 정시 시작? 카운터에서 나란히 8~10명이 앉아서 똑같은 순서로 초밥먹기 대회라도 벌이는 건가? 귀를 의심했다. 조금 늦어도 되지 않느냐고 물어봤지만 완강하다. 몇년만에 가는 게 죄인이라 그런지 요즘에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마음이 캄캄해진다. 기십만원 쓸 판인데 개운해야하는데 말이다.

술을 마셔야 하니 택시타고 총총거리고 출발한다. 늦지 않으려고 아내는 자기 생일상인데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나선다. 도착해서 20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기분좋은 두근거림으로 바뀐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는 특별한 곳에 가는 기분을 더욱 끌어올린다. 저런. 아직 카운터 준비가 안되었으니 잠시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다. 11시 30분 스시먹기대회가 현실로 성큼 다가온다. 옆을 보니 우리 같은 선수 커플들이 두런두런 하고 있다.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좋다.

짜잔! 아니 그런데! 돈생기면 가까운 스시효만 다니던 몇년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뀐 모양이다. 아직도 안효주씨가 스시를 놓지 않았고, 그 밑에서 형님형님 하시던 분이 서초점 카운터를 풀타임으로 하고 계신데, 스시조 카운터에는 젊디 젊다 못해 파르스름할만큼 활기찬 셰프들이 반겨준다. 스시먹기대회에 함께 참전한 전우 커플들을 슬쩍 스캔해 본 아내는 또 다른 소식을 알려준다. 우리가 가장 늙었다고 한다. 압도적으로. 꼰대 자격지심과 심한 이질감이 동시에 펄떡인다.

몇년 전에 방문하고 처음이라고 아는 척을 하려니, 담당한 셰프가 많이 바뀌었다고 단언한다. 큐베이 스시와 제휴를 어디 뭔가로 바꿨다고 하는데, 일본 내 스시야 순위에 관심 없는 나로서는 그 의미를 알 방법이 없다. 일단 밥부터 다르단다. 적초를 썼다고 한다. 에도마에 스시 운운 한다. 나중에 아내와 이야기해보니, 이 때에 이미 둘 다 속으로 마음이 덜컹 했었다.

요이~ 땅! 스시먹기대회가 시작됐다. 우리 부부 오른 쪽의 마지막 2개 자리 선수들은 아직 입장 안했으나, 애초에 완강하게 공지한대로 세 명의 셰프가 일정한 속도로 음식을 내기 시작한다. 첫 접시는 성게 껍데기에 담은 성게, 콩소메, 젤리 따위를 섞은 전채요리다. 요즘 성게 달고 맛있다. 거기에 콩소메에 젤리, 크림 종류까지 얹었으니 깊게 달고 맛있다. 뭐 좋다. 달고 맛있으면 좋지 않나. 전복과 게우 소스 당연히 훌륭하고.

스시를 시작한다. 손 닦는 물티슈를 가져다 놓고 선포한다. 아마 변화한 시스템에 대한 공지인 것 같다.

  1. 우리 스시는 절대 젓가락을 쓰지 마시고 손으로 드시고 휴지에 닦으시면 됩니다. 그게 시스템입니다. 원래 스시는 손으로 드시는 겁니다.
  2. 가장 최적의 소스나 향신료로 간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찍거나 추가하지 마시고 그대로 드시면 됩니다.
  3. 스시는 만든 직후 드시는 게 제일 좋습니다. 첫 스시는 제 손에서 직접 가져다가 드시면 됩니다. 바로 가져가세요.

난 원래 스시를 주로 손으로 먹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젓가락질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내 수준으로는 스시를 뒤집어 생선에 필요한 만큼 간장을 딱 맞게 적실 수가 없다. 서투르게 하다가 스시의 밥을 간장에 푹 찍으면 그야말로 아까운 한 피스를 날리고 만다. 밥이 부스러져 떨어지기라도 하면 주접스레 밥을 주워먹어야 한다. 제일 안좋은 것은 네타를 떨구고 망연자실할 때다. 아주 불쌍해 보이면 한 개 더 만들어 준다. 하지만 창피하기 이를 데 없다. 이미 간장을 바르거나 소스가 덮고 있는 스시는 미련없이 젓가락으로 잡는다. 뭘 찍어먹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흰살 생선을 잡고 닦은 휴지와 줄줄 흐르는 간장을 닦은 휴지는 처참하게 다르다. 손 닦는 수건을 매번 갈아주는 시스템은 아니었다, 참고로.

2번은 뭐 좋다. 요즘에는 점점 더 많이 그렇게들 내는 것 같다. 게다가 난 간장 매니아는 아니다. 비싼 요리는 원래 요리사의 비전을 손님에게 전달해야 하는 법인데, 맘대로 망치게 두면 되나. 내 비전을 망치지 마시오. 아주 동의한다.

3번은 솔직히 거북했다. 두툼한 남자 손에서 줄줄 간장이 흐르는 스시를 넘겨받아 바로 입에 넣기에 뭔가 거슬리는게 있다. 게다가 주로 무너질 것 같은 스시, 도마를 적실 것 같은 스시를 그렇게 준다. 무너질거면 쥐지를 말던지 김에 말던지 할 것이지… 아 물론, 꺄아! 하면서 즐겁게 받아서 인사까지 꾸벅 하고 먹자마자 환희의 표정을 짓는다. 카운터에서 요리사 거슬려서 좋을 게 정말 1도 없다. 그 정도 순리를 따를 나이는 먹었다는데 자부심이 든다.

나도 젊지만 나보다 더 싱그럽게 젊은 손님들은 핸드폰으로 사진 찍기를 거르지 않는다. 우리 셰프는 재료도 들고 나와 보여주고, 손에 쥔 모습을 찍으라, 내 얼굴은 초상권 없다, 여자분은 드시고 남자분이 찍으시라 사진 찍는 커플에게 기꺼이 요리와 서비스를 내준다. 아, 여기는 손으로 먹는 시스템이었다.

재료는 확실히 훌륭하다. 우니야 계절도 있겠지만 정말 신선한 향과 달콤함이 극진하다. 참돔은 앞으로 도미 회는 다른데서 먹기 힘들게 만들 정도로 훌륭하다. 흰살 생선이나 조개, 오징어들은 종종 가는 스시효에 비교해도 완전히 한 수준 위다. 기본적인 찜, 굽기 기술이야 역시 훌륭하다. 새로운 시도도 좋고 비주얼도 훌륭하다.

변화했다고 단언한 부분은 스시 자체다. 적초를 쓴 샤리는 우려했던대로 풍부한 초 맛보다는 단맛으로 달려갔다. 네타는 재료의 높은 수준을 무색케 할 정도로 조리로 밀어부친다. 조미로 범벅한 네타와 달콤한 적초 샤리는 큼직한 피스에서 나름 조화를 이룬다. 혹여 배불러서 밥 양을 조절하지 마시라. 네타 조미를 밥 양에 따라 조절해주지 않아서 밸런스가 깨지고 만다. 배불러도 주는대로 먹을 것. 스시효에서 게살에 새우에 성게를 얹어서 약간 달콤한 간장을 발라주는 게 있는데, 장난스런 웃음을 가득 품고 이런 것도 한 번 먹어봐! 달콤하지? 하는 유머로 활용한다. 여기는 그 정도는 애교였다. 누군가에게는 트렌디한 훌륭한 스시겠지만, 벌써 꼰대로 접어드는 젊은 40대 중반 입장에서 재료를 죽이는 과한 조리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대부분 달다. 내 경우는 코가 맹맹한 단맛을 아주 싫어하는데, 간장 조린 소스가 다른 단맛 내는 재료들과 엮여서 그런 맛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스시조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숯불에서 구운 부분을 아래로 놓고, 뭘 바르고 또 올리고 달콤한 간장과 소금, 다시 와사비로 마무리한 오도로! 훌륭한 요리 한 접시를 대접받은 기분이지만, 오도로는 어디갔나 싶었다. 무슨 김밥 마냥 속을 잔뜩 넣고 토치로 굽고 또다시 김으로 손잡이를 만든 고등어 누름초밥! 내 사랑해마지않는 시메사바 맛은 정녕 1도 느껴지지 않은 달콤 김밥이었다.

초희-고등어
이게 진짜 고등어 초밥 | 출처: 어떤 분 블로그

등푸른 생선과 조개류에 대한 접근은 재료의 본질 파괴나 다름 없이 보였다. 한 번 가고 가지 않는 회사 앞 양고기 집이 있다. 정말 양 냄새가 안난다. 워낙 어린 양을 쓰고 잘 마리네이드해서 먹기 좋게 구워준다. 왜 양을 먹는지 모르겠다. 육향이 들지도 않은 고기는 병아리 후라이드 말고 더 먹기 싫다. 이 곳의 고등어와 청어가 딱 그런 처지에 있다. 스시초희 시절의 박경재씨가 잘라준 고등어 초밥은 아직 꿈에 나온다. 너무 맛있다고 하나만 제발 더 달라고 하니까 종이에 싸놓은 한 줄을 새로 꺼내 내 한 피스를 중간에서 잘라주고 나머지를 치워버리던 모습도 생각난다. “고등어는 제가 국내에서 몇 번째에 든다고 자부합니다.” 라던 폼나던 한마디는 덤이다. 보존을 위한 초절임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 수준이었다. 고등어로 태어났으면 고등어로 죽게 해줘야하지 않겠나. 재료에 대한 예의다.

스시먹기대회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카운터의 오마카세는 호텔 결혼식 테이블 디너가 아니다. 손님 자리만 확인되면 전체 일정에 따라 수백 접시의 음식을 내오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거다. 원래 많이 씹고 늦게 먹는 편이고, 스시같은 끝내주는 음식을 술도 없이 먹을 수 없어서 종종 코스 중간에 주저앉기는 일쑤다. 다들 같은 피스를 똑같은 방식으로 서브되면 덥썩 먹으라는 방식대로 먹는 것은 좋다. 그런데 각자 속도가 있기 마련인데, 겨우 그 정도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결혼식장도 아니고 주방과 테이블의 거리가 먼 룸에서 진행하는 코스 요리도 아닌데 말이다. 코 앞에서 아직 멸치 안주에 사케를 홀짝이는 것을 보면서도 다음 코스로 간다. 게다가 다음 코스는 두툼한 손에서 바로 가져가야하는 스시다. 유후.  나오는 스시도 블로그와 한 톨도 다르지 않다. 내 옆자리 손님들과도 한 피스도 다르지 않다. 심지어 코멘트도 똑같다. 억대 히노끼 다이 위에서 오마카세 흉내내는 것 같다. 말이 좀 심했다.

다행히 우리 옆 테이블 선수 두 분이 십여분 이상 늦게 입장하는 바람에 그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내가 잠시 속도를 늦춰줄 것을 청하자, 기다렸다는듯이 늦은 팀의 스시를 빠른 속도로 낸다. 1주년이라는 젊은 커플은 놀라운 속도로 사진 찍고 먹고 속삭이고 셰프와 농을 친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코스의 끝에서 내가 추가로 청한 아지를 같이 얻어 먹었으니 그걸로 부담을 덜기로 했다. 물론 이미 계란까지 다 먹은 다음으로 보이긴 했지만.

아… 너무 투덜댔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돈생기면 매일 가야지 했던 곳 하나가 날아간 심정에 비할바는 아니다. 안타깝다.

물론 간만에 맛있게 잘 먹었다. 누가 젊고 트렌디한 셰프가 즐겁게 내놓는 달콤 풍미 가득한 스시 오마카세를 싫어하겠나? 줄이라도 서서 1부, 2부 들어가고 볼 일이다.


노마

214728707집 책장에는 장 지글러가 쓴 책이 두 권 있다. 하나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또 다른 하나는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1999년 초판에 2007년 한국 소개가 첫번째 책이고, 두번째는 2007년 초판에 한국에는 2018년에 들어왔다. 첫 책은 자기 자식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고 두번째는 손녀와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나란히 꽂혀 있는 책 두 권의 모습만으로도 그들의 10년과 우리의 10년을 조망할만 하다. 그러나 최근 책에서 손녀와 주고 받은 이야기 중 노마(NOMA)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개인화된 검색 서비스에서 NOMA를 찾아보면 어떨까. 내 경우에는 덴마크의 유명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인 노마가 가장 먼저 뜬다.

하지만 장 지글러의 손녀는 NOMA라고 했을 때 영양결핍과 위생 문제로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지글러는 그런 사진들을 부록으로 첨부했던 보고서가 읽히지 않은 슬픈 사실을 이야기한다. 어느 신중한 친구의 충고 이후로 그는 더 이상 NOMA에 걸린 소년 소녀들의 사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각각 노마의 위키 페이지와 충격적인 사진 대비는, 아래는 감춰두겠다. 당신은 노마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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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설날 즈음, 읽은 책 업데이트

마지막 포스트를 보니 작년 9월이다. 포스트를 읽어보니, 역시나 쓸데없는 수사와 현학이 부끄럽고, 뜻도 제대로 읽히지 않아 민망스럽다. 쓰는 연습도 없이 그저 시간이 가며 늘기를 바라는 못된 심보가 새삼스럽다. 어쨌건 오랜만에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성의 없는 업데이트라도 적어 놓는다. 이런 끄적임이라도 해야 다시 돌아와서 나중에 돌아볼 거리라도 쓰게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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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독백, 읽은 책들

식상한 표현들보다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려워지는 것이 나이를 먹는 증거인가보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40대라는 정체성에 묻어 있는 온갖 것들, 가족에 대한 클리셰 등등. 전에는 집단의 변명처럼 들리던 말들이 이제는 막 내 속에서 끄집어 낸 것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잠시잠깐 신경을 안쓰니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쳐다보는 시간이 뒷목을 서늘하게 감싸쥐도록 맹위를 떨치고 있고,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은 쌓여만 가고, 가사 분담의 큰소리도 허언이 되어 가고 있다. 이 또한 ‘먹고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아닌가 하고 주장하고 싶지만, 면이 서지 않음은 어쩔 수 없다.

작은 습관 하나씩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내가 40대까지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깨달은 아주 작은 무기 하나다. 블로그에 독백을 적는 것으로 의미 없는 웹서핑 시간을 바꾸는 일을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역시 쪼그라든 자의식에 먼저 던져줄 미끼는 당연히 책이다.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 사모은 책들을 읽어가고 있다. 부담스럽지 않은 페이지 수도 좋고, 소설마다 세계관이 확연하게 다르기에 한 작가의 책을 계속해서 읽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완전히 내 스타일이라고 달려들기는 조금 어렵다. 책만 쓰고 산 사람이고, 일본계 영국인의 정체성도 힘이 없는 상황에서 문학적 성취도 살짝 노벨상을 타기에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는 민족성같은 자의적이고 때로는 악의적인 관념보다 음식 문화가 차라리 더 근대부터 형성된 민족 관념을 설명하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근본도 별로 없는 먹거리들을 가지고 가장 멋진 음식 문화를 만들어낸 일본의 맛을 다룬 에세이를 지나치기 어렵다. 전 세계에 꼰대질하고 다니는 영국인이 읽어내는 일본의 풍경은 우리 눈에 전여옥만도 못한 수준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는 익살스럽게 포장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일본에 대한 서구인의 이미지들을 애용한다: 작고, 조용하고, 쓸모 많고, 가업에 집착하는 장인이고 등등. 물론 음식 이야기만 놓고 생각하면 두부, 국수 등 저자가 언급한 음식들을 먹으러 일본에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훌륭한 책이다.

서구인들의 오만하다못해 유쾌한 세계 논평은 오리엔탈리즘에 그치지 않고 세계사를 하나의 우스운 농담으로까지 만들어버린다. 딱 그 정도의 책 한 권이 있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그라는 이름을 기억해 놓고, 앞으로 내내 걸러야겠다. 출판사의 제목짓기와 마케팅 역량이 제법인 것 같다.

편의점 인간과 살인 출산은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들이다. 발칙한 상상만으로 소설이 되긴 어렵다. 몇몇 단편은 그래서 실패한다. 그러나 이 사람의 소설은 설정의 힘에 이야기의 깊이를 더한 문학의 자격이 넘친다. 일본 문단의 규모와 생산성을 다시금 경탄하게 하는 소설들이다.

일본 소설을 이야기하는 한국인 입장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빼놓을 수 없다. 대학교 시절 충격과 경탄으로 접한 하루키의 소설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반드시 읽어야하는 책이 되었다. 한 번 인정받으면 절대다수가 주류 취향을 공유하는 기이한 모습이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하루키의 신작에 저항하기는 어렵다. 끝간데 없는 상상력과 가공할 세계관 제조 능력으로 지어놓은 거대한 공간에 용두사미 이야기를 펼치던 시기를 조금씩 벗어나는가 싶다. 노벨상을 목표로 하며 반전이나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적 언급을 한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마치 경상도 노인이 대학생 간첩 찾는 것 같은 괴이한 시각이라 본다. 뭐, 노벨상 타려면 인생으로 증명해야 하는 실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 좀 더 적극적으로 힘내기를 빈다.

다시 일본의 장르 소설로 돌아가보면, 워낙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다. 노골적인 장르 문학이라 젠채하는 선비 입장에서 그 동안 완전히 방치했던 분야가 추리, 공포물이다. 사실 무협지와 같이 한 번 잡으면 놓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컸다. 단편집으로 샀고, 게다가 e book으로 사서 무협지 함정에 빠지는 걸 피했다. 소설은? 당연히 훌륭하다.

장르 중에도 일부 발은 담갔으나 깊이 들어가보지 않은 곳이 SF이다. 80년대, 혹은 약간 중2병스러운 제목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라는 책은 그 유명한 테드 창의 중편정도 되는 길이의 소설이다. 컨택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테드 창의 나와 당신의 이야기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서 이 사람의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SF 장르에서 아이작 아시모프 수준의 파장을 일으켰고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훌륭한 분이다. 더 많이 썼으면 하고 기도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SF 팬들의 대열에 동참한다.

오바마가 2017년인지 2016년인지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는 운명과 분노. 영어 제목으로는 Fate and Fury가 되어 제법 운이 맞는데 번역하니 이 맛이 없어진다. 조금의 의역을 허용하여 운명의 이면(裏面) 정도면 어떨까 싶다. 약간은 작위적이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지만 기본 설계가 워낙 탄탄하고 장면과 국면을 뒤섞은 묘사가 이끌어가는 서사가 모든 허술함을 매워간다. 두 단어의 제목, 두 장으로 나뉜 소설, 운명과 이면, 사랑과 분노, 가족과 친구 등등 잘 계획한 구조가 주는 울림을 남김없이 즐길 수가 있다. 정말 잘 쓴 소설이다. 이 작가의 책이 더 궁금해서 지금은 아르카디아를 사서 읽는 중이다.

즐거운 소설 읽기는 재미보장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잠으로 이어진다. 무협지같이 빨려드는 이야기와 상상력은 이 작가의 특기다. 너무 큰 욕심을 내지 않고 만들어낸 세계에서 현실감을 살짝 비틀고 그 지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직조한다. 당연히 강추다.

글쓰는 솜씨가 일정 수준에 다다른 한국 작가로 김영하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김영하를 가리는 현대문학상 소설집도 있다. 한 때 장강명 등이 한국문학의 영역을 넓히고 새롭게 하는 모습에 기대가 컸는데, 김영하와 같이 새로운 주류를 형성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 다만 TV에서 셀럽 소설가를 개척하는 모습이 겹치며 기존 작품들보다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논픽션으로 록산느 게이의 페미니스트 고백록인 헝거, 네덜란드 저널리스트가 영국 가디언 협업으로 영국 금융가를 파고들어 뱅커의 세계를 탐사한 상어와 헤엄치기가 있다. 헝거는 반드시 세상에 나와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혐오에 빠진 여성들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페미니즘은 진지해야 한다. 세상의 절반이 차별당하고 있다는 관점보다는 여성이라는 조건을 더하면 안그래도 심각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더욱 거세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키가 190 넘고 키보다 몸무게 숫자가 더 많이 나오는 흑인 여자, 그것도 타히티 이민자 출신, 그리고 강간 생존자. 여성이라는 조건이 그 모든 소수자 지위에서 오는 차별과 폭력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 페미니즘이 모든 해방의 첫걸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물만난 고기같이 신나서 본인의 부족함을 더욱 만천하에 알리고 다니는 정희진이 서두에서 추천사를 쓴 것이 옥의 티일 것이다.

시카고 학파의 네오콘들이 제3세계를 어떻게 망치는지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부터 시작해서 문 앞의 야만인들과 같이 금융계의 전설적인 기록물들을 지나 1997년과 2008년 금융위기의 이면을 파헤친 수많은 논픽션과 창작물들은 내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다. 99% 시위가 있던 뉴욕에서 뱅커들에게 야유를 보내기 위해 모인 시민들에 대한 뱅커들의 조롱섞인 웃긴 이야기가 있다. 아침부터 데모하러 나왔는데 이미 모두 출근해 있고, 아무리 기다려도 퇴근을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모두들 그 정도 벌어도 된다고 납득하고 집에 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같이 승자들의 삶 1분 1초, 1센티, 1평을 갈구하는 99%가 아닌 이상, 금융계 장벽 너머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금융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인 보통 사람들을 위해 런던 씨티의 탐험 안내서와 같은 책이 상어와 헤엄치기이다. 월스트리트와 뉴욕의 아버지뻘인 씨티와 런던을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아카데미 전문가들의 식견은 종종 대중 교양서를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더 쉬운 방식으로 흘러들어온다. 일부 의사, 변호사, 건축가나 그냥 ‘교수’들이 세상에 꼰대질하느라 써댄 책들을 피하는 법만 익히면 생각보다 유능한 이야기꾼들이 자신들의 전문 영역을 맛있게 요리해다가 가져다주는 상찬을 즐길 수가 있다. (첨언하자면 가장 피해야 할 사람들은 의사다. 그들은 상아탑도 아니고 그냥 단힌 세계인 작은 병원과 의료계 안에서 자아를 완성한 치들이기 때문에 우리 세상에 대해 해 줄 말이 없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에서 ‘도시’의 의미를 잃어버린 게토를 다시금 깨닫게 되고, GDP는 틀렸다를 통해서 시카고를 극복할 수 있는 틈새를 목격한다. 그리고 스탠리 밀그램의 겁나는 실험은 인간이 윤리를 논하고 나누어야 한다는 필연을 이야기해준다.

틈틈히 읽은 책들 중에 정리할만한 것들은 이 정도이다.  책이건, 회사건, 개인사건 좀 더 생산적인 되새김질이 될 수 있는 독백을 다시 시작해본다.

 

 

 

계절, 독서, 인생, 식도락 그리고 가족

계절은 가을을 지난다.

그러나 여행은 없다.

 

책 읽을 시간은 점점 더 부족하다.

가즈오 이시구로 한국어 출판된 책들을 사모았다. 대중적 장르 소설처럼 술술 쉽게 읽을 수 있어서 놀라고, 잘 짜여진 저패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이 손에 잡힐 듯한 통찰과 깊이, 떡밥과 수수께끼의 여백이 또 놀랍다.

책장에서 잠자던 책들이 눈에 살살 밟히다가 덥썩 덤빈다. 하나 하나 고를 때도 수많은 책 광고 속에서 내게 뛰어든 녀석들이다. 오래 방치해 두면 하나씩 나한테 튀어오르며 강짜를 부린다. 트루먼 카포티, 테드 창, 밀란 쿤데라, 그리고 물고기, 우주, 미술사에 대한 교양서들을 그렇게 읽는다. 문 앞의 야만인들도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고, 좌파 계열의 두꺼운 양장본들도 거실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론 하루키의 신작과 노벨상 수상자의 흥미진진한 소설들이 먼저 뛰어오긴 할테다.

 

생애 전환기, 직업 전환기

마흔을 넘어 시속 40킬로의 인생에 접어들었다. 나라에서 생애전환기라고 건강검진도 공짜로 해준다. 혹시 그 동안 눈이라도 멀었는데 운전하고 다니는 것 아니냐고 운전면허 적성검사도 도래한다. 결혼도 했고, 아기도 왔다.

새로운 사업도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열혈 기업가 정신도 부족한 터에 혼자 나서기는 어렵다. 마음 맞는 후배님과 함께 최신 트렌드에 올라타 달려나가는 인공지능 기술 기업과 연계한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팀장에서 이사로 갔다가 이제 파트너로 이직했다. 오랜만에 손끝이 아스라히 저리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오랜만에 찾아온 흥분과 스트레스, 업무량 폭증을 맞아 제법 얼얼하다.

어찌된 인생이 마흔 무렵부터 무섭게 변화하고 빠르게 움직이며 흥미진진하다. 좋다.

 

화려한 미혼의 식도락은 갔다.

그 대신 집밥이 왔다.

 

 

 

 

계속 읽기 “계절, 독서, 인생, 식도락 그리고 가족”

애덤스미스 엄마, 젊은 작가들, 드러내지 않기, 그날 당신은 어디에?

읽은 책 업데이트:

한국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가장 최신의 단호하고 분명한 증거가 있다면 그건 패미니즘의 부상이다. 그 동안 억눌렸던 것이 빠른 시간에 안팎에서 쏟아지는 통에 똥도 있고 된장도 있고 부산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패미니즘의 에너지는 문화, 예술, 철학을 넘어 실제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정치, 생활 습속으로 진출했으며, 남성 중심의 공고한 성곽들을 집요하게 공략하고 있다. 방어하는 기득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역차별이다 싶을 정도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도 남녀의 유전적 물리적 차이는 어떻할건가!’ 따위의 함정 특히 위험하다. 유전적 특성대로만 살면 그건 동물이지 사회를 이룬 인간이 아니다.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방관자적 입장에 서서 풍성하고 흥미로운 관전이 즐겁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경제학을 공격하는 흥겨운 패미니즘이다. 패미니즘이라는 이름 붙이기가 유대인 딱지 붙이듯이 쓰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부담없이 많이 써줘야 하지 않을까. 오랜 사회 내 갈등을 만들어내면서 발전한 서구보다 우리나라는 이 단어를 역사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좌지간. 고상한 척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남성적 공간인 경제학에 색다른 무기를 들고 뛰어들었다. 군내나는 개천을 흙탕으로 뒤흔든다. 쉽게 읽히고 깊게 공감할 수 있으며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좋은 책이다. 요즘엔 맑스니 뭐니 하는 것보다 이런 측면에서 접근해야 기득권의 성벽에 금을 낼 수 있다. 이게 바로 패미니즘의 놀라운 점이다. 강력 추천.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젋은 작가의 정의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았으나, 1년간 발표된 ‘젊은 작가들’의 중단편을 심사하여 선정한 수상 작품집이다. 2010년도 초반 즈음에 발견한 뒤로 이상문학상과 함께 매년 챙겨보는 문학상이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대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여성 작가들이다. 여성이 아닌 한 명이 대상이라는 모양새가 아주 의미심장하다. 올해는 별달리 인상깊은 소설이 없었다는 일부 심사위원의 평까지 곁들이면 더더욱 의미심장하다. 작가의 성별과 관계없이 나는 대상을 제외하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여성의 관점을 드러낸 작품들이 오히려 신선하고 즐거웠다. 대상을 받은 소설은 이 찬란한 여성들 사이에서 뭔가 꼰대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 지점도 역시 놀랍고 감탄해 마지 않는다. 여성의 관점으로 과거와 다른 소설을 써낸 것이 문학적 풍요와 새로운 차원의 감동을 자아난다. 그러면서 과거를 즈려 밟는다. 현실을 낯설게 보기, 결국 파격적인 관점과 시도가 예술의 근원이란 것을 인정한다면, 이 책에서 페미니즘이 던지는 예술구와 그것을 받아서 작품집에 담는 한국 문단의 모양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해의 문학상 수상 작품집보다 강력 추천.

 

드러내지 않기 – 혹은 사라짐의 기술

프랑스 철학자의 대중적인 책. 제목과 마케팅 문구를 보고 디지털 자아가 가진 특성을 유희하는 책일거라 생각해서 구매했다. 너무 어렵지 않고 가볍고 흥미롭게 볼 만 하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방향은 아니다. 저자도 고백하고 있지만 자신이 발견한 ‘드러내지 않기’의 철학을 전형적인 서구 역사 속에서 더듬거린 것이 아쉽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런거 봐야되지 않나?

 

그날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 다큐멘터리 사진가 10인이 기록한 탄핵 그리고 기억의 광장 2017-2013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의 이름을 책에서 발견하고 구매했다. 엉뚱하게도 사진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멋지다고 생각했다. 뭔가 뉴욕에서 엣지 있는 사진가의 이미지가 더 어울리는 친구가 끼어 있어서 생소했다. 한국 사회의 이면을 꾸준히 추적한 사람들도 있고, 동창님처럼 젊은 시각으로 촛불을 관찰한 사진들도 있다. 사진집보다 디지털 환경에 더 적합한 전시물로 꾸몄은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나름 꼰대 나이인지라 책이라는 미디어는 그림보다 문자가 이어져야 읽는 맛이 난다. 우좌지간 소장용으로 훌륭하다.

읽은 책 업데이트: 내 이름은 빨강, 우리의 소원은 전쟁, 천일의 눈맞춤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의 장편 소설. 최소 두 번은 읽어야 한다. 복잡한 플롯은 아니지만 매우 정교하게 설계한 인물, 대사와 세계관을 배치하고 있어서 촉을 세우고 봐야 한다. 노벨상 받는 소설이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우리의 소원은 전쟁

여러 모로 관심이 가고 나오는 책마다 살펴보고 있는 장강명 작가. 소설 쓰기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기교가 앞서며 소설을 가리는 듯 하다. 이번 건 별로.

 

천일의 눈맞춤

의사는 자기 분야에서 약간은 신과 맞닿는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기나긴 전문교육을 지나 자신의 작은 방에서 환자라는 작은 창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한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도 좋다. 이러다보니 특히 전문교육 이전에 인격 형성이 잘 안되는 우리나라 의사들의 견해는 종종 전지적이고 일방적이다. 이런 의견이 지루한 진료실을 뚫고 나올 때 이런 책들이 나온다.

물론 당연히 좋은 내용이 대부분이다. 강한 주장도 의외로 적은 편이고, 글솜씨도 빼어나다.  장점이 더 많은 책이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893291818x_1.jpg읽은 책 업데이트: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은이) | 김희상 (옮긴이) | 열린책들 | 2017-01-30 | 원제 Warum es die Welt nicht gibt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능청스럽게도 1+1=2가 아님을 증명하듯이 농반진반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점점 읽어들어갈수록 진짜 철학자들이 서로의 세계관을 부딪히고 돌파하고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관전하듯이 흥미진진해진다. 저자가 밀고 있는 ‘새로운 리얼리즘’에 입각한 의미장 위의 존재론은 안내하는 저자의 능청스러움과는 딴판으로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독자의 눈을 트이게 해준다.

요 몇년간, 아니면 대학 졸업 후 거의 15년 훌쩍 넘게 매몰되어 살아온 숨막히는 세계가 빈틈 내보이고, 그 사이로 빛을 내뿜고 있는 느낌이다. 과학적 세계관보다도 훨씬 더 작고 초라한 왜곡된 자본주의의 노예 의미장 속에서 피터지게 경쟁하는 불쌍한 존재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존재가 된다, 새로운 의미장에서.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내 의미장은 무궁무진하다. 가능하고. 그래!!! 이게 철학 책 읽는 맛이지!

사족이지만, 자신이 칸트, 니체, 헤겔을 까도 될 정도가 된다는 자신감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얻게 되는지 궁금하다. 그야말로 전문가의 세계인걸까? 아니면 서구식 교육의 결과인가? 아버지에게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남자 노예들은 동시대 주인 행세하는 허위들도 떨쳐내지 못한다. 언제 인류의 발자취들과 싸우며 세계를 진전시킬 수나 있겠는지. 창피하고 부럽다.

 

불온한 생태학, 안녕 주정뱅이

읽은 책 업데이트:

<불온한 생태학>이브 코셰 (지은이) | 배영란 (옮긴이) | 사계절 | 2012-07-20

카톨릭대학교 환경생태학 교수인 이모부댁에서 책을 하나 업어왔다. 인간 중심이 아닌, 자연을 온전히 하나의 세계로 보고 그 안에서 인간의 자리를 비춰보는 생태학을 소개하려고 책을 쓰고 계시다. 언뜻 듣기에도 맹렬한 액티비즘으로 이끌것 같고, 겁나게 전복적으로 들린다. 이모부가 정치적으로 소위 ‘보수’적인 발언을 했는지 이모가 이야기해준 일이 떠올랐다. 요즘에야 ‘보수’라고 부르는 것이 경쾌한 쾌감을 동반하지만 예전에는 혐오감이 먼저 들었더랬다. 그런 분이 급진적인 철학이 뒷받침되어야만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있는 학문을 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직업으로서의 자아와 사회속 개인으로서 자아를 분리하는 기술을 가지고 계신 듯 한데, 언젠가 마음 먹고 좋은 타이밍에 한 번 여쭤보고 싶다. 우좌지간 이 책은 생태학이 가진 급진성을 분과를 넘나드는 지식인들의 글 토막과 연결하며 흥미진진하게 플어 놓는다. 관련 학계에서 유명한 인물들 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운동가, 노벨상 수상한 기자 출신 저술가, 미국 좌파 지식인에서 전직 미국 대통령까지 그들의 발언과 글이 생태학적 관점을 어떻게 공명하고 있는지 보는 것은 앞으로의 훌륭한 글읽기 길잡이가 된다. 새로 읽어봐야 할 책 목록이 생겨서 좋다.

트럼프 당선과 함께 다시금 기후변화에 대한 hoax 논란이나 기술에 기댄 대책없는 낙관주의가 고개를 쳐들고 있다. 이 책을 봐도 환경운동이 처한 딜레마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시간에 대한 주관적 관념 차이가 그것이다. 환경 관점에서 ‘임박한 위협’은 인류의 시계에서 여전히 머나먼 미래다. 자본주의가 굴리는 시계에서도 다음 성과분기를 넘어서는 우선순위 매우 낮은 미래일 뿐이다. 한 사람에게도 자기가 살아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은 시간이고, 법률적으로 ‘임박함’은 분, 초, 일 단위를 다투는 일이다. 아무리 올바른 주장을 접하더라도 마치 먼 아프리카의 난민에게 보내는 것 같은 지지를 넘어서는 행동이 어렵다. 반면 난민에 대한 지원보다 생태학적으로 요구되는 행동은 당장 나의 지금을 송두리째 전복할 수 있는 급진적인 힘으로 다가온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마당에,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아예 감도 오지 않는다. 늘 그렇듯이 망각이라는 현실적인 선택에 기댈 수 밖에. 다양한 진보적 가치 중에 나에게 가장 멀리 있었던 분야 중 하나이다. 앞으로 조금 더 알아가야겠다.

 

<안녕 주정뱅이>권여선 (지은이) | 창비 | 2016-05-16

이상문학상인지 현대문학상인지 받았던 작가의 단편을 보고 구입한 책. 한 마디로 첫 작품부터 마지막 해설과 작가의 말까지 몰입과 감탄을 멈출 수 없었던 책. 아내가 먼저 보면서 왜 이렇게 어둡고 우울하고 힘든 삶을 다룬 책들만 사냐고 채근하게 만든 책이다. 책을 보기 전에 던진 대답은, 원래 삶의 진실이 그런 상황에서 훨씬 더 명료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나름 멋진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내가 읽으면서 든 생각은, 참 얼치기 흉내내기 답변이었구나 하는 것이다. 그럴싸한 삶의 진실을 똑똑히 드러내기 위해 그런 상황을 그려낸 소설이 아니었다. 몇 마디 말, 몇 개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진실을 비추어 내게끔 만드는 무서운 거울이 이 책이었다. 주정뱅이급 아버지와 친척들을 가지고, 나 자신이 주정뱅이로 내 삶에 생채기 냈으며, 그러면서 쉽게 타협할 수도 없고, 선뜻 용서하거나 잊을 수도 없는 삶을 만들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권여선 씨가 보여주는 세상이 너무나 크고 깊어서일수도 있고. 그간 문학상 작품집에서 흥미롭게 보던 작가들은 주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젊은 작가들이었다. 책 뒷편인가에 의례 써 있는 작품평에서 발견한 말이 이번에는 그런 편향성을 깰 수 있게 도와준다. “주류 문학의 위엄을 보라!”

82년생 김지영

8937473135_1.jpg읽은 책 업데이트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2016

82년에 태어난 여아 중에 가장 흔한 이름이 김지영이라고 한다. 주제와 소재, 이야기의 힘을 더하는 방식, 동시대인으로서의 공감이라는 측면에서 내게 특별한 소설이었다.

최근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떠오르는 사회적 주제다. 차별적인 태도들이 쌓여서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여성들과 갈등을 빚고 사건사고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남성우월주의에 대한 신랄한 미러링에서 시작한 운동이 어떻게 똑같은 방식으로 일그러지는지도 목격했다. 사회적으로 떠들석한 주제는 변화를 가져오는 에너지를 만든다는 측면에서 언제나 환영한다. 그런데 이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는 에너지를 더 증폭하기 위해 필요한 ‘이야깃거리’ 혹은 ‘먹거리’가 너무나 빈약했다. 그 동안 이 분야에서 묵묵히 싸워온 사람들, 혹은 부지런히 번역해 놓은 페미니즘 책들, 혹은 학문의 분야에서 이룩한 담론들이 부족한 것이다. 사람이 죽고, 다치고, 갈등이 역치를 넘어서려고 하는 와중에도 이를 공론화하고 이야기할 사회적 자산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기껏 서유럽의 중학생 상식 정도나 되는 팜플릿 책으로 나와서 8천원 돈 받고 팔리기도 하고, 때맞춰 학계, 문학계, 예술계의 오랜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전선은 항상 흐려지고 만다. 이 책은 과열되고 촛점을 잃은 바보들의 외침 속에서 잔잔하지만 마음에 확 퍼지는 목소리로 말을 건낸다. 이 모든 소란이 누구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살펴보자고. 그건 어떤 개인의 책임과 문제가 아닌 개인이면서 집단이면서 한국 사회가 아로새겨진 김지영씨를 위한 것이라고.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자고. 그렇게 하염없이 평범하면서도 이토록 특별한 김지영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시대를 조명하는 소설적 시도는 제빵업계의 초콜릿 케이크만큼이나 하나의 장르를 이룰 정도로 흔한 것이다. 물론 소품보다는 두꺼운 대작으로, 한 개인보다는 세대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복잡하고 두터운 시대를 드러내려고 한다. 인물들은 각각의 개인적 인과관계를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지만, 그 전체가 모이면 하나의 시대를 스스로 읊조리게 된다. 이 책도 김지영씨의 인생을 통해 우리 시대의 여성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그런데 그 개인이 만드는 이야기가 절대 특별하지 않다. 고민 상담해준답시고 돈을 버는 부류들 (무슨무슨 스님들, 철학자들, 에세이스트들, 방송인들)의 책상에 수북히 쌓일법한 이야기들.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평범한 이야기에 톡 쏘는 답을 주기 위해 선택된 소재들이 이어진다. 디테일들은 훌륭하다. 국민학교 시절 남자 먼저 번호를 쓴다는 사실은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아내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세부 사항이다. 결국 드라마가 없는 에피소드들을 생생하게 살려내며 이어붙이는 것은 그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세부 사항들에 있다. 세부사항이 시야를 가로막으며 전체를 추측하게 만드는 시도도 재미있지만, 이렇게 이야기와 세부사항을 엮는 것만으로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도 자못 흥미로웠다.

이 모든 이야기가 나와 동시대인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책이 명시적, 묵시적으로 말하는 많은 것들이 내 살아온 삶에 상응하는 지점들을 자극했다는 것도 나에게 특별함을 더했다. 나에게 누이는 없지만, 그런 삶을 살아온 아내가 있고, 소설 속의 어머니가 있고, 친구와 동료들이 있다. 나는 때때로 김지영씨의 아버지를 내보이기도 하고, 그녀 남편의 한 조각을 품고 있기도 하고, 그녀에서 폭언을 던지는 어떤 한국 남자와 닮아있기도 하다. 담담한 김지영씨의 자서전같은 독백들 속에서 나의 파편들을 계속 발견하는 경험은 작지만 묘한 쾌감과 함께 엄청난 부끄러움을 주었다.

이런 평범한 이야기들에 한 술 더 떠서 여성의 삶과 관련된 사회적 통계 숫자들을 독백처럼 붙여놓느다. 에피소드 한 토막을 들려주고, 이것이 김지영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아누 빈번하게 혹은 광범위하게 겪는 문제라는 것을 숫자로 결론짓는다. 소설이 아니라 다큐가 되어버리는, 그래서 소설적인 몰입에서 탈선할 수도 있는 시도를 태연하게 계속한다. 몰입보다 부채의식을 환기하면서 읽기를 계속하게 하는 효과는 있겠다. 개인적으로 좀 더 소설 본연의 효과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내 독서에서는 수치가 등장할 때마다 몰입에서 벗어나 책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회학 이론서나 철학 이론서도 읽는 사람 입장에서 소설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글읽기로 구분한다. 갑자기 통계치가 등장하는 순간 읽기의 방식이 어긋나면서 자주 기어를 바꿔 넣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충분히 담담하게, 충분히 세심하게 주제를 성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걸 꼭 작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소설이 세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나 많다. 소설 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작품들이 할 수 있는 일중에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이런 일일 것이다. 더 많은 한국 예술들이 광주에 대해서, 세월호에 대해서, 서민에 대해서, 노동자에 대해서, 그리고 여성과 모든 소수자들에 대해서 빛나는 이야기들을 해줘야 한다. 교과서는 그들이 고칠 수 있을지언정, 우리가 읽고 사랑하는 예술작품들은 언제나 더 멋지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진실의 조각조각을 나누어 전달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부르클린의 소녀

8984373060_1.jpg읽은 책 업데이트: 부르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은이) | 양영란 (옮긴이) | 밝은세상 | 2016-12-06 | 원제 La Fille de Brooklyn (2016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내일> 정도를 찾아 읽어봤던 소설가 기욤 뮈소. 가끔 들고 있을 때 폼나는 책들에 지쳤을 때 찾게 되는 소설가 리스트 중 최상단 군에 속하는 작가다. 번역자의 재능과 수고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애초에 통속 소설로서 쉬운 프랑스어로 씌였기 때문인지 읽기가 쉽다. 쉬울 뿐만 아니라 그 문장들, 단락들이 엮어나가는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중학교 때 <영웅문>을 밤새워 읽어나가듯이 게걸스럽게 읽는다. 점점 오른 쪽에 쥔 페이지들이 얇아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버겁고 힘들어서 잠시 웅크렸던 일요일에 한 권 가뿐이 읽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 소설의 힘이 이런 것 아니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