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시조, 노마

일본

푸코의 철학이나 양자 물리학, 혹은 테드 창 같은 SF 소설들을 읽다보면 소칼의 지적 사기에 스스로 뛰어든 꼴이 될 때가 있다. 세계라는 실체는 전혀 물리적이지 않고, 총체적 진실은 그저 공허한 지향일 뿐이며, 사실 조차 하나의 개념으로 뭉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눈 앞의 만져지는 현실과 만나 뭔가가 붕괴하는 지점이 있다. 거창하지만, 쉽게 말하면, 50억명에게 50억개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의 구성 요소는 모두 맥락적인 사실과 진실과 오해로 만들어져 있다는 거다. 색즉시공 공즉시색까지 가며 정신이 모호해진다.

KOvsJP

“일본”이라고 많은 사람이 쓰고 이야기하지만 어떤 일본도 절대적이거나 총체적이지 않다. 백제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도 있고, 세계를 삼키려 들던 일본도 있다. 장인 정신과 엔지니어링을 결합하여 또 다시 세계를 거꾸로 들던 일본도 있고 극도의 신경증적인 사회 문화 속에서 수많은 불행을 만드는 일본도 있다. 선진국, 대국으로서 성숙하고 교양있는 대중을 품은 나라지만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보면 미국만도 못한 무식쟁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심지어 영토의 경계조차 의견이 갈린다.

요즘 일본과 한국의 갈등 양상을 이런 측면에서 살펴보면 재미있다. 다양한 일본과 한국 중에 어떤 결과 결이 부딪히고 있는 것인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찰나의 진실이나 인상을 붙잡고 어디에 활용하고 있는지. 그래서 결국 물리적인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그렇게 세심히 살펴보면 훨씬 더 흥미진진할 것이다.

박원순씨 아들의 병역 문제를 가지고 인생을 건 남자가 한 매체(?)를 통해 주장하는 말을 보자. 아무리 우습고 어지러워도 잘 살펴보자. 수많은 사실과 진실 중에 일부를 끄집어 내어 아전인수를 뻔뻔하게 시도하는 모습이 자못 흥미롭다. 짐짓 객관적 뉴스인 양 하는 기사 형식은 덤이다.

‘박원순 아들 병역비리 의혹’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무죄주장

이제 쓰레기나 다름 없는 한국의 정치인이 주장하고 조선일보가 보도한, 거기에 자민당 극우가 공명하여 만들어내고 있는 주장을 보자. 드레퓌스 사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즘 깡패국가 에피소드만큼 핫한 것은 없지 않나 싶다. 뭔가 비슷한 얼개가 보이지 않는가?

조원진·조선일보·후지TV·아베의 수출규제 ‘환상 공조’

이 모든 사단의 원인 사건을 박근혜 정권이 3권 분립을 뭉개면서까지 막으려 했었다는 사실은 가슴 한 편을 찡하게 한다. 드레퓌스 사건 만큼이나 역사적 맥락을 극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소재가 아닐까? 얼마나 이야기가 풍부해질 수 있는가? 근현대사까지 갈 수 있는 저력을 보여준다.

[사법농단 2년] ②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조직이익 맞바꾼 사법부

일본의 극우 라인업이 날 세워서 만들고 있는 현실은 박근혜, 조원진, 조선일보가 김앤장, 외교부, 국정원 등과 손발을 맞추며 만들어내던 현실과 맥을 같이한다. 그 때는 그렇게 부드럽게 이어지던 현실이 이제 어설픈 깡패국가를 동원해서 부숴야할만큼 거칠고 성글어졌다.

[칼럼] 日경제보복, ‘친일3인방’에 책임 물어야

그럼 이제는 무얼 어떻게? 청와대가 외교적으로 만들어내는 Frame과 적절히 들고 일어나는 시민사회 모습은 또 다른 한국이라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그래도 어느 경우에나 저 일본도 일부일 뿐이고 지금 이 한국도 지금 떠오른 한 국면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애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부딪혀오는 일본의 찌질함과 비열함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 전체도 아니다. 지금 장렬하게 보이는 우리의 모습은 갑자기 등장한 정권 때문만은 아니다. 그게 한국이다. 그러나 지금 이 비열한 일본과 똥꼬를 맞춘 나라도 우리 한국이다.

어제의 한일보다 더 나은 한일로 이어붙이는 고급진 시도가 깨어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발하기를 기대해 본다.


스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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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인스타그램. 자알~ 찍었다. ^^

정말 몇년만에 조선호텔 스시조에 큰 돈 쓰러 갔다. 아내 생일이 다가오는 걸 미리 준비하지 못하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요한 일들이 쏟아지는지라 짧은 시간에 강한 임팩트를 내는 파티가 필요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 참에 몇년동안 마음 속에만 고이 모셔두던 스시조로 내달리기로 했다. 이게 얼마만이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토요일 점심 카운터 자리를 예약했다. 다 찼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크다. 그런데 1부, 2부로 운영하는데 어느 시간대를 택하겠냐고 한다. 에? 주말이면 2부 3부 운영까지 한다는 그 호텔 부페 식당도 아니고, 스시조 카운터가 2부제? 손님이 많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 1부에 남았다는 2석을 예약했다. 인당 20만원씩은 각오해야 하는, 그것도 요리사 바로 앞에 나란히 앉아서 먹는 카운터 석에 2부제를 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이 온다니, 세상 내 월급 빼고 다 오르는게 사실인가보다 했다.

당일 출발 직전에 예약 확인 전화가 왔다. 아침부터 딸애를 밥 먹이고 어머니께 넘기는 준비 시키느라 준비가 조금 늦었다. 11시 30분부터 1부가 시작하고 1시 20분까지 마쳐야 한다고 하길래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조금 늦는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무려 정시에 동시 시작을 해야 해서 늦을 거면 2부에 캔슬된 자리로 옮겨주겠다고 한다. 정시 시작? 카운터에서 나란히 8~10명이 앉아서 똑같은 순서로 초밥먹기 대회라도 벌이는 건가? 귀를 의심했다. 조금 늦어도 되지 않느냐고 물어봤지만 완강하다. 몇년만에 가는 게 죄인이라 그런지 요즘에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마음이 캄캄해진다. 기십만원 쓸 판인데 개운해야하는데 말이다.

술을 마셔야 하니 택시타고 총총거리고 출발한다. 늦지 않으려고 아내는 자기 생일상인데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나선다. 도착해서 20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기분좋은 두근거림으로 바뀐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는 특별한 곳에 가는 기분을 더욱 끌어올린다. 저런. 아직 카운터 준비가 안되었으니 잠시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한다. 11시 30분 스시먹기대회가 현실로 성큼 다가온다. 옆을 보니 우리 같은 선수 커플들이 두런두런 하고 있다.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좋다.

짜잔! 아니 그런데! 돈생기면 가까운 스시효만 다니던 몇년 동안 세상이 많이 바뀐 모양이다. 아직도 안효주씨가 스시를 놓지 않았고, 그 밑에서 형님형님 하시던 분이 서초점 카운터를 풀타임으로 하고 계신데, 스시조 카운터에는 젊디 젊다 못해 파르스름할만큼 활기찬 셰프들이 반겨준다. 스시먹기대회에 함께 참전한 전우 커플들을 슬쩍 스캔해 본 아내는 또 다른 소식을 알려준다. 우리가 가장 늙었다고 한다. 압도적으로. 꼰대 자격지심과 심한 이질감이 동시에 펄떡인다.

몇년 전에 방문하고 처음이라고 아는 척을 하려니, 담당한 셰프가 많이 바뀌었다고 단언한다. 큐베이 스시와 제휴를 어디 뭔가로 바꿨다고 하는데, 일본 내 스시야 순위에 관심 없는 나로서는 그 의미를 알 방법이 없다. 일단 밥부터 다르단다. 적초를 썼다고 한다. 에도마에 스시 운운 한다. 나중에 아내와 이야기해보니, 이 때에 이미 둘 다 속으로 마음이 덜컹 했었다.

요이~ 땅! 스시먹기대회가 시작됐다. 우리 부부 오른 쪽의 마지막 2개 자리 선수들은 아직 입장 안했으나, 애초에 완강하게 공지한대로 세 명의 셰프가 일정한 속도로 음식을 내기 시작한다. 첫 접시는 성게 껍데기에 담은 성게, 콩소메, 젤리 따위를 섞은 전채요리다. 요즘 성게 달고 맛있다. 거기에 콩소메에 젤리, 크림 종류까지 얹었으니 깊게 달고 맛있다. 뭐 좋다. 달고 맛있으면 좋지 않나. 전복과 게우 소스 당연히 훌륭하고.

스시를 시작한다. 손 닦는 물티슈를 가져다 놓고 선포한다. 아마 변화한 시스템에 대한 공지인 것 같다.

  1. 우리 스시는 절대 젓가락을 쓰지 마시고 손으로 드시고 휴지에 닦으시면 됩니다. 그게 시스템입니다. 원래 스시는 손으로 드시는 겁니다.
  2. 가장 최적의 소스나 향신료로 간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찍거나 추가하지 마시고 그대로 드시면 됩니다.
  3. 스시는 만든 직후 드시는 게 제일 좋습니다. 첫 스시는 제 손에서 직접 가져다가 드시면 됩니다. 바로 가져가세요.

난 원래 스시를 주로 손으로 먹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젓가락질을 잘 못하기 때문이다. 내 수준으로는 스시를 뒤집어 생선에 필요한 만큼 간장을 딱 맞게 적실 수가 없다. 서투르게 하다가 스시의 밥을 간장에 푹 찍으면 그야말로 아까운 한 피스를 날리고 만다. 밥이 부스러져 떨어지기라도 하면 주접스레 밥을 주워먹어야 한다. 제일 안좋은 것은 네타를 떨구고 망연자실할 때다. 아주 불쌍해 보이면 한 개 더 만들어 준다. 하지만 창피하기 이를 데 없다. 이미 간장을 바르거나 소스가 덮고 있는 스시는 미련없이 젓가락으로 잡는다. 뭘 찍어먹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흰살 생선을 잡고 닦은 휴지와 줄줄 흐르는 간장을 닦은 휴지는 처참하게 다르다. 손 닦는 수건을 매번 갈아주는 시스템은 아니었다, 참고로.

2번은 뭐 좋다. 요즘에는 점점 더 많이 그렇게들 내는 것 같다. 게다가 난 간장 매니아는 아니다. 비싼 요리는 원래 요리사의 비전을 손님에게 전달해야 하는 법인데, 맘대로 망치게 두면 되나. 내 비전을 망치지 마시오. 아주 동의한다.

3번은 솔직히 거북했다. 두툼한 남자 손에서 줄줄 간장이 흐르는 스시를 넘겨받아 바로 입에 넣기에 뭔가 거슬리는게 있다. 게다가 주로 무너질 것 같은 스시, 도마를 적실 것 같은 스시를 그렇게 준다. 무너질거면 쥐지를 말던지 김에 말던지 할 것이지… 아 물론, 꺄아! 하면서 즐겁게 받아서 인사까지 꾸벅 하고 먹자마자 환희의 표정을 짓는다. 카운터에서 요리사 거슬려서 좋을 게 정말 1도 없다. 그 정도 순리를 따를 나이는 먹었다는데 자부심이 든다.

나도 젊지만 나보다 더 싱그럽게 젊은 손님들은 핸드폰으로 사진 찍기를 거르지 않는다. 우리 셰프는 재료도 들고 나와 보여주고, 손에 쥔 모습을 찍으라, 내 얼굴은 초상권 없다, 여자분은 드시고 남자분이 찍으시라 사진 찍는 커플에게 기꺼이 요리와 서비스를 내준다. 아, 여기는 손으로 먹는 시스템이었다.

재료는 확실히 훌륭하다. 우니야 계절도 있겠지만 정말 신선한 향과 달콤함이 극진하다. 참돔은 앞으로 도미 회는 다른데서 먹기 힘들게 만들 정도로 훌륭하다. 흰살 생선이나 조개, 오징어들은 종종 가는 스시효에 비교해도 완전히 한 수준 위다. 기본적인 찜, 굽기 기술이야 역시 훌륭하다. 새로운 시도도 좋고 비주얼도 훌륭하다.

변화했다고 단언한 부분은 스시 자체다. 적초를 쓴 샤리는 우려했던대로 풍부한 초 맛보다는 단맛으로 달려갔다. 네타는 재료의 높은 수준을 무색케 할 정도로 조리로 밀어부친다. 조미로 범벅한 네타와 달콤한 적초 샤리는 큼직한 피스에서 나름 조화를 이룬다. 혹여 배불러서 밥 양을 조절하지 마시라. 네타 조미를 밥 양에 따라 조절해주지 않아서 밸런스가 깨지고 만다. 배불러도 주는대로 먹을 것. 스시효에서 게살에 새우에 성게를 얹어서 약간 달콤한 간장을 발라주는 게 있는데, 장난스런 웃음을 가득 품고 이런 것도 한 번 먹어봐! 달콤하지? 하는 유머로 활용한다. 여기는 그 정도는 애교였다. 누군가에게는 트렌디한 훌륭한 스시겠지만, 벌써 꼰대로 접어드는 젊은 40대 중반 입장에서 재료를 죽이는 과한 조리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대부분 달다. 내 경우는 코가 맹맹한 단맛을 아주 싫어하는데, 간장 조린 소스가 다른 단맛 내는 재료들과 엮여서 그런 맛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스시조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숯불에서 구운 부분을 아래로 놓고, 뭘 바르고 또 올리고 달콤한 간장과 소금, 다시 와사비로 마무리한 오도로! 훌륭한 요리 한 접시를 대접받은 기분이지만, 오도로는 어디갔나 싶었다. 무슨 김밥 마냥 속을 잔뜩 넣고 토치로 굽고 또다시 김으로 손잡이를 만든 고등어 누름초밥! 내 사랑해마지않는 시메사바 맛은 정녕 1도 느껴지지 않은 달콤 김밥이었다.

초희-고등어
이게 진짜 고등어 초밥 | 출처: 어떤 분 블로그

등푸른 생선과 조개류에 대한 접근은 재료의 본질 파괴나 다름 없이 보였다. 한 번 가고 가지 않는 회사 앞 양고기 집이 있다. 정말 양 냄새가 안난다. 워낙 어린 양을 쓰고 잘 마리네이드해서 먹기 좋게 구워준다. 왜 양을 먹는지 모르겠다. 육향이 들지도 않은 고기는 병아리 후라이드 말고 더 먹기 싫다. 이 곳의 고등어와 청어가 딱 그런 처지에 있다. 스시초희 시절의 박경재씨가 잘라준 고등어 초밥은 아직 꿈에 나온다. 너무 맛있다고 하나만 제발 더 달라고 하니까 종이에 싸놓은 한 줄을 새로 꺼내 내 한 피스를 중간에서 잘라주고 나머지를 치워버리던 모습도 생각난다. “고등어는 제가 국내에서 몇 번째에 든다고 자부합니다.” 라던 폼나던 한마디는 덤이다. 보존을 위한 초절임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 수준이었다. 고등어로 태어났으면 고등어로 죽게 해줘야하지 않겠나. 재료에 대한 예의다.

스시먹기대회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카운터의 오마카세는 호텔 결혼식 테이블 디너가 아니다. 손님 자리만 확인되면 전체 일정에 따라 수백 접시의 음식을 내오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거다. 원래 많이 씹고 늦게 먹는 편이고, 스시같은 끝내주는 음식을 술도 없이 먹을 수 없어서 종종 코스 중간에 주저앉기는 일쑤다. 다들 같은 피스를 똑같은 방식으로 서브되면 덥썩 먹으라는 방식대로 먹는 것은 좋다. 그런데 각자 속도가 있기 마련인데, 겨우 그 정도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결혼식장도 아니고 주방과 테이블의 거리가 먼 룸에서 진행하는 코스 요리도 아닌데 말이다. 코 앞에서 아직 멸치 안주에 사케를 홀짝이는 것을 보면서도 다음 코스로 간다. 게다가 다음 코스는 두툼한 손에서 바로 가져가야하는 스시다. 유후.  나오는 스시도 블로그와 한 톨도 다르지 않다. 내 옆자리 손님들과도 한 피스도 다르지 않다. 심지어 코멘트도 똑같다. 억대 히노끼 다이 위에서 오마카세 흉내내는 것 같다. 말이 좀 심했다.

다행히 우리 옆 테이블 선수 두 분이 십여분 이상 늦게 입장하는 바람에 그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내가 잠시 속도를 늦춰줄 것을 청하자, 기다렸다는듯이 늦은 팀의 스시를 빠른 속도로 낸다. 1주년이라는 젊은 커플은 놀라운 속도로 사진 찍고 먹고 속삭이고 셰프와 농을 친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코스의 끝에서 내가 추가로 청한 아지를 같이 얻어 먹었으니 그걸로 부담을 덜기로 했다. 물론 이미 계란까지 다 먹은 다음으로 보이긴 했지만.

아… 너무 투덜댔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돈생기면 매일 가야지 했던 곳 하나가 날아간 심정에 비할바는 아니다. 안타깝다.

물론 간만에 맛있게 잘 먹었다. 누가 젊고 트렌디한 셰프가 즐겁게 내놓는 달콤 풍미 가득한 스시 오마카세를 싫어하겠나? 줄이라도 서서 1부, 2부 들어가고 볼 일이다.


노마

214728707집 책장에는 장 지글러가 쓴 책이 두 권 있다. 하나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또 다른 하나는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1999년 초판에 2007년 한국 소개가 첫번째 책이고, 두번째는 2007년 초판에 한국에는 2018년에 들어왔다. 첫 책은 자기 자식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고 두번째는 손녀와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나란히 꽂혀 있는 책 두 권의 모습만으로도 그들의 10년과 우리의 10년을 조망할만 하다. 그러나 최근 책에서 손녀와 주고 받은 이야기 중 노마(NOMA)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또 다른 측면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각자 자신의 취향대로 개인화된 검색 서비스에서 NOMA를 찾아보면 어떨까. 내 경우에는 덴마크의 유명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인 노마가 가장 먼저 뜬다.

하지만 장 지글러의 손녀는 NOMA라고 했을 때 영양결핍과 위생 문제로 얼굴이 썩어들어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지글러는 그런 사진들을 부록으로 첨부했던 보고서가 읽히지 않은 슬픈 사실을 이야기한다. 어느 신중한 친구의 충고 이후로 그는 더 이상 NOMA에 걸린 소년 소녀들의 사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각각 노마의 위키 페이지와 충격적인 사진 대비는, 아래는 감춰두겠다. 당신은 노마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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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설날 즈음, 읽은 책 업데이트

마지막 포스트를 보니 작년 9월이다. 포스트를 읽어보니, 역시나 쓸데없는 수사와 현학이 부끄럽고, 뜻도 제대로 읽히지 않아 민망스럽다. 쓰는 연습도 없이 그저 시간이 가며 늘기를 바라는 못된 심보가 새삼스럽다. 어쨌건 오랜만에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성의 없는 업데이트라도 적어 놓는다. 이런 끄적임이라도 해야 다시 돌아와서 나중에 돌아볼 거리라도 쓰게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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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vs. 국정농단

00503338_20180528국정농단은 종종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언론이나 세간에서 짓는 이름은 그냥 말 나오는대로 붙이는 게 아니고 목적과 함의를 전달하기 위해 신중하게 디자인한 결과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문제가 그저 병원 대신 청와대에 집어넣은 우중의 판단이 근본 원인이라면 이토록 처참한 국정농단의 주범으로 몰기에는 이야기가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다. 최순실 정도 되는 캐릭터가 등장해서 국정을 주무르는 이미지가 나와줘야 이제 국정농단의 면이 선다. 게다가 최순실은 거기에 걸맞는 행태를 미디어에 노출하며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명명은 다른 측면에서 이 사태의 본질을 지적한다. 당연히 시스템의 문제가 크지만, 특정 자연인의 무지와 탐욕이 만들어낸 예외 사례라는 느낌이 그것이다. 가장 큰 시스템의 실패로 많은 사람들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지적할 정도로 시스템 문제를 구체적으로 구조화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공직자 인선에 대한 문제, 예산 배정 및 활용에 대한 문제 등 굵직한 문제점들부터 청와대 보안 규정 준수와 같이 어찌보면 작은 부분까지 시스템의 실패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시스템의 한계는 언제고 존재하는 것이고, 지금까지 겉으로 드러난 사고들은 박근혜 – 최순실이라는 명콤비가 저지른 일보다는 규모도 작고 전문적이었다. 같은 구멍이지만 자격미달자들이 벌인 개인적 행각이 그 구멍을 더 크게 벌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민중은 권력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해당 문제에 대응했다. 정치꾼들이 케케묵은 내각제를 꺼내들고 온 힘을 다해 휘두르고 다녔지만 여론은 여전히 직관적인 이해가 어려운 분야로 쉽게 뛰어들지 않았다. 결국 마녀사냥과 같은 구도 – 헤아릴수 없이 효과적이다-를 멋들어진 정책으로 소화해낸 문재인정부의 기획력이 아직까지 주효하고 있다. 적폐청산. 이 역시 고도의 명명 전략이 제 역할을 다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사법농단은 양승태라는 타겟을 전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최순실과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여성에 중년에 복부인 이미지에 무식하고 편법을 저지르는 캐릭터와 비교할 때 일제시대 이후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법률 엘리트 계층의 최상층 인물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가 보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양승태 개인에 대한 모욕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최순실에 대한 질타와는 비할 바 아니다. 사태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양승태라는 비정상적인 인물이 벌인 사건으로 보기에 무리가 많다. 어디에서 갑자기 외부인이 등장한 것도 없다. 박근혜는 무지몽매한 대중이 그녀의 보금자리를 잘못 찾아주는 바람에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 기존 시스템에는 없던 최순실이라는 이물질이 끼어들어와 깽판을 친 구조다. 이때문에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양승태가 누군가? 엘리트 권력기관에서 스스로 발생하여 결국 최정상에 오른 심장이나 다름 없다. 판사 조직의 최고 수장이 외부 인사의 더러운 피로 가능할법 하지도 않고, 실력과 자격이 모자란 사람이 수많은 경쟁자를 밀치고 그 자리에 오를리도 없다. 그렇게 안에서 태어난 요인이 수장에 오르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백선하 교수가 그토록 원했던 ‘병사’는 백남기씨의 사인이 아니고 한국 사법정의의 사인이 되었다.

따라서 사법농단, 사법거래, 재판거래라는 표현은 모두 적합하지 않다. 수많은 부조리와 실패를 드러내며 대안 없이 계속되고 있는 검찰권력과 더불어 사회 정의 시스템 전반의 내적붕괴로 이해해야만 한다. 양승태 개인이 비정상적인 대통령과 작당하여 재판을 거래했다는 관점은 당치도 않다. 청와대 비서실장, 대법관과 법무부장관, 외교부장관이 연통을 주고 받으며 모의하는 작태는 개인의 일탈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무서운 시스템적 실패다. 정치와 행정의 긴밀함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여기에 사법과 정보기관이 모여들어 주고받은 작당을 보자면 헌법부정세력 외에 적당한 이름짓기가 떠오르지 않는다.

법조계는 스스로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검찰은 칼을 대는 시늉으로 일관하고 법원은 영장도 자료제출도 조사협조도 없다.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은 제식구 감싸기로 기대를 배신하고 있고, 언론은 빚내서 종부세 낸다는 악성루머 배포에 여념이 없다. 로스쿨 강사로 전직했는지, 법대교수들의 움직임도 답답할만큼 없다. 무엇보다 사명감의 낭만보다 로펌 계약연봉이 훨씬 중요한 예비법조인들은 아예 관심조차 없다. 조직 내부의 사람들은 마치 검찰마냥 조직 보호에 여념이 없다. 검찰이야 되도 않는 검사동일체라는 무슨 조폭같은 슬로건을 내세우며 잘못된 과거사도 집요하게 반복하려는 쓰레기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판사는 좀 달랐지 않았나? 한 명 한 명이 독립적인 사법기관으로서, 서슬 퍼런 시대에 용감한 판결을 실행한 사람도 종종 나오고,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인 고백도 검찰이나 경찰이 아닌 사법부에서 앞장서서 세상의 변화를 추인하고는 했다. 모든 사회적 진보는 사법부의 보수성이라는 필터를 거치며 사회 규범으로 안착할 수 있다. 결국 사법부의 보수성은 끊임없는 변화를 전제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선악이 명징해야 속이 편한 조폭 검사 조직과는 결이 다르다는 얘기다. 그런데 지금의 법조계는 모두 거북목을 하고 가마니를 뒤집서 쓰고 태풍이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다.

아마 양승태 하나도 제대로 못잡을 것이다. 잡는 놈들, 집어넣을 판단하는 놈들, 보도하는 놈들, 구경하는 놈들 전부 한통속 엘리트 아닌가. 우중에게는 보여주지도 않고, 봐도 관심도 없고, 관심 있어도 이해도 못하고, 이해한다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걸 마주칠때는 점진적 진보가 가능한 것이지 의구심이 든다. 그저 경찰, 검찰, 판사랑 안엮이고 사는게 유일한 해법이다.

2018.7.23.

한 명은 특검이 언론에 흘린 5천만원 수수 설. 아직 조사를 위한 소환도 되지 않은 이.

한 명은 75억 횡령과 8천만원 뇌물 –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범인도피 교사 등의 혐의-로 구속 청구가 이어지다가 기소되고 재판까지 끌려간 이.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8711.html#csidx25414c240586c23a5ca467fc49dcd54

한 명은 후원처리하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죽음에 이름.

한 명은 재판장에서 무죄를 외치다.

이런 싯팔…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한 25%

Tipping point for large-scale social change – ScienceDaily 2018년 6월 7일

뉴스페퍼민트의 번역 소개 – 2018년 6월 14일

통제된 집단에게 변화하는 언어규칙을 가지고 실행한 실험이기는 하지만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의 비중이 25%를 기점으로 실패와 급격한 성공으로 갈린다는 연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그 동안 한국 사회의 변화에 비추어보면 경험적으로도 납득할만한 결과다. 극단적인 소수만으로는 무력을 동원하거나, 소수 엘리트 계급에서 권력을 획책하지 않는 이상 어떤 변화건 실패해 왔다. 그러나 백만명이 서울 한복판에서 시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변화가 성공할 것이라는 강력한 징표가 된다. 그 백만명에 동조하는 몇곱절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영향을 주는 주변 사람들까지 합하면 충분히 시민의 25%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87년 민주화 투쟁에서 서울에 모인 백만명, 박근혜 탄핵에 참여한 촛불집회 백만명이 그래서 중요했나보다. 앞으로 진보적 변화를 꿈꾸는 모든 세력들이 전략으로 택할 통찰로 보인다.

문제는 이것이 진보적인 변화에만 해당하는 법칙이 아니라는데 있다. 반동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데도 같은 법칙이 작동한다. 한동안 우리나라 선거 지형에는 25%에 달하는 콘크리트 ‘보수’가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게다가 그 25%는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지역과 연령대 별로 아주 구체적인 실체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지역, 연령별 투표율을 보면 거의 정확하게 선거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 25%는 그냥 가만히 보수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지 않는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젠다 -대부분이 기득권을 강화하는 반동적 형태-를 만들어낸다. 겨우겨우 이루어놓은 교직원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도 하고, 범법화하기도 하고, 진보 정당을 해산하기도 하며, 규제를 단두대에 보내기도 한다. 25%의 콘크리트가 우직하게 밀어부치며 결국은 사회에 반동적 변화를 관철시켜왔다. 이명박근혜 정부 9년은 그러한 사회 변화가 마구잡이로 발생한 비극의 시간이었다.

진보적인 아이디어는 근본적으로 소수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진보적 변화는 어떻게 25%까지 공감대를 확산하느냐의 문제가 쉽지 않다. 지식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것이 퍼져야 하며, 교양이 되어야 하고, 가치판단까지 작동해야 한다. 노예제도 폐지나 여성의 선거권이 일반화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를 떠올려 보자. 지난한 길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수구를 강화하는 방법들은 극단적일수록 해당 계층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낸다. 부동산 투기로 배를 불리는 계층에는 강력한 재산세 폐지가 가장 강력한 동의를 불러일으킨다. 사용자 집단에게 노조 폐지는 공식적인 어젠다가 되는 순간 반대할 수 없는 유혹이나 다름없다. 미국의 트럼프를 보자. 기존 민주당과 공화당은 절대 낼 수 없는 멕시코 장벽 따위가 오히려 미국의 불행한 25%를 단결시킨다. 결국 반동의 변화는 더 극적인 방식으로 더 공고한 변화 열망 집단을 만들어가며 집행된다. 비극적이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며 건전한 ‘보수’ 세력-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의 등장은 오히려 사회의 진보를 위해 필수적이다. 현재 사회의 과거 성취는 인정하고 그것에 기반한 가치 체계를 세우는 보수가 있다면, 반동적인 변화가 극단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은 오히려 줄어들지 않을까. 종북 일당과 지역주의 일당이 패퇴하고, 무자비한 사용자 일당도 깰 수 있다면 그 자리에 우리가 성취한 민주주의 국가를 기반으로 한 보수가 들어섰으면 좋겠다. 이재오가 돌변하고 김무성이 극우로 돌아서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이 민주화 세력의 편에서 이루어낸 성취를 보수적으로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한나라당이 한동안 진보 의제를 선점하는 듯이 광고한 적이 있다. 그게 실제 가치였고 주장이었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더 달라졌을 것이다. 시민들이 갈아엎은 토양에서 수구가 퇴비가 되어 새로운 모습이 피어나길 기대해 본다.

보수 그라운드 제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211027001&code=910100

자유당이 뭔 포럼인지 위장 쇼를 개최하면서 제목을 ‘보수그라운드 제로’라고 붙였다. 주로 핵폭탄이 직격한 지점에서 폭발이 일어난 곳을 부르는 전문용어가 그라운드 제로, 폭심지다. 9/11 테러사건의 세계무역센터 부지를 지칭하기 시작하면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가치 중립적으로 무언가에 공격당해 무너졌다는 느낌보다는, 악한 적에게 당해서 새로운 시작이나 반격을 의미하는 장소가 더 와닿는 의미다. 9/11 그라운드 제로에서 테러와의 전쟁 선포가 딱 그 그림이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놓고 볼 때, 보수 그라운드 제로는 언어도단이다. 반동적인 수구가 보수를 참칭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라운드제로의 상징성까지 가져다가 쓴다. 선거에 참여한 시민이 뭐 자살테러 감행하는 테러리스트일리도 없고, 그들이 다시 세우려는 반격이 테러와의 전쟁만큼이나 명분을 쌓은 것도 아닐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에는 물론 개인적으로 반대한다.)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붙인 이름인지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기래기는 quote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출처도 밝히지 않고 보수의 몰락이 침몰한 세월호같다고 빗댔다. 이쯤 되면 그냥 지능이 낮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선거 감상문

문재인이 모든 질문의 답이 아니고, 민주당은 항상 내 편이 아니었기에, 민주당 석권이 모양 빠지기는 매한가지다.

어쨌건 과거의 문법에 단단히 매어 있던 조직과 관행과 인식들이 한번 끊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음에 큰 희망을 가진다.

새로운 토양위에 새로운 시대적 당위를 찾을 수 있는 질문들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 우리 시대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방법, 사회를 이루고 모여 사는 이유, 그 이유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질문했으면 좋겠다.

결국 실체를 만드는데 실패한 “대한민국”, “국격”, “보수의 가치” 따위를 내려놓고 더 구체적이고 진짜 정치적인 질문들이 나와야 한다. 새 판에서 당면과제도 다시 물어야 한다. 페미니즘이 그렇고 복지가 그렇고 교육이 그렇다.

이번의 선거 결과는 그런 질문에 답하는 사람들 중 특정 관점의 열렬한 배제를 보여준다. 아직 질문은 남았고 찾아야 할 답도 쌓여있기만 하다. 새로운 토양 위에 다양한 질문이 나오고 그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정치 이야기가 꽃피우기를 기원한다.

김문수, 안철수가 배제된 서울시에서 28세 페미니스트가 보통 사람들의 시야에서 뛰놀기를 바란다. 종북 말고 다른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된 경상도에서 이제 노인 복지를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토호들의 토건 민원 창구가 붕괴된 지자체와 지역 의회에서 공동 육아를 궁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선별급식이냐 무상급식이냐의 소모적인 논쟁이 끝난 지점에서 학생 인권에 관심이 쏠리기를 바란다.

그런 질문들에 답하려면 문재인의 민주당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민주당이 보수에 자리를 틀고 앉고, 다채로운 질문에 답하겠다고 나서는 이익집단이 정치에 뛰어들고, 시민들은 그런 집단들에 이해를 투영하여 지방자치를 자기것으로 만들수 있을 것이다.

그게 DJ가 뿌리고 노통이 라쳇을 걸어서 길러놓은 민주주의의 빅 픽쳐라고 믿는다. 그런 일들의 시작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오래 전 적어둔 짧은 생각

블로그의 임시 저장 글을 보다가 별다른 수정 없이 등록하는 글.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장면들이 있다. 중환자실에서 수술 후 몽롱한 의식으로 보았던 장면 인데 의사 간호사 무더기와 함께 들어오던 아버지의 의료용 침대가 그렇다. 휠체어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이 울부짖음만 쏟아내며 바라본 발인식, 내가 기댔고 나에게 기댔던 벗의 장례식장,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삼키던 어머니 모습 등, 개인적인 상실이나 슬픔들이 그렇다. 공공의 기억들도 내 안에서 아프게 자리잡은 것들이 있다. 1980년 광주가 그렇다. 운동권에서 수혈받은 감정이 아니라, 얇디 얇은 사료들과 예술들이 나를 그리로 데려간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도 그렇다. 깡패를 동원한 경찰에게 맞아 죽는 이들도 그렇다. 그래도 광주 다음으로 강렬한 이미지는 가라앉고 있는 세월호다. 그 이미지를 둘러싸고 내가 사는 이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은 결국 이미지를 떠올리기만 해도 격한 눈물을 쏟게 만든다.

그 슬픈 이야기 속 안 곳에, 그저 하나의 교통사고에 온 국민이 빨갱이한테 휘말려서 정부를 탓하고 세상을 탓한다고 삿대질하는 국회의원이 있다.

중국에서 아이폰 생산하는 폭스콘 공장에서 한 달에 십여명이 투신 자살을 계속해서, 폭스콘이 기숙사에 그물망을 설치하는 상황은… 자살하는 한명 한명의 정신건강 문제인지? 폭스콘의 관리 문제인지? 아니면 글로벌 생산 아웃소싱 기업의 노동 환경 문제인지?

18세기 공장에서 착취당하던 아동들이 전염병에 집단 몰살 당하거나, 아니면 공장 화재로 아무도 대피하지 못하고 야간조로 일하던 아이들이 전부 타죽었다면… 그건 도망치지 못한 개인의 문제인지? 시대의 낙후성 때문에 발생한 전염병 사고이거나, 아니면 그냥 화재 사고인건지? 아니면 아동 개념도 없고 노동자 개념도 없고 아무런 규제도 없이 자본만이 작동하는 구조의 비극인지?

비극을 바라보는 관점은 정치적이어야 한다.

제주도에 수학여행을 배를 타고 간다. 그 배는 각종 규제 완화를 틈타 자본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불법을 넘나드는 배다. 불법을 넘나들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 배후에는 뭔가 권력기관과의 수상한 거래가 있다는 정황이 보인다. 그 배의 이상 행동에 대해 모니터링 체계는 작동하지 않았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충분히 탈출 가능한 시점을 모두 넘겨버렸다. 이후에는 국민 여론 악화를 피하기 위한 정치 – 언론 동원 쑈 뿐. 이후에는 정권의 부담을 덜기 위한 물타기, 반대 여론 형성 등이 인간이 근대에 이룬 사회에서 발생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저열한 모습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어느 정도에서 멈출 것이냐는 문제는 있다. 정말 교통사고라 여기는 영역도 정치적으로 들여다 보면 다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안전이 사회 구성원이 요구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라고 볼 때. 비싸고 큰 차를 사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안전도의 격차는 무엇으로 정당화할 것인가? 교통사고들을 모두 모아서 분석해보면, 연간 수입이나 보유 자산에 따라 사고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날 것인가? 돈이 없을 수록 위험한 세상이다.

구조적 문제는, 그것이 수구적 이해에 배치될 때에 한해, 개인의 선택과 능력이라는 신주단지 같은 허울에 충분히 은폐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월호가 교통사고이어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세월호를 교통사고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그런 특권이 없거나, 그런 특권을 부당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단호히 정치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랬으면 좋겠다.

 

글을 살펴보며 돌아보게 된다. 단호히 정치적으로 나서고 많은 이들이 공감했는가? 적어도 사람과 짐승을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자리잡지 않았나. 희생자들과 다음세대에 티끌같지만 중요한 성취를 넘겨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스스로 거짓말해본다.

다시 시작하는 독백, 읽은 책들

식상한 표현들보다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려워지는 것이 나이를 먹는 증거인가보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 40대라는 정체성에 묻어 있는 온갖 것들, 가족에 대한 클리셰 등등. 전에는 집단의 변명처럼 들리던 말들이 이제는 막 내 속에서 끄집어 낸 것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잠시잠깐 신경을 안쓰니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쳐다보는 시간이 뒷목을 서늘하게 감싸쥐도록 맹위를 떨치고 있고,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은 쌓여만 가고, 가사 분담의 큰소리도 허언이 되어 가고 있다. 이 또한 ‘먹고 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아닌가 하고 주장하고 싶지만, 면이 서지 않음은 어쩔 수 없다.

작은 습관 하나씩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내가 40대까지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깨달은 아주 작은 무기 하나다. 블로그에 독백을 적는 것으로 의미 없는 웹서핑 시간을 바꾸는 일을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역시 쪼그라든 자의식에 먼저 던져줄 미끼는 당연히 책이다.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 사모은 책들을 읽어가고 있다. 부담스럽지 않은 페이지 수도 좋고, 소설마다 세계관이 확연하게 다르기에 한 작가의 책을 계속해서 읽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완전히 내 스타일이라고 달려들기는 조금 어렵다. 책만 쓰고 산 사람이고, 일본계 영국인의 정체성도 힘이 없는 상황에서 문학적 성취도 살짝 노벨상을 타기에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는 민족성같은 자의적이고 때로는 악의적인 관념보다 음식 문화가 차라리 더 근대부터 형성된 민족 관념을 설명하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근본도 별로 없는 먹거리들을 가지고 가장 멋진 음식 문화를 만들어낸 일본의 맛을 다룬 에세이를 지나치기 어렵다. 전 세계에 꼰대질하고 다니는 영국인이 읽어내는 일본의 풍경은 우리 눈에 전여옥만도 못한 수준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는 익살스럽게 포장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일본에 대한 서구인의 이미지들을 애용한다: 작고, 조용하고, 쓸모 많고, 가업에 집착하는 장인이고 등등. 물론 음식 이야기만 놓고 생각하면 두부, 국수 등 저자가 언급한 음식들을 먹으러 일본에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훌륭한 책이다.

서구인들의 오만하다못해 유쾌한 세계 논평은 오리엔탈리즘에 그치지 않고 세계사를 하나의 우스운 농담으로까지 만들어버린다. 딱 그 정도의 책 한 권이 있다. 알렉산더 폰 쇤부르그라는 이름을 기억해 놓고, 앞으로 내내 걸러야겠다. 출판사의 제목짓기와 마케팅 역량이 제법인 것 같다.

편의점 인간과 살인 출산은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들이다. 발칙한 상상만으로 소설이 되긴 어렵다. 몇몇 단편은 그래서 실패한다. 그러나 이 사람의 소설은 설정의 힘에 이야기의 깊이를 더한 문학의 자격이 넘친다. 일본 문단의 규모와 생산성을 다시금 경탄하게 하는 소설들이다.

일본 소설을 이야기하는 한국인 입장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빼놓을 수 없다. 대학교 시절 충격과 경탄으로 접한 하루키의 소설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반드시 읽어야하는 책이 되었다. 한 번 인정받으면 절대다수가 주류 취향을 공유하는 기이한 모습이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하루키의 신작에 저항하기는 어렵다. 끝간데 없는 상상력과 가공할 세계관 제조 능력으로 지어놓은 거대한 공간에 용두사미 이야기를 펼치던 시기를 조금씩 벗어나는가 싶다. 노벨상을 목표로 하며 반전이나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적 언급을 한다는 지적도 있었는데, 마치 경상도 노인이 대학생 간첩 찾는 것 같은 괴이한 시각이라 본다. 뭐, 노벨상 타려면 인생으로 증명해야 하는 실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 좀 더 적극적으로 힘내기를 빈다.

다시 일본의 장르 소설로 돌아가보면, 워낙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다. 노골적인 장르 문학이라 젠채하는 선비 입장에서 그 동안 완전히 방치했던 분야가 추리, 공포물이다. 사실 무협지와 같이 한 번 잡으면 놓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컸다. 단편집으로 샀고, 게다가 e book으로 사서 무협지 함정에 빠지는 걸 피했다. 소설은? 당연히 훌륭하다.

장르 중에도 일부 발은 담갔으나 깊이 들어가보지 않은 곳이 SF이다. 80년대, 혹은 약간 중2병스러운 제목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라는 책은 그 유명한 테드 창의 중편정도 되는 길이의 소설이다. 컨택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테드 창의 나와 당신의 이야기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서 이 사람의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SF 장르에서 아이작 아시모프 수준의 파장을 일으켰고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훌륭한 분이다. 더 많이 썼으면 하고 기도하는 전 세계의 수많은 SF 팬들의 대열에 동참한다.

오바마가 2017년인지 2016년인지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는 운명과 분노. 영어 제목으로는 Fate and Fury가 되어 제법 운이 맞는데 번역하니 이 맛이 없어진다. 조금의 의역을 허용하여 운명의 이면(裏面) 정도면 어떨까 싶다. 약간은 작위적이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이야기지만 기본 설계가 워낙 탄탄하고 장면과 국면을 뒤섞은 묘사가 이끌어가는 서사가 모든 허술함을 매워간다. 두 단어의 제목, 두 장으로 나뉜 소설, 운명과 이면, 사랑과 분노, 가족과 친구 등등 잘 계획한 구조가 주는 울림을 남김없이 즐길 수가 있다. 정말 잘 쓴 소설이다. 이 작가의 책이 더 궁금해서 지금은 아르카디아를 사서 읽는 중이다.

즐거운 소설 읽기는 재미보장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잠으로 이어진다. 무협지같이 빨려드는 이야기와 상상력은 이 작가의 특기다. 너무 큰 욕심을 내지 않고 만들어낸 세계에서 현실감을 살짝 비틀고 그 지점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직조한다. 당연히 강추다.

글쓰는 솜씨가 일정 수준에 다다른 한국 작가로 김영하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김영하를 가리는 현대문학상 소설집도 있다. 한 때 장강명 등이 한국문학의 영역을 넓히고 새롭게 하는 모습에 기대가 컸는데, 김영하와 같이 새로운 주류를 형성하는 모습도 보기 좋다. 다만 TV에서 셀럽 소설가를 개척하는 모습이 겹치며 기존 작품들보다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다는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논픽션으로 록산느 게이의 페미니스트 고백록인 헝거, 네덜란드 저널리스트가 영국 가디언 협업으로 영국 금융가를 파고들어 뱅커의 세계를 탐사한 상어와 헤엄치기가 있다. 헝거는 반드시 세상에 나와야 하고, 많은 사람들이 –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혐오에 빠진 여성들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페미니즘은 진지해야 한다. 세상의 절반이 차별당하고 있다는 관점보다는 여성이라는 조건을 더하면 안그래도 심각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더욱 거세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키가 190 넘고 키보다 몸무게 숫자가 더 많이 나오는 흑인 여자, 그것도 타히티 이민자 출신, 그리고 강간 생존자. 여성이라는 조건이 그 모든 소수자 지위에서 오는 차별과 폭력을 몇 배로 증폭시킨다. 페미니즘이 모든 해방의 첫걸음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물만난 고기같이 신나서 본인의 부족함을 더욱 만천하에 알리고 다니는 정희진이 서두에서 추천사를 쓴 것이 옥의 티일 것이다.

시카고 학파의 네오콘들이 제3세계를 어떻게 망치는지에 대한 고전적인 비판부터 시작해서 문 앞의 야만인들과 같이 금융계의 전설적인 기록물들을 지나 1997년과 2008년 금융위기의 이면을 파헤친 수많은 논픽션과 창작물들은 내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다. 99% 시위가 있던 뉴욕에서 뱅커들에게 야유를 보내기 위해 모인 시민들에 대한 뱅커들의 조롱섞인 웃긴 이야기가 있다. 아침부터 데모하러 나왔는데 이미 모두 출근해 있고, 아무리 기다려도 퇴근을 하지 않는 걸 보고는 모두들 그 정도 벌어도 된다고 납득하고 집에 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같이 승자들의 삶 1분 1초, 1센티, 1평을 갈구하는 99%가 아닌 이상, 금융계 장벽 너머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금융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인 보통 사람들을 위해 런던 씨티의 탐험 안내서와 같은 책이 상어와 헤엄치기이다. 월스트리트와 뉴욕의 아버지뻘인 씨티와 런던을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아카데미 전문가들의 식견은 종종 대중 교양서를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더 쉬운 방식으로 흘러들어온다. 일부 의사, 변호사, 건축가나 그냥 ‘교수’들이 세상에 꼰대질하느라 써댄 책들을 피하는 법만 익히면 생각보다 유능한 이야기꾼들이 자신들의 전문 영역을 맛있게 요리해다가 가져다주는 상찬을 즐길 수가 있다. (첨언하자면 가장 피해야 할 사람들은 의사다. 그들은 상아탑도 아니고 그냥 단힌 세계인 작은 병원과 의료계 안에서 자아를 완성한 치들이기 때문에 우리 세상에 대해 해 줄 말이 없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에서 ‘도시’의 의미를 잃어버린 게토를 다시금 깨닫게 되고, GDP는 틀렸다를 통해서 시카고를 극복할 수 있는 틈새를 목격한다. 그리고 스탠리 밀그램의 겁나는 실험은 인간이 윤리를 논하고 나누어야 한다는 필연을 이야기해준다.

틈틈히 읽은 책들 중에 정리할만한 것들은 이 정도이다.  책이건, 회사건, 개인사건 좀 더 생산적인 되새김질이 될 수 있는 독백을 다시 시작해본다.

 

 

 

돌아보는 2017년

2017년을 거꾸로 돌아본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보름이

남들보다 분명히 늦지만,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한 걸음씩 자라난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조금씩 행동 반경도 넓혀나간다. 다행스러움과 행복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집으로 온 조그만 보름이

다시 떠올리기조차 힘든 병원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올 때처럼 급작스럽게 집으로 왔다. 나중에 아기 봐주시는 할머니가 고백했듯이, 너무나 작고 가여워서 어떻게 다뤄야할지 머뭇거리게 되는 쪼꼬미였다. 그 작은 보름이의 작고 여린 몸짓들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었다.

 

몇달처럼 보낸 한 달의 병원 시절

하루 두번의 짧은 면회 시간. 면회 시간 한참 전부터 길게 줄을 늘어선 비슷한 처지의 부모들. 비닐로 된 가운과 장갑을 끼고 들어가 인큐베이터에 갇힌 보름이를 본다. 그 작은 몸을 여기저기 들쑤시는 주삿바늘들. 기어이 폐와 위장에 들어가 억지로 공기와 영양분을 넣어줘야하는 상황. 그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팔다리를 묶이고,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 없는 울음을 발작같은 몸짓으로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 목이매고 눈물이 쏟아진다.
아내는 조리원에서 아기 없는 환자 생활을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프고 힘겹다. 그래도 아픈 아기에게 모유를 줘야한다는 생각으로 고기을 먹고 미역국을 먹고 젖을 쥐어짠다. 붓기도 가시지 않은 몸에 수술 상처를 쥐어매고 매일 한 번이라도 면회를 간다.
양가 많은 가족들의 마음이 함께 아프다. 장인내외와 엄마는 하루도 빼놓지 못하고 자식을 돌보고 손주를 보러 와서 쉼없이 기도한다.
신생아중환자실에 있는 여느 이른둥이들이 겪는다는 이런저런 통과의례를 모두 거치고, 상태가 중하다는 경고성 혹은 보험용 진단에 하늘이 무너지고, 스테로이드같은 침습적인 치료도 안타깝게 겪은 후에, 어느날 갑자기 상태가 좋아진다. 플라스틱 상자 밖으로 나오고, 조금씩 모유를 관으로 흘려 넣다가, 아내와 보름이가 같이 모유 수유 연습을 한다. 그리고 퇴원 준비를 기다리는 방으로 옮겨 모두가 희망을 가득하게 품는다.

 

보름이가 벼락같이 세상에 오다.

이틀인가 회사 일 때문에 밤을 새고 수원 외갓집에 외할아버지 제사를 하러 가야하는 날. 아내가 아프다고 한다. 살짝 짜증이 나서 혼자 출발하지만 아내를 챙기라는 엄마 전화에 차를 돌려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이 쏟아져서 덮친다.
산부인과 응급실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밤을 지새다가 결국 신생아중환자실이 있는 아산병원으로 급히 옮겨갔다. 통증으로 울부짖는 아내를 놓고 온갖 면책 동의서를 휘갈겨 싸인하고나서야 아내는 수술실로 간다. 맹장이란다. 아기는 반드시 꺼내야 하고. 정말 찰나와 같은 순간에 수많은 가능성과 생각들이 자라나고 지나간다.
8월 12일 보름이가 그렇게 벼락같이 세상으로, 우리에게 왔다.

 

새로운 도전, 또 하나의 큰 변화

어정쩡한 작은 기업에 취직해놓고 뭔가 사업을 하는 사람인양 어설프게 꾸미고 다녔다. 그렇게 작은 방 안에 몸을 구겨 넣고 있으면 그냥 내 몸값을 주기라도 하는 줄 알았나보다. 삼십대를 넘겨가면서 굴욕에 굴욕을 더하다가 마음의 병도 얻는다.
결국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시작을 만들면서 다시 한 번 리셋을 한다. 젊은 스타트업처럼 맨땅에 헤딩이 되지 않으면서도 에너지를 가지고 분주하게 움직이려는 노력을 한다. 오랜만에 일을 하면서 흥분과 성취감을 기대하게 된다. 작은 시작이지만 1년 중 1/4을 꽉 채워 신나게 보냈다. 즐겁고 감사하다.

 

임신한 아내와의 시간

아내가 보름이를 품고 지낸 그 시간들이 나와 아내의 관계를 다시 정의했다. 그 전에는 각자 개인으로 존재하면서 연애 감정으로 엮여있었다면, 이제는 각자 서로의 역할을 나눠가지고 물리적으로 기대서 살아가는 부부가 됐다. 이 모든 일들을 더 일찍 겪었다면, 더 갑자기 겪거나 의도하지 않고 맞이했다면 지금의 나처럼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버린것보다 크게 얻어감을 느낀다.
Collateral damage같은 것이지만, 모성에 대한 사회의 적대성을 아주 소름끼치게 느끼고 돌아보고 경악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사회에 떠도는 혐오가 여지없이 모성을 공격하는 모습은 치가 떨리고 화가 난다. 이런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고, 더 중요하게는 윤리적으로 온당하지 않으며, 필멸해야 한다. 사회 전체건, 혐오하는 대중이건.

 

적도 부근에서 맞이한 2017년, 보름이가 생기다

1월 1일부터 팔라우로 날아갔다. 아기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중이니 둘이 온전히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신나게 놀자는 취지이다. 다이빙하고 신나게 먹고 마시고, 둘이서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깔끔하게 종쳤다.

 

남들은 결혼을 안정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이다. 옆에서 보기에 꽤 불안정하게 비혼 생활을 마흔까지 해 왔다. 직장도 자주 옮기고 이런저런 사건 사고도 꽤 많이 치고 어느 하나에 안주하지도 못하고 놀기도 징하게 논다. 그런데 정말 단조롭다. 변화하는 것들은 제각각이지만 큰 관점에서 작은 차이만이 물결치고 있다. 그런데 결혼은 다르다. 아예 서식지의 지형지물이 천지개벽한다. 발맞추어 나도 물리적으로 변한다. 기존과 완전히 다르다. 내 경우에는 변화의 속도와 폭도 빠르고 크다. 부부의 쿨한 연애 기간을 길게 가져가지도 못한다. 게다가 일을 대하는 관점도 과거와 달라진다. 마음대로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내 안의 더 단단한 고갱이에 매달리면서 더 과감한 선택들을 한다. 아내가 아기를 품는다. 매일매일 매주 매달의 시간을 지나며 나와 아내는 빠르게 변한다. 아기가 나온다. 그야말로 매일이 다르다. 이렇게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상황으로 간다. 도대체 어디가 안정적이라는 걸까? 훨씬 다이나믹하고 흥미진진한 인생이다. 이거 누가 먼저 좀 가르쳐줬으면 좋았을 걸…

그래서 2018년은 더더욱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