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는 2017년

2017년을 거꾸로 돌아본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보름이

남들보다 분명히 늦지만,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한 걸음씩 자라난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지만 움츠러들지 않고 조금씩 행동 반경도 넓혀나간다. 다행스러움과 행복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집으로 온 조그만 보름이

다시 떠올리기조차 힘든 병원 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올 때처럼 급작스럽게 집으로 왔다. 나중에 아기 봐주시는 할머니가 고백했듯이, 너무나 작고 가여워서 어떻게 다뤄야할지 머뭇거리게 되는 쪼꼬미였다. 그 작은 보름이의 작고 여린 몸짓들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었다.

 

몇달처럼 보낸 한 달의 병원 시절

하루 두번의 짧은 면회 시간. 면회 시간 한참 전부터 길게 줄을 늘어선 비슷한 처지의 부모들. 비닐로 된 가운과 장갑을 끼고 들어가 인큐베이터에 갇힌 보름이를 본다. 그 작은 몸을 여기저기 들쑤시는 주삿바늘들. 기어이 폐와 위장에 들어가 억지로 공기와 영양분을 넣어줘야하는 상황. 그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팔다리를 묶이고,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 없는 울음을 발작같은 몸짓으로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 목이매고 눈물이 쏟아진다.
아내는 조리원에서 아기 없는 환자 생활을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프고 힘겹다. 그래도 아픈 아기에게 모유를 줘야한다는 생각으로 고기을 먹고 미역국을 먹고 젖을 쥐어짠다. 붓기도 가시지 않은 몸에 수술 상처를 쥐어매고 매일 한 번이라도 면회를 간다.
양가 많은 가족들의 마음이 함께 아프다. 장인내외와 엄마는 하루도 빼놓지 못하고 자식을 돌보고 손주를 보러 와서 쉼없이 기도한다.
신생아중환자실에 있는 여느 이른둥이들이 겪는다는 이런저런 통과의례를 모두 거치고, 상태가 중하다는 경고성 혹은 보험용 진단에 하늘이 무너지고, 스테로이드같은 침습적인 치료도 안타깝게 겪은 후에, 어느날 갑자기 상태가 좋아진다. 플라스틱 상자 밖으로 나오고, 조금씩 모유를 관으로 흘려 넣다가, 아내와 보름이가 같이 모유 수유 연습을 한다. 그리고 퇴원 준비를 기다리는 방으로 옮겨 모두가 희망을 가득하게 품는다.

 

보름이가 벼락같이 세상에 오다.

이틀인가 회사 일 때문에 밤을 새고 수원 외갓집에 외할아버지 제사를 하러 가야하는 날. 아내가 아프다고 한다. 살짝 짜증이 나서 혼자 출발하지만 아내를 챙기라는 엄마 전화에 차를 돌려 집으로 간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이 쏟아져서 덮친다.
산부인과 응급실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밤을 지새다가 결국 신생아중환자실이 있는 아산병원으로 급히 옮겨갔다. 통증으로 울부짖는 아내를 놓고 온갖 면책 동의서를 휘갈겨 싸인하고나서야 아내는 수술실로 간다. 맹장이란다. 아기는 반드시 꺼내야 하고. 정말 찰나와 같은 순간에 수많은 가능성과 생각들이 자라나고 지나간다.
8월 12일 보름이가 그렇게 벼락같이 세상으로, 우리에게 왔다.

 

새로운 도전, 또 하나의 큰 변화

어정쩡한 작은 기업에 취직해놓고 뭔가 사업을 하는 사람인양 어설프게 꾸미고 다녔다. 그렇게 작은 방 안에 몸을 구겨 넣고 있으면 그냥 내 몸값을 주기라도 하는 줄 알았나보다. 삼십대를 넘겨가면서 굴욕에 굴욕을 더하다가 마음의 병도 얻는다.
결국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시작을 만들면서 다시 한 번 리셋을 한다. 젊은 스타트업처럼 맨땅에 헤딩이 되지 않으면서도 에너지를 가지고 분주하게 움직이려는 노력을 한다. 오랜만에 일을 하면서 흥분과 성취감을 기대하게 된다. 작은 시작이지만 1년 중 1/4을 꽉 채워 신나게 보냈다. 즐겁고 감사하다.

 

임신한 아내와의 시간

아내가 보름이를 품고 지낸 그 시간들이 나와 아내의 관계를 다시 정의했다. 그 전에는 각자 개인으로 존재하면서 연애 감정으로 엮여있었다면, 이제는 각자 서로의 역할을 나눠가지고 물리적으로 기대서 살아가는 부부가 됐다. 이 모든 일들을 더 일찍 겪었다면, 더 갑자기 겪거나 의도하지 않고 맞이했다면 지금의 나처럼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버린것보다 크게 얻어감을 느낀다.
Collateral damage같은 것이지만, 모성에 대한 사회의 적대성을 아주 소름끼치게 느끼고 돌아보고 경악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사회에 떠도는 혐오가 여지없이 모성을 공격하는 모습은 치가 떨리고 화가 난다. 이런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고, 더 중요하게는 윤리적으로 온당하지 않으며, 필멸해야 한다. 사회 전체건, 혐오하는 대중이건.

 

적도 부근에서 맞이한 2017년, 보름이가 생기다

1월 1일부터 팔라우로 날아갔다. 아기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중이니 둘이 온전히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신나게 놀자는 취지이다. 다이빙하고 신나게 먹고 마시고, 둘이서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깔끔하게 종쳤다.

 

남들은 결혼을 안정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이다. 옆에서 보기에 꽤 불안정하게 비혼 생활을 마흔까지 해 왔다. 직장도 자주 옮기고 이런저런 사건 사고도 꽤 많이 치고 어느 하나에 안주하지도 못하고 놀기도 징하게 논다. 그런데 정말 단조롭다. 변화하는 것들은 제각각이지만 큰 관점에서 작은 차이만이 물결치고 있다. 그런데 결혼은 다르다. 아예 서식지의 지형지물이 천지개벽한다. 발맞추어 나도 물리적으로 변한다. 기존과 완전히 다르다. 내 경우에는 변화의 속도와 폭도 빠르고 크다. 부부의 쿨한 연애 기간을 길게 가져가지도 못한다. 게다가 일을 대하는 관점도 과거와 달라진다. 마음대로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내 안의 더 단단한 고갱이에 매달리면서 더 과감한 선택들을 한다. 아내가 아기를 품는다. 매일매일 매주 매달의 시간을 지나며 나와 아내는 빠르게 변한다. 아기가 나온다. 그야말로 매일이 다르다. 이렇게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상황으로 간다. 도대체 어디가 안정적이라는 걸까? 훨씬 다이나믹하고 흥미진진한 인생이다. 이거 누가 먼저 좀 가르쳐줬으면 좋았을 걸…

그래서 2018년은 더더욱 기대가 된다!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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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부장이 없는 사진을 겨우 골랐다.

임신한 아내와 공각기동대를 보다가 원작을 우롱하는 설정과 쿵쾅거리는 소리에 둘 다 중간에 나왔더랬다.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들어온 Arrival이라는 영화는 언제부터인지 헐리우드 외계인 공식 사운드가 되어버린 관현악기의 웅장한 웅~ 소리에 놀라면서 겨우겨우 끝까지 봤다. 둘 중에 어느 영화가 나중인지 모르겠지만, 가장 최근 아내와 영화를 본 기억은 저 두가지가 전부다.

보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아내와 둘이 간도 크게 영화를 보러 갔다. 1987.

골수 경상도 대구 집안에 맞딸이면서 사회적 문제를 철저하게 등지고 살아온 아내를 보면서 놀라는 점은 경도된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무지와 공백이다. 중학교까지 배우는 한국사보다 근대, 현대 정치사는 더 먼 이야기다. 미국의 양당제에 대한 상식보다도 한국의 정당정치에 대한 지식이 없다. 아마도 반쯤은 의도적인 무관심일테지만 관점을 수립하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준의 지식만 쌓여 있으면 쉽게 경도되고 말 것이다. 아마 이런 흐름이 쌓여서 반지성주의에 육박하는 이상한 극우가 형성됐을 거라는 생각에도 이른다. 어찌됐건, 이런 아내의 특징은 내가 섭취하는 소위 ‘진보적’ 대중문화 컨텐츠들이 그 자체로 재미를 지닌건지 아닌지를 판단해주는 기준점이 된다. 이제는 MBC 사장님이 되신 최승호 감독 겸 PD가 연출한 다큐를 봤을 때가 그렇다. 최승호가 누군지 뉴스타파가 뭔지 모른다. 이게 극영화인지 다큐멘터리인지도 몰랐다. 영화가 다루는 간첩 조작에 대한 이야기, 국정원인지 안기부인지 하는 기관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다. 시사회에서 최승호 감독과 사진 찍을 기회가 생겨서 부탁을 했더니, 영화배우냐고 묻고 웃는다. 그런 그녀가 [자백]을 보고 흥미진진하고 볼만한 영화라고 했다. 아마 박근혜가 추락하는 희대의 사건이 아니었으면 같은 유형의 영화에서 보기 드문 히트를 쳤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입소문을 듣고 꽉꽉 들어찬 관객들의 스펙트럼을 보면서 벌써 이 영화는 재미있는 영화일 거라는 확신이 든다. 어리고 젋은 친구들이 연인끼리 와서 본다. 혼자서 보는 관객들도 꽤 있다. 아마 여러번 보는 사람들도 꽤 될 것 같다. 남자들끼리 와서 본다. 나같은 애매한 세대도 부부와 친구들이 삼삼오오 왔다. 당연히 실제 그 세대를 살아낸 사람들도 어떤 이는 부채감에, 어떤 이는 아련한 기억에 이끌려 엷은 흥분을 가지고 자리에 앉아 있다. 이건 영화가 재미 있다는 거다. 조금이라도 과도한 소위 ‘선동질’이 있으면 가루가 되도록 까였을 것이다. 영화 자체가 꼰대같이 교장질하면 티켓이 안팔려 이미 망했을 것이고. 정말 잘 찍은 극영화만이 그런 스펙트럼의 관객들을 한 자리에 꽉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내도 재미있게 볼 것이다.

박종철로 시작해서 이한열로 끝나는 그야말로 한국 민주세력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배우 열전을 동원해서 끝내주게 버무려 냈다. 아주 약간의 오바가 보이지만 배우들의 연기력과 기본적으로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의 경이로움이 흠을 매꾸고도 남는다. 문맥에서 등장하는 광주까지 포함하면 사실 상 한국 민주주의의 절반을 설명하는 영화나 다름없다. 치욕적인 현대사의 출발과 419, 전태일같은 굵직한 프리퀄만 덧대주면 그 자체로 한국 정치사의 전부다. 정말 한 번 봐야하는 영화다. 장준환 감독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항상 대중성보다는 감식안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대중의 공감보다는 천재의 외로움이 더 멋있게 보였다. 먹고 똥으로 만든 밥그릇이 쌓여가면서 많은 것들이 바뀌어 간다. 이번에는 대중의 공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것인지 새롭게 깨달았다.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와 대중에 대한 멸시를 함께 품었을 그 때의 운동권 엘리트들의 한계는 오히려 이 영화로 해소되고 만다. 빨갱이로 맞아죽으며 던지던 짱돌과 화염병이 제작년 우리가 들던 촛불과 맞닿으며 공감의 양과 질을 극적으로 바꾸고 마는 것이다. 과거 세대는 610 항쟁의 광화문 사거리 사진을 보며 회상에 젖을 때, 새로운 세대는 30년 후 그 광장을 가득 매웠던 촛불의 흥분을 몸으로 느낀다. 세대를 이은 공감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서 공명하는 모습이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치유로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영화 안에서 연유하는 눈물이 작은 흐느낌이었다면, 공감의 공명이 만들어내는 눈물은 격한 통곡에 다다를 정도였다. 영화는 끝까지 센스있게도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불을 켜지 않도록 우리들을 배려해 주었다.

역시나 아내도 몰입하고 눈물지으며 공감에 연대했다. 이 영화가 천만 관객에게 공감의 공명을 끝까지 넓혀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정말 사족이지만, 가공의 인물인 김태희보다 더 가공스럽게 잘못 그린 인물이 하정우가 연기한 검새다. 공안 부장이라고 딱 찍혀 나오는데 이 사람이 그 안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역할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거기 남영동 들락날락하면서 고문 끝나면 도장 받고 그러던 애들이 공안 검사들 아닌가? 그 때 하던 그 짓거리가 국정원에서 문서 조작해오면 그거로 기소해서 간첩 만드는 지금 그 검새 나리들이다. 최환인지 하는 사람이 잠시잠깐 객기를 부렸다면, 아마도 영화가 적확하게 묘사하듯이 경찰 새끼들이 대공이랍시고 대한민국 검찰을 우습게 보는 거에 욱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쪽 편에서 경찰이랑 짜고 어떻게든 묻어보려던 안상수 같은 잡것이 나중에 뭐 목숨을 걸고 진실을 파헤친 검새 히어로 코스프레 하는 것만 봐도 그 때 상황이 실제 어떠했을지 짐작이 된다.

김기춘이 중정 대공에 있다가 서울지검 공안부장이었고, 영화 속의 박처원처럼 실제 고문과 가족 위해 협박을 서슴치 않던 정형근이 안기부 파견 출신으로 공안통이다. 김진태, 황교안이 지독한 골수 공안들이고, 박근혜는 온통 내각과 청와대 인선을 공안검사로 쳐바르기도 했다. 영화 변호인의 부림사건 당시 공안검사는 고영주라고 문재인 공산주의자라고 백주 대낮에 떠들고 다니다가 이리저리 쫓겨나고 벌금 물고 그러는 그 분이다.

박근혜 아비 시대를 얼룩지게 만든 수많은 흠결들 중에 인혁당 사건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나마 진짜 공안 중에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줄줄이 옷을 벗어서 검새 손에서는 사법살인까지는 막았다. 2차 인혁당으로 다시 옭아매서 결국 선고 후 하루도 안지나 바로 다 죽여버리긴 했지만, 그건 또 군인들 특기니까.

사족이 길어졌지만. 공안부장 미화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따끔한 거 빼고는 정말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