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그라운드 제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6211027001&code=910100

자유당이 뭔 포럼인지 위장 쇼를 개최하면서 제목을 ‘보수그라운드 제로’라고 붙였다. 주로 핵폭탄이 직격한 지점에서 폭발이 일어난 곳을 부르는 전문용어가 그라운드 제로, 폭심지다. 9/11 테러사건의 세계무역센터 부지를 지칭하기 시작하면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가치 중립적으로 무언가에 공격당해 무너졌다는 느낌보다는, 악한 적에게 당해서 새로운 시작이나 반격을 의미하는 장소가 더 와닿는 의미다. 9/11 그라운드 제로에서 테러와의 전쟁 선포가 딱 그 그림이다. 이러한 배경 지식을 놓고 볼 때, 보수 그라운드 제로는 언어도단이다. 반동적인 수구가 보수를 참칭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라운드제로의 상징성까지 가져다가 쓴다. 선거에 참여한 시민이 뭐 자살테러 감행하는 테러리스트일리도 없고, 그들이 다시 세우려는 반격이 테러와의 전쟁만큼이나 명분을 쌓은 것도 아닐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에는 물론 개인적으로 반대한다.)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붙인 이름인지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기래기는 quote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출처도 밝히지 않고 보수의 몰락이 침몰한 세월호같다고 빗댔다. 이쯤 되면 그냥 지능이 낮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박근혜, 수구, 사회, 우리의 실패

Confirmation bias

트위터가 의견의 분열을 오히려 강화하는 매체라는 분석을 본 적이 있다.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는 인식에 보탬이 되는 재료만 취하는 경향을 confirmation bias라고 하고,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가 이런 현상을 심화시킨다는 이야기다. 소셜 미디어들이 그런 편견을 전례없이 강하고 빠르게 심화시킬지 모르겠지만, 사실 조중동 vs. 한경대로 요약할 수 있는 매체 당파성도 근본적으로 편견 강화의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나 수백개의 채널 중에 자기가 원하는 채널으로만 원하는 정보를 수신할 수 있는 티비 매체까지 더하면 이제 웹이나 전통 미디어나 별로 차이가 없다. 결국 트위터하는 미국의 리버럴이나 주구장창 종편만 돌려보는 한국의 노친네나 매한가지다.

 

내용 없는 행정 수반의 처참한 실패

여기 박근혜라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 온 나라를 뒤집어 삶고 있다.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듯이 애초에 정신병원에서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비전을 제시하고 도뎍률의 표본이 되며 거대한 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내용이 없다. 대부분의 재벌2세들이 그렇듯 보고 배운 것은 아랫것들을 휘두르는 몇 가지 잔인한 수법들 뿐이다. 그러나 내용의 부실이 현실에서 문제를 만들어 낸 것은 대통령이라는 지위 때문이다. 각 정권별로 정치적 어젠다는 생각보다 명료함을 자랑해 왔다. 이승만, 박정희가 그랬고, 심지어 전두환의 정의사회구현이나 노태우의 보통사람도 명쾌한 메시지가 있다. 이런 어젠다의 결을 타고 실제 내용들이 만들어진다. 김영삼의 문민화 과도기를 거쳐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도 경제적으로는 세계화를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대전환을 이루었다. 위기극복과 대통합, 절차적 민주화 진전 등의 긍정적인 가치들도 제법 큰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명박도 그렇다. 개새끼여도 돈 많이 버는 놈이면 뭔가 경제를 살리지 않을까 하는 어이없는 어젠다가 먹혀들었고, 이런 결을 타고 사대강, 자원외교같이 굵직한 사업들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해쳐먹는 디테일들이 완성되었다.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책임이 주어지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인기영합으로 혹은 출신성분으로만 획득하기도 하는 정치인의 지위와 다르다. 결국 무언가 일을 해야하는 상황이 들이닥치자 내용의 부재가 낳은 부작용들로 인해 그 실체를 낯낯히 드러내고야 만다.

 

최고의 정치인, 박근혜의 승리

그렇다면 정치인으로서는 어땠는가. 박근혜는 거의 완벽하게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인이다. 자기 관점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시대에 내용의 비어있음이야말로 각종 이데올로기와 프로파간다로 꽉 채우기 위한 절대적 필요조건이다. 기호학에서 기표의 존재 조건은 그 자체의 비어 있음이다. 비어 있음으로 인해서 기의를 담는 기능이 가능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목표하고자 하는 의미만을 부정하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기의만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을 가질 때 가장 효과적인 기표가 된다. 인류학에서 흔히 말하는 선물은 어떤가. 가장 순수한 선물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선의를 담기 위해서 기능으로 본질을 흐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를 방어하는 많은 언변들에 ‘순수함’이 계속 등장하는 것은 결코 비겁한 변명이 아니다. 본질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단어로 그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내용과 자격과 의미가 비어있는 박근혜는 신출귀몰한 맥락으로 예수와 같이 작용한다. 사회에서 밀려난 취약한 노인들은 박정희 시절의 향수와 보상을 본다. 재벌들은 십년간 소원했던 전방위적 정경유착의 근원을 본다. 영남패권세력은 통제 가능한, 그러나 매우 강력한 정치 소재를 본다. 십년간 어느 정도 억눌려 있던 온갖 후진적 수구적 당파적 폐해들이 각자의 기회를 본다. 그리고 진심 반 의도 반 섞어서 열광하고 열광케 한다. 그렇게 그를 정치인에서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각자의 비전을 실천하고자 도모한다. 완벽한 정치인의 완벽한 승리다.

 

승리의 이유, 패착의 이유

노무현이 만들었다고 자신했던 시스템은 이미 이명박을 통해 붕괴되었다. 그렇게 쉽게 붕괴될 것이었으니, 애초에 가졌던 자신감이 과한 것이었을테다. 최소한의 시스템도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내용도 없는 정신병자가 대통령을 꿰찼으니 어마어마한 공백이 자체적으로 흡입력을 발휘할 수 밖에 없다. 이제 구태들, 그를 옹립했던 패권세력이 일을 도모할 순서다. 그런데 거기서 계획이 살짝 틀어지기 시작한다. 온통 비어있고 순수하기만할 것 같았던 박근혜에게 인간으로서 과거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순수한 국익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그 아비도 제대로 실천한 적이 없을 것인데, 갑자기 정신적으로 망가진 삼남매의 장녀가 실행할 수 있을리 없다. 패권자들의 자신감, 의지와 달리 한 번 올라탄 지위에서 그는 장막을 치고 혼자 밥을 먹고 티비에 몰입하며 하면 안되는 것들을 하기 시작한다. 내용이 없는 그였는데, 그 내용이 필요한 일들에 손을 대려 하니 당연히 문제들이 생긴다. 비어 있는 상징은 내용에 대한 비판이 제대로 적중하는 순간 효용을 다한다. 한 기표에 여러가지 기의가 충돌하는 순간 기표는 언어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답답하지만 공격을 막고 공격이 나올 진원을 차단하고 김기춘의 메모처럼 전력으로 발본색원할 수 밖에 없다. 이명박이 파괴해버린 시스템의 잔해를 넘어 도저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들이 이제 그 빈틈을 매꾸기 시작한다. 최순실과 그 복잡한 가계, 전직 호빠 선수, 전직 체육인, 영혼을 팔아버린 교수와 공무원, 삐급 밴드 리더들이다. 애로비디오를 찍던 배우가 정치인을 하면 안된다는 법은 없다. 밴드 리더가 문화 융성을 위한 조직장을 하는 것도 좋다. 그래도 되는 이유는 시스템이 그 능력을 검증하고 권한을 위임하고 견제하고 감시하기 때문이다. 여기는 그렇지 못하다. 정신병자 주변의 망가진 사람들이 깨진 유리창을 넘어 마구잡이로 독가스처럼 새어들어와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 민주화와 함께 가장 눈부신 성장을 기록한 아시아의 용, 동북아 외교에 가장 중요한 고임돌같은 나라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 패권세력이 아차 싶지만 수구들이 거기까지 이길 수 있었던 조건들로 인해 막을 방법이 없다. 그렇게 사태는 모두의 통제를 넘어선다.

 

실패의 크기

박근혜는 아주 상징적인 실패다. 친일부터 이어져온 소위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기실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 사회의 1%가 구체적으로 어떤 얼굴인지, 높으신 분들이 가진 컨텐츠가 무엇인지를 포르노처럼 까발린 실패다. 영남패권들이 대선에 손발묶인채 당하는 것을 벗어나고자 서둘러 고름을 짜서 터뜨렸지만, 이미 외과적 수술 없이 적폐를 낫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온갖 정치공학적 시도들이 실패한다. 단순히 부조리를 갑작스레 깨달은 시민들이 눈을 떠 쳐다보는 것만으로 과거의 승리 방정식이 새로운 힘의 장으로 던져져 작동하지 않는다. 아무리 손학규가 노동자 코스프레를 해도, 아무리 안철수가 공자왈 하며 영남 사투리를 구사해도, 아무리 항상 통하던 모른다, 기억이 안난다로 일관해도, 아무리 네거티브로 어젠다를 바꿔보려고 해도 도대체가 먹히지를 않는다. 먹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주서기 어려운 시민의 힘에 직면한다. 심지어 진보 연 하던 야권조차 살얼음 판을 걷는 장님이나 다를 바 없다. NYT는 이런 상황을 간명하게 정의한다. 구조적 부패의 파국. 시민사회,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들이 뿌리내리지 못한 사회가 21세기에 어떤 형벌을 받는지로 간단하게 결론이 난다. 명쾌한 진단만큼, 그 실패의 크기는 phenominal하다.

 

그래서?

교과서를 바꾸려는 패권자들의 의도를 역이용할 필요가 있다. 교과서에 무엇이 있길래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까. 왜 트럼프에 반대하는 멕시코 이민자 가장은 미국 헌법 요약서를 들고 힐러리 유세에 나섰을까. 도대체 민주주의라는게 뭘까. 우리는 어떻게 한국이라는 사회를 만들어 왔나. 다른 나라는 어떤가. 무엇이 사회를 사회답게 하는가. 선진국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합의를 기반으로 어떤 체제를 운영하고 있는가. 영어, 중국어, 수학, 경영학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이미 교과서에 있다. (혹은 없고, 없어지고 있다.) 객관식 답안지를 채우기 위해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같은 상황에 다시 돌아가볼 지점으로서 알게모르게 거기 있어왔다. 인류의 사회 전환을 이끄는 혁명을 한 적도 없다. 독립을 쟁취하며 새로운 사회의 기반을 합의해 보지도 못했다. 급속히 수입된 서구 체제를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며 근대를 개척한 적도 없다. 기회주의자와 원칙없는 엘리트들이 근대 백년간 진 적이 없는 나라다. 게다가 매카시즘이 법률적 지위를 공고하게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이번 크나큰 실패는 21세기 극우 포퓰리즘이 확대되는 시점에 우리가 가진 수십년 이내 유일무이한 기회다. 상식적인 질문을 하고 상식이 무엇인지 다시금 합의하고 살고 싶은 사회를 실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쏟아부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386이 만든 87년 이후 일보후퇴한 사회를 이보 진전시킬 절호의 기회.
이 관점을 가지고 각자 이야기해야 한다. 그냥 쳐다만 봐도 이 사회에 미치는 힘이 이렇게 크다. 이제 이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럼 얼마나 멋진 일들이 일어날지 두근두근하지 않는지.

한국은 서유럽의 오래된 미래고, 미국의 가까운 미래다. 이제 예정된 실패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진짜 서구의 미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도 진짜 미래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미래는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을 감옥에 보내고, 재산을 몰수하고, 온 국민의 조롱거리로 만든다고 해서 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전쟁에 승리한 이후 점령지 마을을 약탈하는 행태는 이미 수백년 전에 인류가 기대던 습관이다. 혹은 로마 이후 잃어버린 기억으로 반복하는 실수다. 박근혜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사회의 문제임을, 우리가 들지 못한 촛불이 근원적 문제임을 떠올리지 못하면 득점도 못한 채 서브게임은 다시 저들에게 갈 뿐이다.

부르키니 금지법 논란

최근 프랑스의 부르키니 금지법에 대한 기사나 칼럼들을 대충 지나치다가,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글이 있어서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수영복 전쟁: 부르키니와 라이시테 그리고 프랑스 공화주의 (슬로우뉴스)

함께 연작으로 게재된 두 편의 글도 흥미진진하다.

종교와 여성의 복장: 글자그대로 vs. 글에 담긴 정신

테러의 위협 vs. 욕조의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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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막연한 동경을 가진 불문학도로서 최근 부르키니를 금지하겠다는 논란은 얼핏 이해하기 어렵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는 프랑스. 공화정체을 혁명을 통해 출산한 근대사회의 모태. 영미 제도권에 철학, 문학, 예술, 경제, 군사 전반에서 (미약하지만) 대항마 구실을 하고 있는 나라. 한국 사람들에게 유명한 소르본 대학은 그저 지역 순번에 따라 파리 제4대학일 뿐인 쿨한 나라. 그 대학들에 진학하기 위해 치르는 바깔로레아의 철학 문제를 놓고 온 국민이 토론에 빠져드는 나라. 게다가 철학 문제들의 수준이란… 우리에게는 도저히 같은 지구 상에 사는 존재들같지 않은 질문들일 뿐이다: 미학과 윤리와의 관계를 논하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꿈은 필요한가?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생물학적 지식은 일체의 유기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등등. 십대부터 이런 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독서와 교양을 쌓은 나라에서 이슬람을 억압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부르키니를 금지한다? 사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지경이다.

부르키니 금지법을 비판하는 글들은 직관적이다. 부르키니가 프랑스 안보에 위협이라는 주장을 인용하며 그 편협한 시각을 비웃는다. 부르키니를 입은 여인을 해변에서 강제로 벗게하는 사진은 시청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차이를 인정하고 자기 결정권을 지닌 개인을 지지한다는 윤리적 우위를 발판 삼아 온갖 준엄한 비판을 쏟아낸다. 비판을 넘어 비난과 조롱의 시도도 넘친다. 수녀들이 수녀복을 입고 해변에서 물장난 치는 한 장의 사진 아래 부르키니 금지를 비웃는 한 줄의 코멘트를 보자. 부르키니를 입은 여인에게 손가락질하는 프랑스 인이나, 폭탄을 숨긴 것 아니냐고 추궁하는 만평도 돌직구다.. 단순한 조롱에서부터 세계 석학들의 묵직한 비판까지, 다양한 계층과 의견들을 볼 때 부르키니 금지법 비판은 당연해보인다.

그러던 중에 글 처음에 언급한 포스트를 하나 읽게 되었다. 무식을 밝혀주는 글이다. 부르키니 금지는 사실 상 프랑스라는 국가의 뿌리와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 프랑스는 우리말로 세속주의라 번역되는, 종교와 정치의 철저한 분리 기반에서 생겨난 공화국이다. 종교에 휘둘리고 종교와 결탁하거나 경쟁하던 왕권, 봉건제를 한번에 혁파하면서 태어난 국가가 세속주의를 헌법의 1조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도 헌법을 보면 국민에게서 권력이 유래하는 민주 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고, 임시정부에 뿌리를 둔 시발점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최근의 미국처럼 헌법의 문자적 의의를 다시 강조해야 할 만큼 실상이 궤를 벗어나는 것도 현실이긴 하다. 우리나 미국이나 약자들은 다시 헌법책을 들고 저항할 지경이다. 그러나 프랑스는 헌법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오래 전에 학교에서 니캅이나 부르카 등의 착용을 금지한다는 뉴스가 기억난다. 그 때에도 뭔가 명쾌하지 않은 느낌으로 뉴스를 봤다. 프랑스는 세속주의를 현실 법체계에 최대한 반영하여 공공연한 종교 상징을 공공 장소나 시설물에 전시하는 것을 법적으로 금하고 있다고 한다. 긴 역사를 가진 건축물이라던지, 특정 종교의 성직자라던지 일부 예외 규정이 존재하기는 한다.성공적인 비난 중의 하나인 물놀이를 하는 수녀들 사진의 경우, 성직자에 한해서 종교적 표현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왜곡된 주장이다. 어쨌건 프랑스 법은 일관되게 세속주의를 실천해 왔으며, 그 영향력을 강화해 왔다. 이명박이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던지, 서울 시청 광장에 대형 십자가를 짊어진 크리스마스 트리를 설치한다던지 하는 행위는 프랑스인의 관점에서 불법인 것이다. 세속주의의 원칙에 더해 프랑스가 생각하는 진보의 정당성도 부르키니 금지의 한 축을 이룬다. 바깔로레아 철학 문제와 같은 고민을 많이 해서 그런지 ‘판단’이 필요한 영역에서 입장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다. 인류의 진보가 윤리적 판단 기준을 변화시킨다는 전제 하에, 부르키니에 대한 금지가 여성 인권을 확대라는 윤리적 실천이라 보는 것이다. 이 부분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몇몇 아프리카 부족들은 전통, 종교를 이유로 생활환경이 바뀐 현대에도 여성 할례를 행하고 있다. 이슬람 혹은 인도와 같은 회교 국가 일부에서는 여성을 부속물이나 재산처럼 취급하며, 명예 살인의 희생양으로 삼기도 한다. 더 극단으로 가보자.  부족 간 갈등 해결을 전쟁으로 해결해야 하는지, 전쟁에 이기면 몰살, 강간, 약탈로 끝을 맺는 것이 정당한지, 식인 풍습은 어떤지를 생각해 보면 인류의 진보가 수행해야 하는 윤리적 변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극단적인 문화 상대주의는 인류 전반에 공히 적용할 수 없고, 그 선을 긋는 것은 어떤 기준에 의한 선택이어야 하며, 그 기준을 인류의 진보라는 방향성에 놓겠다는 건 지극히 온당하고 고무적인 일이다. 결국 부르키니 금지에 대해 느껴지는 거부감은 기술적으로 볼 때 주당 30시간 노동을 한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보를 실천하는 수준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적인 현상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움직임은 프랑스의 예외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독일이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등 확산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단순히 프랑스의 부르키니 금지가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 여성 차별을 해방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도 현실 세계에 적용할 때에는 다양한 전술적인 선택들을 고려해야 한다. 법의 변화는 우리 모두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사회를 이끄는 힘으로 작용할 때 많은 희생과 비용을 요구한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부분은, 법의 변화는 급진적이면 안되고, 변화의 방향을 섬세하게 반영하되, 변화를 현실로 뿌리내릴 수 있게 맨 뒤에서 사회를 아우르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점이었다. 먼저 부르키니를 입는 여성들의 입장을 상상해야 한다. 계몽적인 교양 시민의 입장에서 부르키니를 입는 여성은 억압에 처해 있는 피해자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종교적인 영향력은 이성의 설득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개인의 행복은 이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종교에 충실한 이슬람 신자들은 삶을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둘째로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로 반 이슬람 정서가 칼을 다듬고 있는 와중에,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자들의 부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대중을 파고든 이데올로기가 수많은 비극을 낳았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진보를 진전시키는 한걸음 한걸음이 부르키니 금지처럼 소수의 의결로 간단히 이루어진 적이 없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되는 교훈이다.

결국 대의는 이해할만한 맥락이 있으나 조급하고 급진적이며 논란을 부르는 입법은 프랑스의 어떤 조바심을 말해주는 증상이다. 앞서 소개한 글의 저자는 프랑스적인 근본이 위협받고 있으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프랑스의 적응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말한다. 천천히 알맹이부터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공화국은 이제 없다는 것이다. 급격한 난민 유입, 이미 10%를 차지하는 프랑스 내 이슬람 인구는 부르키니 금지와 같은 법률들이 상당한 프랑스 국민을 적극적으로 차별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맞는 주장이지만 역시 첨예한 대결 구도에서 한 쪽을 선택하는 의견이라는 점에서 프랑스가 채택하기 어려운 답으로 보인다. 저명한 생명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뜨뜻미지근한 조언을 한다. 윤리적 선을 긋는 것은 필요하지만 예민하고 섬세한 일이고, 이것은 밀어부쳐서 달성하기 보다 감화를 통해 보듬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모두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노학자다운 진단과 처방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만들어 낸 물리적 조건 변화가 너무 빨라서, 문화적 감화에 필요한 시간과 자원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실천하기 어려워 보인다.

처음 소개한 저자가 일상화된 테러리즘을 받아들이고 사는 법을 논의의 말미에 붙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프랑스의 조급증은 테러리즘의 공포가 지배하는 현 사회적 분위기가 낳은 미숙한 인식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차분한 대응보다 더 극단적이고 믿을만한 것을 중심으로 뭉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미국이나 다른 여타의 국가들처럼 노골적인 국수주의, 배타주의, 반이슬람 주의로 내달리지 않은 것은 프랑스적인 훌륭함이다. 그럼에도 부르키니 금지법은 전술을 바꿔야한다. 변화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떨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시기가 묘하게도 지카 바이러스라는 새로운 적이 인류의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 소두증 영아의 사진이 주는 직관적인 두려움, 통제하기 어려운 모기라는 전염 매개체, 게다가 인류의 기본적인 본성인 섹스로까지 전파되는 전염경로까지, 지카는 무서운 위협으로 다가올 법도 하다. 그러나 인류는 훨씬 더 냉정하고 차분하게 공격에 대응하고 있다. 지카에도 불구하고 브라질은 올림픽을 치뤄냈고, 싱가폴에서는 변형되어 위험이 적다고는 하지만 지카가 토착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상어의 공격으로 죽는 사람의 수가 자판기가 넘어져서 깔려 죽는 사람보다 적고, 어쩌면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 도시의 삶 자체인 현실에서, 과장된 위협에 대한 대응은 보다 더 이성적이어야 한다. 테러리즘도 마찬가지다. 최근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본토에서 테러로 목숨을 잃을 확률보다 욕조에서 익사할 확률이 더 크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테러는 결국 심리전이다. 공포에 질린 과잉 대응은 오히려 테러리즘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 따위를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거나, 부르키니 금지 법안을 내걸고 정치적 어젠다를 파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피터 싱어와 같은 혜안을 실천하려면, 먼저 테러와 함께 사는 법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낼 수도 있겠다.

사족이지만 북한의 핵실험 이후 한국의 정치인들이 취하는 태도는 테러와의 전쟁을 천명한 부시가 명함도 못내밀 수준이다. 트럼프가 멕시코나 이슬람에 대해 내뱉은 망언들은 한국 수구 정치인들에게 한 수 지도를 받아야 할 유아적 수준으로 보일 정도다. 오랜 시간 동안 좌파를 말살해 온 효과가 이런 국면에 가장 돈값을 하게 된다. 진정한 가치를 배재해 온 어정쩡한 중도우파는 이런 류의 어젠다에 선택지가 별로 없다. ‘우리도 기본적으로 동의하는데… 뭐는 어떻고 뭐는 어떻고 등등 그래서 너네는 잘못이다.’  결국 궁색한 반박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궁색해 지는 순간 이미 판은 수구가 주도한다. 노골적인 퇴보로 달려가는 경주에서 머뭇거리는 개 따위가 통과할 결승선은 없다. 다른 방향에 먹이가 있다고 짖어댈 패기도 없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퇴보의 길로 모두 내달리지 않고 토론의 여지를 두며 방향을 찾는 프랑스에게 건투를 빌고 희망을 기대해 본다.

정말 우리들은 분노하는가?

공직자 ‘막말 퍼레이드’ 국민은 분노한다.
한국일보|권경성 입력 16.07.11. 04:49 (수정 16.07.11. 09:46)

 

 

이번 정권 들어서, 아니 좀 더 길게 보면 수구가 다시 정권을 탈환한 이후 고위 공직자, 선출직 공무원, 각종 기관장들의 설화는 시사하는 면이 많다. 원래 말로 흥하고 말로 망하는 것이 비일비재한 곳이라 설화가 끊이지 않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러나 최근 10년간의 설화는 반복되는 일관된 흐름이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내용으로는 소위 극우, 한국 수구가 가지는 (부끄러운, 혹은 역겨운) 지향점들을 늘어 놓는다는 면에서 일관된다. 성추행이나 희롱은 여성혐오나 남성 중심의 시각을 대변하고, 일제에 대한 칭송 – 특히 학문적, 역사적 노력과 발맞추어-은 제법 그럴싸한 주장까지 이르렀고, 외국인에 대한 제국주의적 시각 혹은 그냥 처참한 수준의 외국인 혐오, 동성애 혐오, 장애에 대한 혐오가 판을 친다.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노오력 이데올로기는 헬조선에 와서 그야말로 그 전방위성과 강력함이 새로운 경지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특권층의 수구적 정당화를 위해서 천황폐하 반자이에서부터 99% 대중은 개돼지라는 인식까지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형식 면에서도 의미심장하다.  마치 질병에 대한 예방접종을 맞듯이, 한 번 찔러서 병균을 주입하고 기다리고, 다시 그걸 반복하는 행태를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성동격서에 감명을 받은 듯, 정치인, 경제인, 외교관, 행정부 관리, 공공기관, 기자나 언론사주, 학계, 예술계, 연예인들이 바톤을 던지듯이 각자의 독을 주입하느라 신문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이렇게 우리는 혐오와 극우의 독에 서서히 중독된다.

십년전 한 탐욕스러운 기업가가 대통령이 된 이후, 위와 결은 다르지만 역시 비슷한 현실을 재미있게 생각한 적이 있다. 리더가 사리사욕과 탐욕에 찌든 인간이다 보니, 군, 관 할 것 없이, 말단 행정직까지, 관변 단체나 공공 기관들까지 나서서 부패를 당연시하는 현실이 펼쳐졌던 것이다. 이와 함께 건설,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환경, 안전과 관련된 규제 빗장이 풀리고, 공공영역의 사영화가 더 침습적으로 진행되면서 수많은 이권 경쟁이 폭발했다.(사대강 비리는 우리 죽을 때까지 계속 파도 파도 또 나올 것이다. 예시 한개) 경제가 뭔지 보여주겠다는 행정부에서 터무니없는 한 기업의 사장이 벌인 뻘짓이 아닐 수 없다. 리더의 소양부터 정책의 방향성까지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룰을 부수고 탐욕을 채우는 무한 경쟁을 지시한 거나 다름 없지 않을까. 사기와 뇌물, 부패와 관련된 범죄가 전 정권부터 늘었는지 구체적인 숫자를 확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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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부패지수는 명백하게 MB효과를 증명한다.

반면에 이러한 현실을 똑같이 알려주는 다른 사례도 있다. 내 지인 중에 집안이 망해서 이십년 넘게 집안의 빚을 떠안고 고시원을 전전하고, 월급을 다른 사람 명의로 받으면서 버티는 분이 있다. 사실 워낙 잘 살던 집이라서 부동산 투기 붐에 따라 주택이나 아파트 뿐만 아니라, 멀리 보고 토지에 대한 투자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성남 쪽에 그런 땅이 현재 시가로 100억원 수준이라고 한다. 이게 개발 제한과 같은 비교적 간단한 허들만 넘으면 바로 현금화될 수 있는 자산이다. 큰 무리도 아니고, 이미 근처에 개발 사례가 많이 있기 때문에 담당 공무원에게 적당한 기름칠을 하면 될 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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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MB 효과

그런데 이게 2010년 이후 성남시장을 지키고 있는 이재명 때문에 절대로 안되는 상황이라 좌절하고 있다. 이권과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에 대해 강한 메시지를 보내고, 시장 본인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주변 관리를 철저히 하고, 관련된 정책 방향성도 일관되게 유지하니, 하위 말단 공무원까지 그 흔한 기름칠도 안통하는 곳이 되고 만 것이다. 지인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이지만, 기업인 출신의 대통령과 반대되는 곳에서 리더의 필요 덕목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결국 리더는 똑똑하거나, 많은 경험이 있거나, 능력을 증명하는 부분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인 살아온 길, 품성 이런 것들이 큰 조직에게 면면히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번 정권에서 반복되는 설화들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최근의 온라인 스타는 교육부를 개돼지 사육부로 둔갑시킨 고위공직자 나 모씨이다. 2급이나 되는 정책기획관이라고 하고, 전 정부에서 청와대 측근으로 시작해서 이번 정부에서도 승승장구 하고 계신 훌륭한 분이다.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이 분과 교육부, 더 나아가서는 현 정부에게 온라인 짱돌을 던지고 있다. 야당도 건수 잡은 듯 나서서 비난을 퍼붓는다. 유쾌하고 사이다같은 해학들이 온라인에 난무한다. 초반의 분노를 넘어선 흥겨움까지 느껴지는 상황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분노하고 있나? 우리는 망언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정말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나? 그들과 우리는 다른가? 우리는 그들을 그토록 비난할 위치에 있는것이 맞는가? 나는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나모씨는 기본적인 신분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세상의 기본 원리라고. 미국을 예로 들면서 인종을 신분으로 본 것은 그의 얕은 교양 수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인식이야 말로 외국인 혐오에 동조하는 99%의 대중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점이다. 동남아 사람들은 게으르고 사기를 잘 치며 성실하지 않다고 규정하는 것, 그게 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어차피 고급 인력이 될 수 없다고 보는 시각과 어느 부분이 다른가. 세상의 기본 원리가 경쟁에 의한 차별이라는 생각, 애초에 타고난 씨에 따라 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학원 투자가 결정되고 그에 따라 나타나는 학교 서열을 우리가 얼마나 열렬히 받아들이고 있는가와 다르지 않다. 내 계급 위를 부러워하고, 내 계급 밑을 멸시하기 위해 그렇게 촘촘히 계층을 나누는데 목매고 있는 99%의 대중들은 이미 뼛속까지 나모씨와 같은 부류다. 무슨무슨 ‘충’으로 특정 사회적 집단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언어가 일상화된 대중이 도대체 무엇에 발끈하는지 나는 알수가 없다. 공감의 능력이 결핍되어 있어서 세월호와 같이 충격적인 사건에도 반응하지 못하고 시위꾼과 배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대중이다. 우리는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희생자를 자기 자식이라 생각하지 못하는 나모씨와 어느 부분이 다른가. 나는 결코 나모씨가 우리 일반 대중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명백한 1%라고 보기도 어려운 나씨가 가진 생각이야말로 계층의 사다리를 노오오력으로 올라가는데 성공한 우리가 가지게 될 얼굴이다. 진짜 1%는 그런 망언을 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gated community에서 새어나오지도 않는다. 나모씨가 바로 우리의 성공적인 롤모델인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대중이 그렇게 분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말고는, 그저 우리의 모습일 뿐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나는 그렇다.

군중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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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말해 우파, 현실적으로 말해 수구 세력의 역사와 내공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책. 게다가 단순 반동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프랑스 혁명이 만들어낸 거대한 힘에 대적하기 위해 군중을 고민하는 모습이 놀라움. 계속 읽기 “군중심리학”